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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26. 2020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대립하는 두 질서에 대한 이해

 최근 용접공 비하 논란에 의해 직업 귀천에 대한 열성적인 말들이 오갔다. 이 논쟁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는데, 이 갈등 속에서 강조해야할 두 개념이 등장한다. 그것은 '위선'과 '도덕성'이다.


 인간 사회는 '위선'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다. 이는 사회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에서도 주로 나타난다. 예컨대,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는 격언과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우스겟 소리를 익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두 말 중에서 내가 후자를 '우스겟 소리'라 규정한 이유는 친한 사이에서 농담 정도로만 소모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진지하게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 관계에 있어 심각한 문제들을 겪을 것이며,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선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약속은 '말' 자체이기 때문이가. 즉 위선이란 말과 행동의 불일치이다. -우리는 왜 정치인들을 불신하기에 이르렀는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정언은 언행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쟁 와중에 '귀천의식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위선자들이라 지적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으로는 사람의 급을 쉽게 나누며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귀천을 부정하는 자들을 위선자라 칭한다면 과연 이 말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귀천이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귀천은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면밀히 분석해야할 점은 저 말의 정당성이 아니다. '귀천이 없다'라는 표현이 지향하는 바와 귀천을 나누는 척도를 알아야만 한다. 우선적으로 척도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연히 '노력'이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직업에 있어서도 자연스레 '희소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비슷할 때가 꽤 많다. 우리는 노력을 많이 해야하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함양해야하는 직업군들을 보면 사회적인 위상이 높으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롭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음에 따라 그만큼 가치도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직업군들은 어느 누구나 원하지만 자리는 그만큼 없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비숙련 직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위험하게 짝이 없으며 더럽고 힘들기 때문에 누구나 기피한다. 고생도 많이 한다. 하물며 그런 직종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꺼려하기 일수이다. 그런 일들을 절실히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취향을 갖고 태어났거나 또는 거창한 목표가 있지 않는 이상, 그 일을 선택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평범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귀천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에 대한 환멸을 갖고 있을 것이며 노력의 중요성에 대해 절실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누구보다 노력하면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이 옳다. 그러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엄격하며 극단적으로는 가학적이기 까지 한 성향이 보상심리라는 것을 알까? -'자기 만족'을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생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에는 오류가 있다.


 황희정승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황희정승이 길을 가다 농부와 눌너소와 검은소가 밭을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황희정승은 농부에게 가서 물었다. '저 두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오?' 그러니 농부는 황희정승의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누런 소'가 일을 더 잘한다고 말했다. 그는 왜 굳이 귀에 대고 그런 말을 했을까? 당당하게 검은 소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해도 되지 않았을까?


 농부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농부는 소들 중에서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하며 자신에게 더 필요한 지를 변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게 '귀한' 소가 어떤 소인지 평가내릴 수 있다. 그러나 농부는 귓속말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 일화에서 농부의 행동이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나누는 척도가 된다.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귀함과 천함을 판단할 수 있다. 고로 어느 누구에게나 귀천 의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데카르트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들은 이성이라는 공통된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을 귀하지 않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남의 가치를 막무가내로 평가절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귀천 의식이 있지만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고 싶어 한다는 과학적 사실이 있다. 보통 2년 내지 3년-권태기-가 지나면 몸 속에 행복감을 주는 호르몬 분비량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다른 이성과 교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과학에서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특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고 무턱대고 바람을 피는가? 물론 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어떤 이유로 인해 바람을 피지 않는다. 바람을 피고 싶다는 충동보다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더 집중을 한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런 과학적인 사실이 있다고 한들, 우리에겐 그에 맞추어 행동하고 싶어도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예시에서 관건이 되는 점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음'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만약 다른 이성을 만나고 싶으면 헤어지고 나서 만나면 된다.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것은 바람을 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꼭 보면 바람을 피더라. 헤어지지 않고 바람을 피는 이유가 뭘까?)


 우리 모두에게는 귀천 의식이 있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어느 정도의 정성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양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대상에 가치가 부여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귀천 의식이 있으며 그것이 자명한 사실이라고 한들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진 않는다. 황희정승 일화에서 농부는 귀천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위선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반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선하다고 규정된 행동들이 가식적이라면 가식적이다. 이 말에 따라 가식적인 것이 오롯이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가시적이지 않다는 건 인간 관계에 있어 꽤 중요하겠지만, 가식조차도 '선의지'이다.


 우리의 전체 인식능력은 두 관할구역, 즉 자연개념들의 구역과 자유개념의 구역을 갖는다. 이 양자에 의해 우리 인식능력은 선험적으로 법칙을 수립한다는 말이다. 철학은 무릇 이에 따라서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나뉜다. 그러나 그 위에 그것의 관할구역이 세워지고, 그것의 법칙수립이 실행되는 지반은 언제나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들-이것들의 순전한 현상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총괄일 따름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 대상들에 대한 지성의 법칙수립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칸트 <판단력 비판> -

 이 세계에는 두 가지 질서가 존재하며 양립하고 있다. 하나는 정신의 외부에 있는 '물자체'로서 상정된 물질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사회의 규범과 도덕성을 관장하는 형이상학적 질서이다. 이 두 질서는 언제나 양립하면서 이율배반적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 '물자체'로 상정된 질서에 진화론을 놓고 사유한다.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유할 때마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대전제로 깔아 놓는다. 그리고 언제나 '인간적인'과 '동물적인'이 충돌한다. 수많은 사회적 논쟁은 이 충돌 지점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듯하다. 허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인과적 사고의 객관성은 어느 누구나 따르며,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지만 윤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동물이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인 것은 아니다'


 ps.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우리 마음 속에는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어 무한한 이기심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직관적으로 누군가의 불의나 위선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현재 자본주의는 가장 합당한 체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세계는 더욱 진보하는 듯 보이니 애덤 스미스의 이념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국부론>을 쓰기 전에 저술한 <도덕감정론>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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