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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Oct 17. 2019

자기 검열 7 : 니체의 고독

폭력에 대한 논의, 그리고 선과 악의 일치점

 반 고흐의 삶을 조금 엿보기로 하자. 반 고흐의 우울을 가장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일화는 그의 작품이기도 한 '노란 집'에서 벌어졌던 사건일 것이다. 그곳은 그의 염원이 담긴 장소이다.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열정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 반 고흐는 그 집이 예술가들의 성지가 되기를 바랐다. 아마 이런 발상은 자신이 어떤 특정 분야에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즈음 떠올릴 만한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목적은 명목적인 이유일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흐의 염원의 이면에는 자신의 고독을 덜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전반적인 삶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반 고흐는 거진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게 만들었던 빈곤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또한 주변 사람들과 동생조차도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끊임없이 만류했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을 깎아내리는 계기들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유일한 의미인 그림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억눌려 있던 그의 울분이 폭발했고 그 힘은 폴 고갱에게 예술용 칼을 집어 들이밀도록 이끌었다. 그 광기를 필연적으로 표출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흐가 정신이 들었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까. 섣부른 그 행동 때문에 고갱과의 관계를 망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체할 수 없는 역동을 자신의 귓불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인을 파멸로 이끈다.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묻지 마 범죄'를 나는 반 고흐와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독일의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고독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책의 문구는 반 고흐의 정신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은 그런 삶은 어떤 의미와 방향도 갖지 않으면, 자신이 한낱 티끌처럼 느껴질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어떤 체제와 자신을 결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결국 그의 행동 능력, 즉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이를 토대로,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 불변의 불가항력적 요소가 있는데,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과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다.


 살아생전에 반 고흐의 그림이 조금이라도 인기가 있었다면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진 않았을 것이다. 고흐의 일화에서 보이듯이, 외로운 존재들은 어느새 광인으로 돌변한다. 나는 외로운 존재들을 대내외적으로 -타인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사회적인 무가치함을 입증한 존재들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동물로 진화해 왔다'라는 아주 간편한 주장을 충족시킨다. 어찌 됐든 이에 따라서 사회적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어느 누구나 어느 정도의 명예를 바라고, 적당히 일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욕구들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혼자 있는 시간의 중압감을 감당해야만 한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이 꽤 번거롭고 항상 갈등의 요소가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며 그것을 감수하는 합당한 이유는 '고독'을 즐기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가끔 극소수의 운이 좋은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고독을 즐겨라!'라는 문구를 탁월하게 실천하는 사람들 말이다. 대게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누군가가 자신의 고유한 시간에 훼방을 놓는 것을 불편해하고 행동이 간섭받는 것을 불허한다. 굳이 타인과 함께 있지 않아도 혼자서 즐거울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성취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행운이 따라야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해버리는 몰입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도취적인 흥분 상태가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취적 감정 상태는 자유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자유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늘어놓자면 쉽게 말해, 내가 생각한 데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간단한 정의에 비추었을 때, 단독자인 한 개인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때의 자유는 언제나 방해받기 일수이다. 이 곳에서의 자유란 타인과의 교접을 찾지 못했을 때 방해받는다. 우리가 나와 비슷한 성격이나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이유도 나의 자유를 좀 더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나와 항상 비슷한 사람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반면 나와 반대 성향인 사람을 만나는 건 꽤 어려운 일로 이해된다. 극단적으로는 그 사람을 마음 깊숙이 혐오하면서 '악인'이라고 모멸스럽게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 사람은 나와 맞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아니면 위법을 저질렀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물론, 이 둘의 공통점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도 개체적 유사성을 따르는 것이다. 이 유사성과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유사성 또한 '완벽'이라는 형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과 완전히 동일한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은 완벽한 타인이다.


 이로써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의 심적 측면에서는 언제나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과 언제나 외롭기 때문에 의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한다. 이 둘은 양립-불가능한 시도로 이해되며, 그래서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가장 최선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뭉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랫동안 인류가 '집단'을 구성해 온 보편적 체계이다. 가령, 어떤 스포츠 구단을 좋아한다던가, 아이돌 팬 클럽에 가입하거나, 다니고 있는 직장이나, 지역 연고를 갖고 있거나, 국가라는 가장 포괄적 공동체,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인 집단인 '가족' 등 모든 것들이 유사성 개념에 종속된다. 문제는 개인 간의 도덕률과 마찬가지로 집단 간의 도덕률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을 유발한다. 물론, 인류의 수많은 페이지들이 피로 점철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지금은 최대한 말로써 쟁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시민'이라는 가장 이상적이고 광범위한 규정을 만인에게 적용시키는 것에 비한다면 여전히 어려운 사안이다. 이런 이상향보다 인류가 지향하고 충실히 수행해 온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며, 이에 따라 지적 헤게모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의 '서세동점', 즉 서구의 문명이 동양을 잠식해 나간다며 우열을 점한다는 발상은 현재에 이르러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과거의 전유물에 다름 아니지만 이것은 투쟁의 물결 위에 모든 생명들이 위치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도 거대한 물결 위의 한 생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저항 없이 수용한 결과와 진배없다.


