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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30. 2020

노숙자에 대한 편견이 깨진 이유

존재의 자취,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의 주체

 '노력'이라는 말이 정당하고 익숙한 척도로 자리 잡은 21세기 자본주의에서 노숙자들은 배척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다. 노력이 무가치했던 시절은 없었다. 고통은 감내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에 의해 노력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들인 노숙자들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 해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세계 어디를 가도 노숙자는 있다. 가난도 어디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길거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대다수는 노숙자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질 것이다. 그럴만하다. 그들의 누추한 행색과 옷매무새, 지저분함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들, 그리고 그들의 무기력한 표정과 더불어 실제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노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물며 길을 가다가 길을 막는 사람에게도 짜증을 내는 것이 인간인데-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길거리로 내몰았을까?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노숙자였을까?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결국 노숙자가 되어 차가운 길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 또한 노숙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바뀌면서 이런 의문들이 생긴 시점은 한 친구를 만난 후이다.


 내가 만난 친구는 아일랜드의 인연이다. 그곳에도 노숙자가 정말 많다. 한 번은 식료품점에 가다가 노숙자가 어떤 여성에게 돈을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 연배가 꽤 있는 여성이었는데 돈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냈었다. 화를 낸 이유를 들어보니 그 여성이 노력해서 번 돈의 일부인 세금이 노숙자에게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너에게 나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거든!- 또한 더블린 외곽에는 정부가 무상으로 집을 제공해 주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노숙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갈 때 두 눈이 풀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노숙자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의 팔에는 주사 자국이 있었다. 이 정도인데 누가 노숙자들을 싫어하지 않겠는가?


 아일랜드는 섬이라서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잘 없지만, 비가 빈번히 내려서 체감 온도는 상당히 낮다. 그래서 정부 차원 복지로 노숙자들에게 침낭을 제공해 주었다. 밤 10시가 넘으면 낮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노숙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사치재-목에 걸린 플라스틱이 행복을 줄 수 있다니-를 파는 매장 진열창의 미세한 불빛 아래에 침낭을 핀다. 그 미세한 불빛이 아주 사소한 온기를 제공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 안정감 때문인지, 어쨌든 그들은 그것에 의존해 잠을 청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어디론가 사라진다. 더블린 시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세어 봐도 100여 명 정도는 훌쩍 넘지 않았을까?


 그러다 어느 날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일이 끝나고 맥주 한 잔을 걸친 후, 그 동생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 진 기억이 나진 않지만 신나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 친구를 보니 눈물을 쏟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뿐이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조심스레 울음의 연유를 물었다. 그러니 그 친구가 말하길, "이 사람들은 왜 여기에 누워 있어야 하냐고"라고 이상한 설움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그들의 처지가 너무 딱해서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는 그 친구가 흘린 눈물의 가치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살면서 3번만 우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것만큼 개소리가 아닌 것은 없을 것이다. 반면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 아니라 못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에겐 더 충격적이었다.)


 한 번은 일하던 와중에 노숙자가 찾아왔다. 노숙자는 그 친구를 'My friend'라고 불렀다. 그 노숙자는 가게에 찾아와 자신의 친구를 찾았는데, 그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돈을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 친구는 지하에 숨었고 사모님은 오늘 일하는 날이 아니라며 면박을 주면서 쫓아냈다. 지하에 숨은 친구는 난처함에 한숨만 쉬었다. 그렇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 친구가 한 번은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나에게 돈을 빌려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항상 '너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말하며 '무얼 하든 간에 자신감을 가져라'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성공할 진 알 수 없다. 또한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이유만큼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세상에 필요하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노숙자에게만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겠는가? 그 친구는 세상 어느 누구 앞에서라도 친절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애착을 가질 것임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호구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지금도 그 친구의 사소한 말과 행동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왜 그랬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근데 그 이유란 것이 신화적 개념으로 치부되며, 문학적 수사로만 활용되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철학적 난해함으로 귀결한다. 그리고 이런 반문이 생긴다. 왜 나는 노숙자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분명 나와 그 친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박 겉만 핥은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내린 결론으로, 이미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라는 해괴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어떤 의미로 불행하게 태어 났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연민이라는 주체를 불쾌함에 빠드리는 감정에 휘둘리며, 그 감정이 만든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고뇌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야만이 살아 갈 수 있다는 역설을 품고 있다.


 참고로, 당시에 그 친구는 부모님이 한국인이지만 해외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한국어가 미숙했지만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감성적인 사람들이 언어 구사 능력이 탁월하며 빠르게 언어를 학습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친구가 아주 적절한 사례이다. 4년도 더 된 일이고 그 친구를 안 본 지가 3년이 넘었으니 한국어는 더 능숙해져 있을 것이다. 30살까지 목표가 8개 국어 였으니 지금은 어떻게 돼 있을 지...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점이 3개 국어를 하면서 취업 걱정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능력으로 꽤 나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법 한데 말이다. 1개 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맹목적인 낙관론을 펼치는 나의 주접은 그 친구가 자의적으로 과소평가한 역량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기만 했다. 아직도 그 친구가 한국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는 손님에게 명함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ps. 노숙자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그 친구가 떠올라 적게 된 글이며, 노숙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엄밀히는 버리게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왜 노숙자들은 조커가 되지 않는 것인가? 무언가 잃을 것이라도 있는가? (부제는 그냥 힘 한 번 줘 봤다.)


참고 : <매일경제> "밟을라 조심"… 거리 곳곳 사람 배설물 美 샌프란시스코에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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