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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Dec 28. 2019

'순수성'에 대한 고찰 2.

타자성의 열림, 대상으로서의 순수한 주체

 대학원에서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님이 그의 저서가 정신분석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우선적으로 주지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 데카르트의 cogito(의심할 수 없는 확실함의 주체)를 따르고 있으며, 이것이 정신분석과의 동일한 맥락을 구성하는 이유이다. 하이데거가 나치로 판명난 이후 외로운 말년을 보낼 때 스위스 정신분석학회에 초청된 것만 보아도 역사적인 석학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이데거가 '나치'라는 사실은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순수성에 대해 말하려면 '현상학적 주체'를 상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상학에서 의심이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장애물일 뿐이다. 의심을 하지 않으므로 해서, 즉 우리 자신을 더 굳게 믿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최대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행되어야 할 사유는 '현상학적 환원'으로 데카르트가 했던 것처럼 일부러 의심해보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떤 환상적인-그것이 과대평가되고 무모하다고 할지언정-것을 신봉하게 된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표현은 정의상 객관적이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환상이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상호주관성 또는 양적합의 이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객관적'이라는 표현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나, 프로이트에서 말미암아 이것이 궁극적 실재이며 이 차원에서 주체가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가 밝혀진다. 그리고 주체는 이 자리를 나 자신이 결코 배반할 수 없는 자리로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해방식 속에 착안해 있다. 이것이 객관적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부분이 있으며, 현상학에서 주지하는 환상의 힘을 끝없이 부추기는 것이 문제적이다. 이 문제란, 본성상으로 이 환상 자체가 인간의 우울을 조장하며 그것이 충동적으로 환원되는 지점은 내가 가진 환상이 좌절되는 지점이다. 물론, 인간의 우울감은 좌절했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우울의 완성이란 내가 지금 당장에 얻은 결과나 미래에 얻을 결과가 딱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일련의 불만족에서 이어지는 절망은 이 환상에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됨으로써 찾아온다.


 환영 속에서 주체는 언제나 소외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환영이 주체의 발전을 규정짓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그만두는 것은 제자리에 멈추어 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퇴행이다. 이런 인간의 특질을 통해 라캉은 현상학적 도식을 이해하되, 인간이 상호주관성을 성립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 두었다. -주체는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현상학에서 구조주의로의 이행, 즉 합리성에 대한 편린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 사유는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의해서 회부된다. 그가 누누이 반복하는 질문으로, '남편은 왜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고 의심하는가?라는 사례를 통해 현재 개별적 주체들과 자본주의라는 이념과이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남편의 의처증에 빗대어 그 관계를 적시하자면 남편의 아내가 진짜 바람이 났는 지 나지 않았는 지의 여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가 바람을 폈는 지 아닌 지에 대한 사실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간에 남편의 의심은 병적이다. 이 병적인 것은 남편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되게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지표이다. 그리고 이것을 개인과 이념인 '대타자'와의 구도에서는 '왜 우리는 자본주의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가?'라고 이해된다. 대다수가 아내 또는 남편, 즉 배우자가 바람이 난다고 의심이 든다면 그 관계를 끝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진실로 들어났을 때, 그럼에도 그 관계를 끝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우둔한 사람이라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집어내야 할 맹점이란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사실을, 심지어 이혼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려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즉 남편의 입장에서는 굳이 불온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드는 이유가 확실히 존재한다. 이혼을 함으로써 발생할 어떤 명증하지 않은 상태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불온함을 유지하는 데에서 더 큰 효용을 찾는 것이다.


 선택은 언제나 선택받지 못한 다른 선택을 배제하는 차원에서 발생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의 개념으로, 우리가 선택함에 따라 선택받지 못한 무언가는 버려지는 것으로 후회를 일이키는 작용인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든 간에 후회할 것이므로, '최선'이라고 할만한 방침은 최대한 덜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이혼하기를 꺼리는 남편은 이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혼을 할 때 발생할 법한 문제들을 배제할 수 있게 된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의도는 분명 이런 관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주이상스-jouissance)', 즉 쾌락원칙의 종용을 넘어선 고통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은 것인 마냥 끝없이 지속하려는 편향이다. 죽음을 불사하려는 의지이지만 가장 극랄한 고통스러움의 양태와 진배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런 극악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까지, 이혼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 이유를 추론해 봄에 있어 사유되는 것은 보편적 감정인 '주체의 상실감'이다. 주체(남편)는 상상의 심급이 가져오는 간접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해서 상상이 실현될 바에는 지금의 고통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사례에서 남편이 부여잡고 있는 것은 '정체성'이다. 즉 이혼을 하게 됨으로써 남편은 더이상 '남편'으로 살 수 없게 된다. 그 우울감의 무게는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던 모든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실현되지 않을 지도 모를 망상적 불안감보다도 가볍다. 그러나 이 불안의 시원은 가짜이며, 삶을 지탱해 오던 유일한 의미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허상이다.


