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검열 8 : 가치의 의미
가치 개념의 연역
사전적 정의로 '가치'란 이 세 가지 의미를 충족하는 개념이다
1.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상품 가치
2. 철학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3. 철학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위의 세 정의를 보면 각각의 의미들이 유사해서 딱히 구분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이 세 정의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 보자. 1번 정의는 경제학적으로 시장에서의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충분히 쓸모가 있고 그것의 가치는 소비자들이 돈을 기꺼이 지불할 용이가 있음으로 해서 발생한다. 그것이 아무런 쓸모, 즉 가치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에서 퇴출되는데 이는 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종용된다. 2번의 정의는 심리학적 개념이며 실존적 의미들을 지칭한다. 예컨대, 연인들 간의 사랑이나 친구 사이의 돈독한 우정, 가족들 간의 정서적 유대, 아니면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나 사진 같은 것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미적인(?) 가치이며, 내적이고 정서적인 부분들을 담당한다. 마지막 3번의 정의는 철학에서의 가장 거대한 테제이면서 항상 의문이 따라다니는 이념적 측면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 욕망, 목적, 의욕, 관심, 동기 등등. '삶'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전반적인 지향성을 충족하는 의미들이다. 그리고 곧 행동을 이끄는 심적이면서 본래적인 동인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3번의 정의에서처럼 '진, 선, 미, '에는 상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면서 절대적인 가치들이다. 각각의 정의는 2번이 1번을 포함하고 3번이 1번과 2번을 포함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라 '가치'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것부터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까지의 광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이 '가치'라는 것을 따른다. 각자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겠지만 나름대로 추구하고 옳다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가치들을 지니고 있다. 경험적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가치에도 위계가 있으며, 즉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도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조금 미루어 두고서, 우선적으로 시장에서의 가치를 생산하는 일에 주목해 보자. 자유시장에서는 가치 있게 여겨질 만한 재화나 서비스가 널려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어느 누구나 소비자로 행위한다. 생산자는 그런 것들을 공급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들도 시장에서 소비자가 된다. 숨을 쉬기 위해서 반드시 입에 먹을거리가 들어가야만 하는 그런 존재인 만큼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경제 구조 내에서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 반면, 어느 누구나 생산자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학교에 다니지만 아무런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학생은 소비자이긴 하지만 생산자는 아니다. 일종의 유한계급이나 예비 경제인 정도로 이해된다. 즉 경제 활동을 통해 금전적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 생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집단 내에서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속한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데 일조하긴 했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이익을 챙겨가느냐에 따라 책임의 정도가 달라진다. 여담으로 한 때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요즘은 자취를 감춘 듯하다. 자신이 처리한 업무가 그 일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수록 책임감 또한 미미해지는데, 일종의 심리적 거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월급을 받는 주인은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품이나 서비스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필요에 의해서든 욕망에 의해서든 소비자들에게 심리적 만족을 제공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가치'를 매개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나'와 '너'라는 구도에 대입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는 나에게 어떤 효용을 충족시킬만한 무언가를 제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돈을 쓴다.' 여기서 경제학에서 처음에 배우는 '시장 균형'이 발생하는데 이 현상은 욕망들의 등가 교환이며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있다는 의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할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즉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여야만이 적절한 보상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은 '사회적 존재'가 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것의 의미는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반대급부에 속해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성향은 '게으름'이다. 나태하고 아무런 목표나 의지가 없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이 찍힌다. 주변 사람들과 자신에게조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미 성서에서 나태가 7가지 죄악 중 하나였으며, 니체의 <선악의 저편> 207절 일부에서도 이를 말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부드럽게 부풀린 채로 움직이는 섬세한 항아리 주형과 같은 존재로서, ‘일정한 형태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이나 내실이 주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다. 보통 그는 내용과 내실이 없는 인간이며, ‘몰아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여성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의지가 없는 남자는 여성에게 어떤 매력도 주질 못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가치'의 의미에 대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정의를 한다면 1번 정의는 2번 정의로 이전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로,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시장에 위치한 이상 어떤 식으로 해서든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것들이 싫어 산속에 틀어 박히고 싶은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이를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조차도 기초적인 생활 용품들을 시장에서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제작한다면 그 수고로움은 얼마나 큰 귀찮음을 유발하는가! 그래서 이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시장에서는 '교환'이 이루어진다. 교환은 오래전부터 이행되었기에 원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유지되어 온 체계이다. 그리고 그 편리함을 더 극대화시킨 '화폐'라는 수단이 등장하면서 더 수월하게 자신의 편의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구도는 봉사를 하지 않는 이상 호혜적일 수밖에 없다. 교환 방식에서 내가 괜찮은 물건을 갖고 있는데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베풀지 않는 이상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 존재는 자신의 수고로움에 대해 어떤 보상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호혜성에 대해 말할 때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네 등을 굵어주겠다.'는 가장 널리 쓰이는 문구가 있다. 이를 반대로 뒤집으면 네 등을 긁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내 등을 긁어주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연대는 심적인 유대를 형성하는 큰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바스티아의 원리'에 따르면, 상품이 국경을 넘지 못하는 곳에서는 군대가 국경을 넘지만, 상품이 국경을 넘는 곳에서는 군대가 국경을 넘지 않는다. 무역은 전쟁과 국가 간 폭력을 막지 못하지만 그러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인다. 등가적이지 못한, 즉 호혜성을 충족시키지 않는 관계는 오래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제적이지 않더라도 심적인 연대는 더 사려 깊고 오랫동안 그 깊이를 유지할 수 있다. 2번이 1번의 정의를 충족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라는 것이 호혜적이지 않더라도 그 맥을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인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연대가 있으며, 이것이 사회와 집단을 구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쉽게 말하면 서로 간의 친밀감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굳이 사람 대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오래된 소장품이나 장소, 관심 있는 사물에서도 우리는 애착을 느낀다. 