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란 무엇인가? 변화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 따위가 바뀌어 달리 짐.'이다. 이 정의는 항상 충족된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무엇인가가 항상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거창하지도 않은 꽤 익숙한 방식이다. 가령, 에너지에 의해 사물의 자리가 바뀌거나, 낡은 것들이 녹슬어 부식되는 현상, 아니면 지구가 자전을 하고 항상 태양을 공전하면서 사계절이 순환하거나, 그리고 우리가 죽어가고 또 죽고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환들, 이런 일들은 수십 억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변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사태들을 인지하며 '시간이 흐른다'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정녕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는 것인가? 이 표현은 통상적으로 널리 쓰이며 '변화=시간'이라는 공식을 완성시키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없다. 변화는 정신적 환상을 담당하는 축일뿐, 언제나 '현재'만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렇담 '현재'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서 과거와 미래라는 환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현재에 한 일들은 과거로 끊임없이 편입되고 앞으로 할 일들이 곧 미래가 된다. 그래서 또다시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모범 답안이 어렵지 않게 연역된다. 이 말을 질리도록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질릴 만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 '현재를 잘 살아라!'라는 문구가 끊임없이 등장할까? 수 천년 전에 저명한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들과 고안해 낸 답이 지금까지 거슬러 왔지만, 이 말이 계속 부각되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실천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마 1,000년 후에 누군가가 또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저 한 마디로 지켜지지 않는, 그 배후에 수많은 논리적 연역들이 뒤따라야만 한다.
'과거'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기억'이란 것을 엿보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살면서 꽤 불편한 상황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건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게 되는 사소한 불편함은 고사하고, 학업에서 성과를 이루는 데 암기력이 얼마나 편리한 도구인 지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억이 좋지 못한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령 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병에 걸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몸만 어른인 채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 버리는 듯하다. 이 병은 대체 왜 걸리는 걸까? 망각을 필요로 하는 이 병은 어떤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길래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라는 망상적인 의문이 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또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마치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처럼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기억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답변을 충족해주는 수많은 근거들이다.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었거나 어떤 상황에 직면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사태 내용들이 '자아'를 구성한다. 또한 기억은 미래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앞으로 행할 미래의 선택들은 과거의 총체성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했었던 선택이 좋았다면 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한다. 동일한 선택의 반복은 선순환을 만들어 내며, 과거의 안정성에 단초해 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데도 안정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는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당황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에 의존하여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택의 기로 앞에서 방황을 면치 못한다. 즉 무엇을 선택해야 더 좋은 지를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럴 때 사람들은 선택을 잠시 유보하고 나름의 답을 얻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과 충고를 구하면서 조금이라도 현명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내 선택을 확실시할 수 없다.(무엇이 확실하다는 소신만큼 순진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선택은 나의 몫이며 책임도 피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선택을 해야만 한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삶에서 이 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된다. 인생을 두 번 산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무엇이든지 언제나 새롭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 앞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혼합된 감정 양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존재'라고 인간을 규정하지 않았는가. 지금 이 문단을 하나의 개념으로 축약하면 '염려', 즉 걱정과 고민이 된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염려'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염려가 '미래'라는 환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매개이며, 이는 자아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해괴한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걱정하는가? 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당혹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과거의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염려는 항시 미래의 전유물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과도하게 축적되었을 때, 즉 너무 많은 걱정과 고민거리를 하게 되면 신체는 쉽게 피로함을 느끼고 정신적인 무기력을 경험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부담이며, 심리학적으로는 '스트레스'라고 널리 통용된다.
