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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22. 2019

자기 검열 4 : 니체의 오류

의지의 상관항인 자기 보존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새를 보라. 저 새는 어떤 걱정거리를 안고 날아다니는 것 같은가? 저 새처럼 걱정들은 모두 짚어 치우고 그저, 하늘을 자유분방하게 만끽하라'라고 현명해 보이는 자가 말한다면 나는 답하겠다. 새는 오늘도 배를 굶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두 눈을 끊임없이 굴리는 중이다. 높이 나는 이유는 더 멀리 있는 먹이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보니 시력이 점점 더 좋아지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실제로 다큐를 보면 매장면마다 듣는 말이, "지금 사냥감을 놓치면 언제 굶어 죽을지도 모릅니다"이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하루 세 끼를 시간 맞춰서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어느 것도 문제 될 건 없다. 그리고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문명이 꽃필 수 있는 시원이 되었다. 유희적 존재인 인간! 그리고 그 문명의 일부란 지금 시력을 나빠지게 만들고 있는 노트북의 전자파와 어둠을 걷어내는 천장의 백열등 같은 것이다. 전구가 발명되었을 당시만 해도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옆에 하나의 기적이 와 있음에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항상 불만족스러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간사함은 허영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시야를 좁게 만들어 주변을 둘러볼 수 없게 한다. 언제나 편협한 시각을 갖고 살아 간다.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났기에 다행이긴 하겠지만 현대인들의 만성질환인 우울증을 얻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참 신기한 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꽤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걱정과 고민은 더 많은 편이다. 니체는 이를 비유적으로 그려냈다. 인간의 정신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고 있지 않을 때의 정신은 황폐한 모래바람이 불어 닥치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사자가 되기 이전의 낙타 상태에서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이 짐을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오만들 중 하나이다. 짐을 가득 실은 채 사막을 내딛는 발들.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을 인내한 끝에 사막의 주인 되며, 정신의 주인이 되며 자유를 쟁취한다. 이 자유분방함이 모든 미학적 가치들의 전조라는 것이 합당할까? 만약 반 고흐의 그림이 잘 팔려서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었다면 지금 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위대함을 위해서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조항인 듯하다. 인간은 얼마나 다치기 쉽고 병들기 쉽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란 말인가? 더 많은 부담일 지워라.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를 이끌어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니체가 고통의 늪으로 빠져 들면서 보려 했던 것, 그리고 심연을 재정의한 것은 꽤 희생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희생적이지 않다면 그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며 하이데거의 본래적 자아를 들먹일 수밖에 없다. 그런 희생적인 수모를 겪지 않을 정도로 조금 멍청했다면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텐데, 너무나 호기심이 많은 나머지 언제나 다시금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니체에게 있어서 만큼은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고통은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불가피한 것이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한 행운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건강심리학에서 말하길 우리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만 해도 더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들다고? 힘들어하지 말라. 지금 그 일은 계속 진척되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이런 주장들은 니체의 습작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의지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보상을 무의식적으로 착상시킨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 정신분석적 사실이 니체의 시야에서의 맹점이었을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 싶어 한다. 생명 자체는 힘에의 의지다. 자기 보존은 이러한 의지의 간접적이고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결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기보존이라는 것이 의지의 간접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 간접적인 현상이 아닌 완전히 등치를 이룬다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겨진다. 그의 말을 뒤집어 의지와 보상을 역치시키면, 의지는 자기 보존이라는 전체적 현상을 보필하는 수단이 돼 버린다. 현시대를 비롯해 역사를 통틀어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촉발되었다. 이를 간략히 말하면, 내가 노력을 했는데 어떤 보상-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아니면 도덕적 신념 따위를 충당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노력할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이미 어떤 의지의 현상에서든지 무조건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 동기에 대해서는 각자의 입장이란 것이 반영되겠지만 말이다. 강한 이타심을 가진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희생적인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 자신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저 하나의 문구만으로 니체적 정신의 진위 판별이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 니체를 찬양하는 쪽으로 논의를 전개하면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니체가 의지의 보상적 환원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 신념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만큼은 의지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하고 싶고 또 해결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자신이 그 견본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의 현학적인 태도는 곧 니체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시 니체가 정신병에 걸렸다는 사실로 돌아가자. 즉 그가 충족하지 못한 것은 의지가 자신의 정신착란을 견딜 만큼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죽음으로 연역될 의지의 만행이다. 그 자신을 통해 입증된 명료한 사실은 인간 존재가 거역할 수 없는 신체적 항변이 있으며, 그것은 의지의 확실성에 반해 모호하게 짝이 없는 것이다. 그 모호함을 표현하자면 "인간은 어느 누구나 외롭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유대감을 갖길 원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존중받기를 원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죽는다" 등등. 철학의 논리는 쉽사리 저항할 수 없는 공리적 명제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면 저항할 수 있는 것들은 비합리적이거나 아니면 전혀 어렵지 않아 저항이 필요하지 않거나이다. 갑자기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하찮은 것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용기는 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예컨대 수많은 걸작들을 남긴 대문호,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한 발명가, 부와 권세를 누리며 산 왕들, 전장을 누비며 천하를 호령코자 했던 영웅들, 열렬한 사랑만을 추구했던 수수한 연인들, 인간을 정의하고 인류의 지침을 제시한 철학자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있었는지도 모를 이름 없는 존재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누구라도 제외 대상에 선정되지 못한다. '자기 검열 1'에서 짧게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의 글을 적었는데, 푸코는 동성애자였으며 사회적 추문과 비난에 시달렸다. 그것은 푸코가 합리성의 틀을 의심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가 <광기의 역사>이다. 상상과 정념의 합치인 '광기'란 시대에 따라 부여받는 이름이 달라진다. 그래서 광기는 광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윤리'라는 것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시각을 지닌다. 각각의 나라들이 지닌 윤리들과 문화란 얼마나 독특하고 또 비합리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앞의 문단에서 언급한 '모호하게 짝이 없는 것들'은 모든 욕망들의 욕망이다. 하나의 절대적 윤리가 존재한다면 여러 욕망들이 원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욕망이란 존재적 갈망이며, 이것이 거세당한 흔적에서는 인간의 저열한 심리와 파괴성을 목격할 수 있다.


 어느 누구나 존재감을 갖길 원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체성'이란 것을 규정하는 해석적 양태이며, 곧 소속의 욕구를 반영한다. 내가 누군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을 둘러보라. 내 앞에 놓여 있는 도구들, 내가 가진 직함, 내가 위치해 있는 객관적인 공간,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 내 주변에 나를 둘러싼 채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들이 곧 나이다.(가장 가까운 사람 5명의 평균이 '나'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이런 것들이 나를 가장 잘 이해시켜주는 편리하고 자명한 지표이다. 그럼에도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나'에 대해 알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로 보인다. 나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규정하는 수두룩한 사물들과 사람들이 내 삶의 존재이고 그 이유가 된다. 또 내가 시간을 쏟는 일과 사람들이 곧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고독하기 때문에 발생되며, 이는 존재감을 갖지 못한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 상태에 처했기 때문에 그 상태는 언제나 나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추궁하는 의문부호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독하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숙명이라고 친다면, 자발적인 행동들을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의 존재를 결합시키라는 교과서적인 답이 전부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라는 엄격한 명령들의 반대급부에는 자기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하라는 암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둘을 무마시키는 건 중점을 찾아야 한다는 여전히 아무런 정의도 내려지지 않은 '적당한'이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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