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약속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미 사회성이다. 즉 사회 구성원들 간의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꽤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건 사회성의 결여 정도와 비례적인 관계를 갖는다. 가장 좋은 예시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이다. 그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존재는 얼마나 말을 잘하지 못하며 또 얼마나 사회적이지 못하는가. 어린아이들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답답함을 말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성'의 최대화를 추구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엄밀하게 말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소통의 벽을 해소하는데 충분치 않다. 우리는 항상 언어로 오해를 풀기도 하지만 이 언어란 것으로 서로를 얼마나 헐뜯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런 사태들 속에서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 해도 단적인 수단으로 머문다. 그래서 상호 간 이해의 가장 좋은 방법은 유사한 종류의 내적 체험을 동일한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체험을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동일한 경험'은 불가능한 시도로 이해된다. 일단 동일한 체험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가능이다. 세상에 같은 둘은 없으며, 쌍둥이조차도 성격의 미세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 '차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설명하는 기준은 생물학적인 유전 정보와 그에 따른 생리적 체계로 결정된다. 가령,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라는 말을 연신 뱉지만 혀의 미뢰에 분포되어 있는 뉴런의 개수가 다르다면 '맛있다'라는 표현이 양자 간에 공통분모를 형성한다고 해도 동일한 맛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동일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동일한'이라는 말 때문에 불가능으로 귀착한다. 그러니 타인의 느낌을 이해하다는 것은 유사성으로만 파악되며, 완벽한 유사성이라는 모순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이 유사성이란 것에 매달려 우리들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니 이런 불가능한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것은 공감 능력으로, 즉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실천하는, 관념적 전환이다. 타인의 상황을 나에게 대입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매우 도덕적이거나 공감 능력이 탁월한 성격의 소유자들은 그와 비례하여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력은 타자를 포용하는 힘의 원인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상하다'라는 용어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떠올리진 않는다. 또한 이것이 무엇인지 묻는다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회의에 사로잡히고 수많은 의문들의 중압감에 파묻히게 된다. 이것에 대해 가장 면밀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이다. 꿈은 극도로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나름 연결성이 있는 것 같은 이미지들을 난잡하게 뒤섞어 놓았다. 그래서 꿈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꿈을 많이 꾼다는 건 그만큼 감정적이라는 뜻이지만 그 감정들은 각성 상태에서 온갖 부정성들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그런 것들을 배출하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고전적 견해이다. 즉 이것 마저도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논의가 불충분한 이유라 한다면 개인적으로 꿈을 꾸는 것이 정말 카타르시스인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꿈을 자주 꾸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인 것들에 휩싸인다는 뜻이니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만한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상상력이 도덕성이라는 것과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면, '상상력'에 대해 대립되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면 긍정과 부정, 양면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의 얼굴이다. 하지만 애매한 프로이트는 제쳐두고, 가장 최신의 지식들에는 상상력과 도덕적 자질의 연관성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에서는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국민들이 추상적으로 추론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나라가 더 부유하고 도덕적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상상력을 요구하는 추론은 도덕적 감각을 상승시키며, 그에 반해 구체적인 사실을 학습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떨어진다. 주입식 교육은 문제가 많다.
상상력과 도덕 감각은 서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런데 니체가 제시한 인간상을 보면 앞의 주장과 괴리감이 있다고 느껴진다. 니체가 인간 존재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유희적 존재를 모색한 반면에 윤리적 질서를 터부시 한 것은 역설로 느껴진다.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시도와 도덕 감각은 어쩌면 대치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니체 또한 시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니체의 과격한 표현은 그가 당대의 도덕에 대한 혐오감을 분출한 것이다. 망치를 들고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표현으로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비유되는 니체는 망치를 들고 부수면서 또한 망치로 새로운 집을 지었다. '도덕'의 정의가 '옳은 것에 대해 일련의 규정을 마련하는 일'이라면, 니체도 인간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률을 규정한 것이다. 우선 니체가 부순 것을 살펴보자.
그는 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무섭게 분노하면서 가혹하면서도 광적으로 사람들에게 오직 사랑과 사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던 가련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그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처넣을 지옥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알게 되면서 사랑 그 자체이고 완전한 사랑의 능력을 갖는 신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러한 신은 인간의 사랑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너무나 우매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가엾게 여기는 신이다. 그렇게 느끼고 그와 같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자라면 죽음을 희구하게 된다.