 좌우지간 다시 고흐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가 폴 고갱에게 칼을 들이민 것도 불가능한 두 요소를 병치시키려는 시도에 의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고갱과 서로 다른 예술적 입장 때문에 차이가 발생했고, 이 대치 양상은 중점을 찾지 못했다. 여기서 가장 간편하면서 합리적인 방법은 서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예컨대, 친구끼리 같이 여행을 갔다가도 의견 차이가 발생하면 각자가 서로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꽤 현명한 처사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고흐에게 더 이상 고독은 용납될 수 없었다. 떠나가는 고갱의 발걸음은 고흐에게 버림받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힘의 일종인 '가학성'을 선택했다. 인간의 가학적 성향이란 타자를 자신의 이해 방식 속에 묶어두는 수단이며, 미시적으로는 연인들 간의 데이트 폭력부터, 가정 폭력, 학교에서의 동급생들 간의 은밀한 서열 다툼을 포함해, 거시적으로는 역사 속의 모든 폭력적 수단과 독재자들의 군림, 그리고 20세기를 뒤흔들었던 전체주의적 표상의 등장도 이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열등감에 기인해 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경험적 근거들은 분노로 이어진다. (만약에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훌륭한 건축가와 극작가로 성공적으로 사회에 진출했다면 세계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럴듯한 말이 있다.)


 앞선 모든 말들이 자연에서 비일비재한 '적자생존'의 법칙과 비교한다면 가학적인 성향은 굳이 배척할 필요가 없게 된다. 지금도 이에 따라 세렝게티 어디선가 영리한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눈을 피하려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가학성이란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인간은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들을 일시적으로 피할 순 있겠지만 여전히 내면을 잠식하는 잔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본질적으로는 자기혐오와 자기 우월감들은 모두 허영심에 불과하다. 홉스의 말에서 그 의미가 더 뚜렷해진다. 타인의 결점을 자신의 승리감으로 승화시키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자신이 어떤 가치도 창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못 박아두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니체가 우선적으로 파악한 것들이란 자연적 법칙들이다. 칸트 이후 인간 사회란 목적들의 왕국이 되어 있다. 즉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자연법'이 추앙되어 왔다. 하지만 반대로 니체는 인간의 존엄은 왕국의 보호 아래에서가 아닌 위험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강해진다고 보았다. 앞서 수없이 언급한, 신에 대한 의존성을 파괴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들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는 자연에서 우수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니체의 글을 읽다 보면 니체의 가학성에 조금 섬뜩해지는 구석도 있다. <차루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글귀를 보면 니체의 의도가 과격하게 번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천 개의 다리와 좁은 판자 다리를 건너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하며 더 많은 전쟁과 불평등을 인간들 사이에 불러일으켜야 한다. 나의 위대한 사랑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하고 있다.

 전쟁과 불평등을 인간 사이에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저 말을 사전적 정의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꽤 괜찮은 정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전쟁과 불평등을 개인의 삶의 투쟁으로서 나 자신과의 결투라고 애써 환원해 보는 것이다. 이런 자의적 해석은 가능하지만 언제나 여러 독자들에게 열려 있고 넘겨져 있다. 그것이 곡해될지 아니면 멋들어진 말로 격상될 진 항상 미지수이다. 니체의 입장에 대해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과격한 것이 아니라 '초인'이 되는 초석으로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초월해 나가는 자아로서, 합당한 처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입장은 니체가 너무나도 고독한 나머지 병리학적인 가학적 증세가 발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글을 썼다는 것이다.


 니체가 추구하는 세계는 일원론적이다.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니체의 방식은 모든 가학성들을 종용하고 지배자가 되어 군림하는 것이 '위대한 자'의 자질이 되어 있다. 이 섬뜩함은 '가학성'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장에서 발견된다. 현시대에 니체는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글 군데군데에서는 타인을 대할 때 동정하고 이해하는 방식보다는 그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라는 정언들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니체가 죽은 1900년 이후,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류의 오명이 된 양차 세계를 본다면 니체의 '망치'는 그 의미가 곡해되었다 봐도 무방하며 둔중한 울림이 꽤 위협적이었다 봐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타인이 나에게 충분히 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면 사회에서 어떤 유희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유희를 위한 모든 에너지가 그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쓰일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충분히 호의를 베풀 수 있고 전혀 나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계의 평화가 따르며, 개인의 윤택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완화 상태에서는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하라는 황금률, 그리고 서로에게 득이 된다면 어떤 원칙을 충분히 따를 용이가 있다는 호혜성을 충족한다. 긴장 상태가 인간에게 해롭다면 그 원인자라 할 수 있는 가학성을 줄이는 건 옳은 일이 된다. 그리고 이 긴장 상태와 긴장의 완화 상태에서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발견된다. 만약 이 긴장 상태가 법에 따른 통치인 '리바이어선'의 공포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라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논의가 도출되며, 반면 완화 상태는 인간이 도덕감각을 갖고 있는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논의가 도출된다. 하지만 이 둘은 인간이 시대의 산물인 만큼 시대적 상황이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 물론,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이 주장되려면 어느 누구나 자신의 삶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전제가 따라야 한다. 이 전제는 대체적으로 충족되는 자명한 말이라고 여겨진다.(이를 부정하는 순간 자가당착에 빠진다.) 대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죽고 싶어 하는 사람조차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삶을 살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황금률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악은 굉장히 모호하다. 선악은 현상일 뿐이며 비유에 불과하다는 말은 '선'이란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고 '악'이란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간단한 정의로 갈무리된다. 이것을 보편적으로 넓혀 가면 '선'은 인간에게 득이 되고 '악'은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니체에게 선악은 구분 지어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붙어 있는 것이 된다. 악의 축을 담당하는 요소들과 선은 따로 놓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의지'에 대한 논의에서 보이는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에 의지 자체를 부정하려는 쇼펜하우어의 입장과 고통이 인간을 발전시킨다는 니체의 입장은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일한 것을 다르게 보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정의(justice)가 무엇인지를 묻는 담론들에서도 정의에 대한 착상은 모호해질 때가 많다. 이것이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선악이란 것이 나뉠 수 없는 불가분적인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이분법적 구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확실시되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가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충족하는 것은 '선'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악이 되면서 또다시 선악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런 순환논리에 처해 있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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