생각보다도 우리는 생각을 쓸 데 없는 생각들에 할애하는데, 이를 보아하니 인간은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존재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생각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쉽게 공포에 질리는 존재들이라는 답안이 가장 마땅해 보인다. 실제로 때때로 우리는 발생하지도 않을 재난과 재앙에 대해 걱정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허상에 움츠러들기 일수이다. 물론, 이런 성향들이 예측 가능한 위험들을 통제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고, 이를 '이성'이라 칭하고 있더라. 이것을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 필연들의 위상을 적립하며 지금의 세계를 도래케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다. 아직 이성의 빛이 도달하지 않은 곳들은 어두운 장막들로 덮여 있으며, 곧 어리석음의 표상이 된다. 요컨대, 두려움과 공포, 불안을 느끼는 심리적 성향은 인간의 무지가 그 원인이 된다. 무지의 원인은 수많은 우연한 일들이 빈번하지 않더라도 공교롭게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우연 때문에 인간은 쓸 데 없이 피로감과 무기력을 축적한다. 이것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암시법은 '니부어의 기도'가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
'신이시여, 바꿀 수 있는 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의 담대함을,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나의 의지에 벗어난 것들은 '어쩔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리고 의지가 닿지 않는 모든 것들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우연은 그 자체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우연'이 우연하지 않다면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인간은 우연에서 필연을 발견하기 위해 '이성'에 의존하고 인과적인 '상상'을 발휘한다. 그 힘들은 어떤 사태의 다음(next), 그리고 그 다음의 다음을 위해 끊임없이 미래를 예견한다. 하이데거적으로는 우리는 '미래로 앞 달려 가보는 존재'이며, 단순히 오늘이 아니라 내일과 그리고 먼 미래까지도 상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상상한다고 해서 미래를 확실시할 순 없다. '상상'이라는 것이 애매하긴 하지만 상상하는 힘이 애매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애매하게 주어진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가 애매하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앞에서 던졌던 해괴한 질문을 다시 돌아보자. 과거는 염려의 대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확증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상상적 의지가 과거에 개입하는 순간은 염려와 관련이 깊다. 즉 미래에 대한 지나친 염려, 즉 스트레스에서 연역되는 것이 과거로의 상상이고, 이것을 '반성', '성찰'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감정이 '후회'나 '아쉬움'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미래에서 과거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성찰은 자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굳이 자의적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방향 전환은 꽤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고는 앞으로의 행동들의 지침을 마련하고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건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합당한 처사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거를 돌아보는 행동은 불필요한 처우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장애 요소에 부딪히게 되면 '시간의 퇴행'이 발생한 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아가다니!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시간은 비가역적이며 직진하는 성질인 까닭에, 거꾸로 흐른다는 것은 시간을 본질을 파기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며 낭비이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모두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가. 과거의 시간대들은 후회라는 것을 담고 있다. 그 후회들의 원인이란 가능성의 좌절, 의지의 거세, 흔히 부르는 말로 '아쉬움' 때문에 과거의 시간대를 되찾으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불가능한 시도이다.
이런 장애에 부딪힌 상황을 흔히 '실패'라고 부른다. 실패의 연속은 나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것이 모든 회의감들의 원인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각해지면 나 자신에게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게 되면서 '자기혐오'가 생긴다. 이는 꽤 모순적인 증상이다. 인간의 정신이 혐오스러워하는 것들을 배척하는, 즉 자신의 이해 방식에 그르치는 것들을 밀어내기 마련인데, '자기 혐오'라는 표현은 굉장히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싫어한다니! 이 증세는 결핍과 무기력의 합치이다. 이것은 미래는 과거의 총체성이 의존해 있다는 말에 비롯했을 때, 과거의 빈약함이 미래의 빈약함으로 번졌을 뿐이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는 자의적 불가능으로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었을 때 일어난다.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암시를 주는 것도 '의지'이다. 스스로에게 배반적인 의지도 '의지'가 된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사람은 어쩌면 강력한 의지를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기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얼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가? 혐오하기를 반복하는 열정의 심원은 무엇인가?