<선악의 저편> 269절에서의 이 문구는 '예수'에 대한 니체의 견해이다. 나는 '예수'에 관한 신화적인 서사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편이지만 그의 실존에 대해서는, 즉 예수의 당위적 가치를 내포한 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의 예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수의 가르침으로 '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한 이견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경험적 차원에서 제시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니,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혐오를 혐오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한 명의 철학자로서 예수는 두려움이 인간을 통제하기는데 있어 얼마나 간편한 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관념을 만들었다. 인간의 선한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의도가 선하더라고 하나의 강요가 되어버린다.
인류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존재인 '예수'라는 한 인물은 한 명의 철학자로서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자이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예수의 이상향은 좋은 의도라 해도 자기 자신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다. 마치 타인을 완벽히 통제하겠다는 모든 독재자들의 무모한 염원처럼 말이다. 절대다수는 아니라도 종교적 영향력을 보면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을까? 이런 진위 판별을 제쳐두고서라도 예수의 존재가 탁월한 이유는 그의 말들이 현재의 모든 윤리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상'이다. 즉 최초의 도덕으로서 이것을 시원으로 현재의 윤리적 담론들이 개진되었으며, 만약 예수의 말이 달랐더라면 지금의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진척도 없었을 것이다. 니체의 사고도 전체 도야의 과정 중 일부였을 뿐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의 종교는 예수의 말이 오도된 것에서 비롯되었고, 니체가 통탄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리석음이었다. 니체가 거부한 '의존성'은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또한 고독에 대한 예찬론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모든 것들은 나 혼자만의 소유이다. 나의 의지도 정념도 그리고 경험들도 아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일말의 생각조차도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원래 혼자인 운명이기 때문에 혼자여야만 한다는 니체의 숙명, 언제나 개인으로 남겨져 있고 앞으로 그럴 인간 존재에 대한 지침, '인생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지'라는 우스갯 소리는 원자화된 개인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는 표현이다.
기록이 시작된 이후로 윤리적 기준은 항상 추합 되고 변형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윤리'는 어떤 기준이며 그것이 항상 있어왔다는 사실이 있다. 이 기준이란 것이 항상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것의 순기능 때문이다. 그 기능이란 개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히 자유로울 순 없다. 이것을 좀 더 면밀히 풀어내면 자유롭기를 열망하지만 항상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영역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이 역설은 개인의 의지를 거세시켜 좌절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역설을 부정할 순 없다. 이것이 없다면 개인의 좌절은 홉스가 말하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거친 표현들을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해하라는 지침을 준 것이 아니다. 니체는 인간의 호승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 그리고 진화적으로 종의 역사에서 개체를 보존하고 유지시켜온 힘이다. 여기서도 니체의 의도가 보인다면, 어떤 것이든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수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니체의 지침을 이해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이 감정은 행위의 주체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발생하며, 개인을 지적하는 타인들의 손가락이기도 하다. 개인에게는 자기반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곧 윤리이다.
영화 <베테랑>에서 돈다발이 가득한 명품 가방을 로비받으면서 화가 난 황정민(서도철 역)의 아내인 진경(주연 역)이 던지는 대사가 윤리의 기준을 함축한다. "쪽팔리게 살진 말자!" 물론, 영화의 대사는 범법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말이다. 이는 니체가 금기시한 '윤리'와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없다. 공통적인 부분이라 한다면 개인의 도덕적 행동은 개인의 수치스러운 역사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고의 촉발은 부끄러움으로 이해되고 자신의 행동을 억제시킨다.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은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일로 여겨질지 모르는 것이다. 예컨대, 간혹 길을 가다가 기괴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의 직업이 '예술가'라는 인식이 주어져 있지 않다면 예술적 가치는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다. 여기서 윤리의 정수가 드러난다. 윤리란 '나'와 '너'라는 구도에서 결정된다. 즉 상호 간의 '이해가능성'이 중점으로 부각된다. 이는 너그럽게 구느냐 못 구느냐의 차이이고 앞서 말한 상상적 능력과 관련이 깊다. 반면 이 세상에 혼자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면 윤리를 따질 필요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윤리'란 절대적 기준이 없다. 언제나 그때그때 달라졌던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변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가 되어라. 혼자가 되면 고독할 때의 강박적인 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너는 재밌는 일을 해야만 할 테니까. 따분함과 허무라는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해 무엇인가를 즐기려 할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살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