이 논의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선악에 대한 담론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더 옳은 지 그리고 그른 지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나와 맞는 부분이 많다면 애착이 더 지속적일 수 있으며 그런 것들을 옳고 선하다고 이해한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옳지 않다며 반목하는 시선을 던진다. 가령 나와 가까운 사람이 잘못된 일을 했다 해도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타박, 질책 또는 응당한 처벌이 가해지기보다는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기를 바란다. 응보적 처벌이 아닌 회복적 처벌로 이것도 처벌의 일종이긴 하지만 아주 미약한 정도의 방식이다. 이런 관대한 태도는 친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든지 이러한 관계를 정초 짓고 있다. 반대로 나에게 친밀하지 않은 것들은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그런 대상들을 이상하거나 또는 신비롭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악'한 것들이라 쉽게 치부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 방식은 내가 이해할 수 없거나 또는 못하는 것들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일 경우 우리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과 갈등이 발생할 경우 우리는 '법'이라는 방대하게 적용되는 대원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가장 효과적으로는 갈등의 대상과 대화라는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각자가 우선적이고 우상화된 방식을 따르면서 서로의 욕망이 대립할 때에는 서로에게 증오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 증오를 해결하려면 합당하고 정당한 기준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낯설지 않은 것들은 곧 친밀하고 익숙한 것들로 이해된다. 고로 이해 가능한 부분에서 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악이 발생하는 원인은 '낯섦'이고 그 자체로 우연성이다. 그러니 낯섦을 최소화하는 것은 외재성을 수용하는 의지로서 어느 정도 해소되지만 보편적이고 최선이라고 이해되는 방식은 합리적인 형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왜냐면 전자의 방식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번과 2번이 비해 3번의 정의는 더 애매하게 번진다. 앞서 제시된 3번의 정의를 보면 '진, 선, 미'라는 개념을 보면 더 그렇다. 그런 것들은 확증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것들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동일한 관념을 지니지는 않는다. 가령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기준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 여기서는 취향의 차이가 각각의 기준들을 결정한다. 또한 이 개념들은 시대에 따라 항상 그 표본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바뀌어 왔다. 지금의 유행이 끝이 나고 지나간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가치들이 지칭하는 대상들이 항상 바뀌어 온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가치'란 것에 항상 몰두한 이유는 인간이란 무언가에 대해 항상 추종하고 규정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규정된 것이 필요하고 평가와 판단들, 그리고 믿을 만한 것이 항상 필요하다. 아마 본성적 사실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목적에 비롯하여 애매모호한 물음들 때문에 나타났다. 그 물음은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마땅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니체는 이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규정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인격으로 보았다. 우리가 마땅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정한 것, 즉 생각한 것이 답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결정론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태어나자마자 어느 정도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절대로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처음 눈을 떠서 마주한 환경은 자유의지와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정신은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이데 거적으로는 '세계-내-존재'로서 삶은 내 앞에 주어진 환경과 현상들에 맞춰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자유의지와 연관이 없는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할만한 근거를 자유의지가 아닌 것들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말을 진실되도록 하려면 주도적으로 많은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 나 자신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들이 기초해 있으며 이럴 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콩트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말이 '사회'와 '관계'를 요약하고 있다. 사회에 속해 있는 개인은 항상 상대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떤 현명한 사람은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 앞에서 우둔한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성 안에서 자아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거대한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타인과의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실상에서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서 그리고 외부적인 인식들에 의해 우리의 가치가 정해진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대학을 나왔거나 어떤 직함을 들고 있던가, 아니면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 자라온 것 등등.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막대하고도 불가피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를 맹목적으로 부정할 순 없다. 이미 정해진 질서는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다음이 항상 중요하다. 철학적 시선이란, 언제나 더 나은 것으로 향하는 응시점이며, 그다음을 규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진보'라는 표현을 정치적 의도로 곡해시키진 말자.) 사회적 인식들이나 평판에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들은 나의 가치에 대해서 잘못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밀하게는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고 평가한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인간의 이런 태도는 결코 허영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부심인데 대개의 경우 '겸손'이나 '겸양'이라고 불린다. 독존으로서 개인에게 언제나 키에르케고르의 경구가 적용된다. '네가 믿는 대로 너는 존재한다.' 이런 심적 작용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유물론적 사조만큼 애매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게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1번의 가치에서 2번으로 그리고 3번으로 넘어오는 가치는 전체에서 부분 그리고 부분에서 단독자로 넘어오는 연역의 과정이다. 단독자에게 있어서 다시 자문한다면 가치를 창출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대체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만큼 어느 정도는 취향 차이란 것이 존재한다. 대게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범주를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타인이 좋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의 삶이 등장한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사랑에 너무 익숙해져서 삶을 당연하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나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대한다.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이 좋다는 명구들은 자본주의적 성공에 빗대어 표현될 때가 많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목표로 삼아 언젠간 다가올 것들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헛되이 버렸다는 생각은 언제나 괴로울 뿐이다. 하지만 굳이 이것에 빗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타인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것에서 갈증을 느낀다면 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문제가 시작되는 부분은 타인을 문제 삼을 때부터이다. 타인이 나에게 시간을 써야 할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나의 시간이 소중한만큼 다른 사람들의 시간도 소중하다. 나 또한 내가 관심 없는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음에도 타인에게 관심을 달라는 것은 어린이들의 어리광에 불과하다. 어린아이들은 '귀여움'이나 '사랑스러움'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무수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속성들을 점점 잃으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물론 그런 것들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실천과 책임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행동의 가치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엄연히 받아들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