현재를 충실히 살기 전에 반대로 '현재를 잘 살지 못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파악하자. 이는 '개인'이라는 가장 소박한 단위의 존재가 '세계'라는 불명료한 것과 대치해 있을 때 일어난다. 이는 양극의 이원적 분할이며 대립을 현현한다. 하지만 이 분할 자체는 자신의 불만에 기인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언제나 정신적 긴장 상태인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오직 이 긴장만이 이 둘의 간극을 무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면 너무 비약한 말일까? 이제 니체의 시간으로 돌아오자. 원래 니체의 말을 위해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니체에게서 '시간의 흐름'을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가 찾아진다. 니체가 추구하는 세계는 일원론적이다. 즉 '나'와 '세계'를 분할하는 경계선을 없앤다. <선악의 저편> 서론에서는 이미 자신의 사유를 포괄한 가장 범적이라 할 수 있는 입장을 밝힌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세계를 영원불변의 초감상적인 실재 세계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감성적인 현상 세계로 구별하거나 초감성적인 근원적인 일자와 감성적인 다양한 개체들로 나눈다. 인간학적 이원론은 인간의 영혼을 순수정신과 저열한 본능적인 욕망으로 나눈다. 윤리학적 이원론은 선과 악을 서로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모든 거창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을 영원한 요구와 함께 새겨 넣기 위해 우선 거대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흉측한 얼굴을 하고 지상에서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이 문구들은 이원론을 비꼬는 것이다. 칸트 이래로 인간의 정신 너머에 '물자체'가 있다는 규정,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해서 절대로 알 수가 없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정신의 한계를 제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예컨대, '사과'의 색이 실제로 붉은색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망막의 감각 수용체에서 붉은색으로 인식할 뿐이라 한다. 칸트에게는 그것이 진실되도록 붉은 지는 알 수가 없는 영역이다. 반면, 니체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진위 판별보다는 그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선택하면 그만인 것을! 물론, 니체의 입장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라는 앵무새 화법과 마찬가지로, 이미 수 천년 전에 누군가가 했던 말을 되살린 것이라고 할까.
20세기 현상학적 사조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를 거두며 종국적으로는 비-반성적 자아를 완성시키는 것에 방점을 찍어두었다.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는 '전체-가능 존재'로서 인간을 규정했다. <존재와 시간> 2부부터는 '죽음'까지 달려가 보며 한 개체의 현재적 삶과 종말 사이의 의지를 규정짓기를 바랐다. 인간의 결심의 극대화란 죽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실존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이며 일련의 가능한 약속들이 현존재(Da-sein)를 규정한다. 그리고 니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또한 이성과 감성이 대응되며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는, 여전히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는 셸러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앞서 시간은 하나의 환상이라고 언급했지만, 그 환상은 이미 현재에 반영된 결과로 주어진다. 양쪽으로 시선을 돌려 과거를 엿보거나 미래를 둘러봄은 이미 현재의 행동 방식을 규정짓는 기호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분할은 그리 의미가 없게 된다. 과거는 현재의 행동이며 미래 또한 현재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번외적으로 니체가 '시간'에 대해 생각한 것들을 조금 적어 보자. 철학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말 중 하나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의 지침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깨우치라는 가르침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탓이라 함은 '무지'이다. 내가 무식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면 누구 탓인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무식하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면 얼마나 화가 나는가. 모든 것들이 '내 탓'이라는 가장 정당한 변명은 견지하기 가장 어려운 태도로 둔갑해 있는 듯하다. 실제로도 책임을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서도... 그리고 정신분석적으로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경멸적인 시선과 조소를 던지면서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 말고는 다름 아니다. 니체도 이런 태도를 비꼰다. 언제까지 탓만 하는 자들이 이 지상에 존재한다. 모든 구석구석에 자신들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지를 거의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헛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알지 못하면서 기다리는 자들 말이다. 그들이 제일 잘 내뱉는 말이란 '너무 늦었다'이다. 모든 문제는 시간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입에서 언제 또다시 '너무 늦었다'라는 말을 할 텐가? 시간이 있다는 건 여유롭다는 것이기도 한데 또 이 여유들을 제쳐두고 '너무 늦어 버렸다!'라는 탄식을 뱉을 텐가? 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나는 나를 조금만이라도 더 믿었다면 좋았을 것을!
ps. 페이커는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게임에서 지면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연신 뱉더라. 나는 가식적으로라도 저 말을 해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