 실제로 상상하는-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이 발생할지는 미지수이다. 무엇이든지 겪어 봐야 아는 것이다. 혹여나 용기를 갖고서 그 상상을 스스로 억제하고 나면 그때서야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탓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속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불행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불명료한 힘이 망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 힘은 보편적이다. 이 보편성 앞에서 삶의 의미란 주체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는 환상이다. 그리고 앞서서 언지한 데로 환상은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가 '죽음', 즉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되는 순간'을 구태여 상기시키는 이유는 심연에 꽈리를 튼 모종의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함이지 않는가?


 라캉은 데카르트의 cogito를 따르는, 즉 현상학적인 도식의 공통된 분모에서 출발하지만, 주체의 현상이 아닌 외부에서 소여되는 현상을 주지한 결과이다. 그가 주지하고 있는 현상은 '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으로 존재함으로 해서 자신의 정신적 고독을 피할 수 있으며, 더 이상 '내가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회의감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여담으로, 나는 이런 사유에 근거해 결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만약 본인이 비혼주의자라면 자기가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비-존재함에서 연원하는 결핍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실제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가족과 자식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사업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살아 있지만 존재하고 있진 않다.


라캉이 열어두려고 한 타자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예시는 사르트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는 명구가 이름보다 더 유명한 것 같은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거부한 행동에서 그가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상이지 않는가! 또 그가 뭐라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 할만한 석학을 칭찬하는가!- 사르트르가 강조해 기술한 감정인 '수치심'은 윤리를 기초적인 작용이다. 이는 타자의 장에서 상상해낸 응시이며, 이에 따라 타자성에서는 '보편적 혐오감'을 발견할 수 있고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구토>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가 반사회적 정서를 축약하며 해체와 분열의 거듭함으로써 급진적인 재구축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철학적 계보를 따른다는 것을 염두하자) 이런 사유를 기반해서 한 가지 더 의문이 든 것은 그가 책을 쓴 행위에서 찾아진다. '그가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러면 왜 출판을 했을까?'라는 궤변적 질문을 해보자. 그러니까, 사르트르가 글을 완성하고 난 이후에 출판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저,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 만족슬러움에 마침표를 찍었으면 어땠을까?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탁월한 기능을 함축하고 있지만, 출판이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 또는 은밀한 목적이 존재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거부하는 행위는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출판은 '주체의 타자로서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서 발견된 스스로 배반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은 어떻게 든 해서 타자와의 융합된 지평을 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캉의 <세미나>에서는 분석가의 태도와 함양해야 할 능력에 대해 가르치면서, 분석가와 피분석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지시키고 있다. 결국 분석가의 현존은 피분석자에게 타자로 현현하고 있는데, 이 둘의 자리를 바꾸면 피분석자 또한 분석가에게 타자로 현현하고 있다. 둘의 구도는 서로에게 배반적일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피분석자가 분석가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해 있는 만큼 분석가 또한 피분석자에게 어떤 의미로 의존하고 있다. 라캉이 이런 사실들을 주지하는 것은 프로이트 그리고 타자성을 통해 아직 자리 잡고 있지 않은 주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욕망의 경로를 따르는 주체는 텅 비어져 있으며 그 어떤 타자, 진정한 의미로서의 타자, 근원적 타자를 표상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대체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순수함'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3편에서


 ps.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해 복수심이 불타오른다면 '무관심'을 권장한다. 주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히 상실감(소중한 것을 잃는 것)을 주는 것이겠지만, 또 다른 불온함이란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어떤 자취도 없는 이방인 같은 삶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다. 탈무드에서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앞의 문장을 축약하면, 그냥 니 할 일이나 더 잘하라고.


 물론, 이런 방침은 살면서 느낀 2가지 사실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1.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혐오할 이유가 딱히 없으며, 만약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정당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2. 부정적 감정들로 인한 감정적 손실은 오히려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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