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예찬론, 우울한 자들의 잠재성에 대해서
<순수 : 전혀 다른 것이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순수함으로의 복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본 사람들이 종종 '자연'에 대해 지금껏 누리고 있는 문화 생활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로 오해하며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인류의 지향점이라도 되는 듯, 이런 주장을 서슴지 않고 뱉는 것을 보았다. 가감없이 비판을 가하자면, 이런 오해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향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사적으로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도시가 아닌 곳에서 자란 사람들의 때 묻지 않은 성격은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오해를 오해가 아니게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내가 본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뒷산을 뛰어다니며 개구리와 뱀을 잡으며 놀았고, 그들의 손은 부모님의 농사의 부족한 일손을 매꾸는 데에 쓰였다. 그런 환경은 그들이 유달리 정이 넘치고 유쾌한 성격을 가졌으며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어 준 초석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순하게 이것을 '순수'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가 말한 '순수성이란, 어떤 시대를 망라하고서라도 찾을 수 없는 그리고 유별나게 간과되고 마는 인간의 선한 마음이었고 이를 일깨우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 일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말은 성격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격을 바꿀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성격을 고쳐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성격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너무나 선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하무인격인 사람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주지하고서라도 어린 시절에 형성된 성격이 커서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는 사실은 명징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격이란 것을 고칠 수 있을까? 성격이나 습관 또는 행동방식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반성적 암시를 준다.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방식은 언제나 언어이며 이 자체는 이미 명령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이 잘 수행될 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다.
프로이트의 저서 <히스테리 연구>에서는 피분석자들의 사례를 통해 이 사실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분석가는 피분석자들의 끊임없이 고통으로 회귀하는 충동을 걷어내기 위해 그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 최면의 방법은 역시나 언어이다. 그들의 기억을 적중시킬만한 언어를 제시함으로써 피분석자들은 언제였을 지도 모를 과거의 어느 순간을 상기하면서 대화의 문을 연다.(책 많이 읽자) 그러면서 그들의 심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순간을 이미지적으로 표상한다. 단순한 예를 들면, 어른이 되어서도 개가 가까이 오는 것을 유난스럽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보아하니 그 사람이 아주 어릴 때 개에게 물렸던 기억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은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의 범주를 재현하는 '개'라는 대상과 마주하면 그 고통이 다시금 회부되는 것이다. 여기서 분석가의 임무는 간단하다. 그들은 그 이미지를 재현된 순간에 '괜찮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넬 뿐이다. 그러자 마법같이 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다.
<원인이 멈추면 결과도 멈춘다.>
이 방식은 의지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우리가 타인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상황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괜찮다'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타인은 이 말 한마디에 의존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덤덤해진다. 이 방식이 적용되는 건 자기 자신에게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에게 이 말 한마디를 건네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즉 우리는 긍정적인 암시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꽤 쾌적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여기에는 오류라 할만한 것이 존재한다. 분석가의 실패 지점은 긍정적인 암시를 주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암시를 건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피분석자의 고통을 유발하는 '어떤 기억'을 제대로 집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간략한 예시에서, 만약 피분석자가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기억을 재현해내지 못하는 경우 긍정적인 암시는 아무런 효과가 없게 되며, 치료는 허사가 되고 만다. 이 실패는 인간의 심리적 기제인 '망각'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성격을 고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는 2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탁월한 기억력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는 아주 오래된 시절의 기억까지 추적해 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 놓는다. 이것은 소설일 뿐인가? 그의 텍스트들이 주체의 시니피앙으로서 무의식의 자리에 들어선 타자와의 관계까지 엄밀히 농축하고 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울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사실이 아닌 허구를 적었다고 해도 말이다. 허나, 안타까운 사실은 대다수라 할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기억력을 갖지 못한다. 이에 따라 가장 최고의 인생이라 한다면 슬프다고 할만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즉 굳이 기억력이 좋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건 '의지'이다. 상대적인 의지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혀진 것이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는 '행동'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의지가 부족하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일상적인 용법에서도 의지와 실천적 영역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그리 의지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세상에 그런 인간들만 넘쳐났다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없었을 것이며 또한 분석가라는 직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을 고치는 두 가지 필수조건에 따라 피분석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피분석자는 필수적인 요소인 '의지력', 즉 암시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겪는 곤궁이 적절하게 표상되었는데 문제는 스스로에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지의 문제를 외적인 문제로 치부하면, 나머지는 결여된 요소가 아니라 너무나 충만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것은 충만한 감응성으로 인한 탁월한 '정념'이다. 이는 기억력이 너무 탁월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피분석자들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남들보다 쓸 데 없이 우울감에 많이 사로잡히고 타인을 돕는 것에 꽤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성격적 특질들에 따라 그들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을 가졌으며 즉,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마이클 서스펜스는 그의 저서 <도덕의 궤적>에서 상상력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교육하는 사회의 사람들이 더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피분석자들을 대상으로 관찰한 결과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피분석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신이 진 부담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 분석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기인한다. 그들은 언제나 분석가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주절주절 함으로써 축적된 정념을 풀어내야만 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의존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들은 의지가 머무는 자리가 아닌 반복적인 충동이 벌어지는 무의식의 자리에서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두 가지 문제-암시의 결여와 감응성의 과도함-중 무엇이 더 원인에 가까운 지를 따지는 건 꽤 어려운 일일 것이다. 두 가지가 복합적인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간편하긴 하되 각각의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울은 심리적 에너지의 축적이다. 이것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 이유는 잠재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철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듯이 인간의 불행은 가능성 자체에서 비롯된다. 어떤 심리적 에너지라고 비유되는 것의 과도한 축적이 인간의 불행이지만 이 자체가 창조의 근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이끄는 것이 정신분석의 임무이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에너지를 뿜어 낼 수 있는 장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불행을 허투루 쓰이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순수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2편에서
ps. 기도와 자기 암시의 효과는 동일하다. 둘 다 안정감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차이는 기도가 종교를 매개로 '신'에게 기대어 있고 암시는 '나'에게 기대어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암시는 나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로 하이데거적 표현으로 '존재'와 '존재자'의 구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차이'를 기준으로 니체와 라캉으로 구분해서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다. 이 둘은 같은 문제를 보고 다른 해결책을 강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