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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01. 2020

'순수성'에 대한 고찰 3.

'차이'의 개념 앞에서의 기념하는 주체

 2편에서 노벨상과 관련해 사르트르와 관련된 일화를 통해 노벨상에 대해 아주 간략한 사견을 적었는데, 그렇다면 이 상이 주는 긍정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노벨상은 학문적으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각 분야별로 그 해에 가장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엄청난 상금과 함께 이 상을 수여한다. 그런데 사르트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을지언정, 그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폄하하려는 건 그 업적을 남기기 위한 노고를 폄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분명 노벨상은 우수한 정신을 칭송하기 위한 하나의 기념물로써 기능한다. 비단 노벨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가질법한 갖가지 분야에서는 모두 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들의 존재 이유는 자신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의 숭고함을 기린다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다시 사르트르와 관련된 사실을 살펴보면 그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사실과 그의 사유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치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그의 책이 대중들에게 여전히 읽힌다는 사실은 그가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꽤 괜찮은 사유를 했다는 것이다.


 여러 기념행사들 속에서는 무의미와 의미가 병합되어 있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동시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인데, 그 두 성질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을 우상시할 계기로서의 의존적 지평을 열어두면서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함에 내재한 허무를 가리는 용도로써 기능하고 있다. 여기서 의존적 지평이란 지금 세계가 일상적이면서도 이 세계가 어떤 뛰어나고 명석했던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며, 허무란 그런 것들에 의존해 있지 않으면 인간은 목표를 설정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인 틀 속에서 대상의 자질이 충만한지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이르는데, 만약 자질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그 예시로, 최근에 경쟁을 통해 11명의 아이돌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이 불공정한 과정이었다는 논란이 빚어졌다. 여기서 확실하다고 할만한 것은 대중들에게는 그 과정이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전제된 믿음 속에서 뽑힌 사람들은 가장 선망받는 대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말해, 그 과정이 불공정하다는 도덕적 의심 이전에 선출된 11명은 대중의 맹목적인 지지와 함께 긍정적인 인식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념적인 것들은 일종의 실증성으로 환원된다. 이 실증성을 통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며 또한 이것만큼 편리하고 수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우리는 '권위'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영향력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기념적인 것을 얻은 사람은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는 곧 명예스러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인이 가진 말 한마디의 무게가 중요한 것이며 그들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숭상해오던 우상의 황혼이면서, 이것이 사회의 기층적 질서를 사유케 하는 지면으로 이미 할당되어 있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의 환상 자체인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 의식을 가지거나 그에 따라 새로운 발견을 위한 합리적 의심이 아니다. 내가 주지하는 것은 순수함이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주체성'이다. 이것은 '독존'과 반시대성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기념적인 것들에는 탁월함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영역이 순수함의 자리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는 위대한 정신의 실천과 현현과도 연관이 되어 있으며 또한 여기서는 생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무게를 부과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죽음의 한 가지 기능이 있다면 죽음은 한 생애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마치 반 고흐가 죽고 나서야 그토록 얻고자 했던 명예를 얻은 것처럼, 니체가 미쳐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처럼, 스티브 잡스가 남긴 유산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하물며 전쟁 영웅은 전쟁터에서 죽어야만이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말이다. 죽음으로써 탁월해진다는 것은 기념이라는 양식을 통해 실체적인 토대로 이해되며, 그 탁월함을 수긍하는 것은 산 자들에 의해서라는 건 당위적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 의해 저명하다고 여길만한 사람들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받고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서 비롯되어 한 분야의 권위자가 된다는 건 인간에게 꽤 의미 있는 일로 이해된다. 허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방식은 오로지 선의의 경쟁 속에서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갈리는 승자와 패자의 관계에서 승자의 덕목이란 패자를 관대하게 대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며, 패자는 승자를 축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좌절의 순간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관계는 상호적이다. 그러나 만약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승패의 구도는 오직 대립되는 것으로만 이해되는 '자기'로, 이는 종말을 예견한다. 이 사실은 존재론적으로 불온하게만 경험되는 사태이다. 그러니 사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한 것으로 납득되어야만이 적대적으로 출몰할 법한 타자와 소외된 주체성을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그 속에서 화해의 계기를 발견해 온 것이다.


 '화해의 계기'는 역사의 진보 과정이다.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수반되는 것은 반성적 회상이며 그것이 각 주체에게 요구되어야 할 항이다. 그에 따라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또한 이 논리 구조는 정신분석에서 '기억'을 토대로 구성된 의식의 서사구조를 재구축하는 방법과도 동일한 맥락이다. (헤겔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그리고 벤야민에게까지 이르니, 이 방법론의 자명성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다) 이 과정을 통해 재구축의 틈새-이전과 이후의 주체성-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차이'이다. 그러니까, 차이란 주체성의 확장이나 역량의 증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적 개념이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대두되는 사회적 문제의 심급은 이 '차이' 개념이 상호성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조우에서 '차이'는 타자성의 닫히는 계기로만 제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타자와 주체라는 이분법적인 비교로만 이해되는 것이 문제적이다. 일상으로도 경쟁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사회적 인식은 비교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끔 유도하는데, 그런데 굳이 그것을 사회적 인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시금 인간의 내재적 차원의 미규정성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적시하는 바는 인간이 나약함에 대한 환멸이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하기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이미 언제나 나약하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나약함이라는 것을 발견한 후 의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의존성을 발견한 후 나약함이라는 관념적 기호를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자랑하거나 또는 과시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깊은 허영심을 감추고 있으며 그들의 비어 있는 마음이 안정감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나약함의 골은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깊이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우리는 이 나약함을 '존엄성'으로 어느 정도 보상 받는다. 니체가 터부시하려고 했던 것 중 하나인 이 개념으로부터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주권적 믿음일 뿐인 환영적인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로서, '존엄성'이라는 실정적 개념으로 평등을 꾀할 수 있다 하더라도, 타인과의 차이, 즉 재능이나 소질 따위를 통해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 내는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차이의 이면에 자리 잡은 존엄성이 보장하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정도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존엄성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삶을 연명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기능할 뿐이지 '절대적 선' 따위가 아니다. 다시 강조하면 이미 존속해 있는 차이에서 평등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차이에서 드러나는 탁월함을 기념하고 있다. 그들의 위대함을 숭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념적인 것들을 제거되어야 할 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끝없이 숭상해야 하는 신성함이 되려면 메시아적으로 환원되어야만 한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행위가 덕이라면 덕이다. 인간이 잘 살도록 이끌어 주는 여러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방면들이 인간의 덕성으로 정의된다면 말이다.


 내가 끝없이 주지하고 있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순수한 주체성이다. 항상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 그들에게 존경과 추악함의 양면성을 마주하는 주체는 타자성의 영향력 아래로 미끌어져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가 끝없이 고독을 요청하며 주체에게 요구했던 것은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것을 통해 '차이'를 다시 주체성의 자리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해 주체는 매 순간을 초월해나가야 하는 불가해한 힘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또한 고독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대처하는지가 지성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은 이미 지성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주지되어 온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를 뒤로하고, 본질적으로 환원되어야 하는 건 여전히 인간의 도덕성이다. 탁월함의 자리가 순수함으로 이해되는 건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도덕성이 제대로 된 질서를 구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 구조 내의 탁월함이란 선구자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ps.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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