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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19. 2019

자기 검열 3 : 페르소나의 역학

가면의 의미와 필요성

 니체의 책의 구절들은 강인한 의지와 진솔한 믿음들을 묘사한 언어들이다. 책을 읽고 나서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평온을 얻거나 막연한 자신감이 샘솟는 이유를 말하자면, 언어의 미감 정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욕망의 충족이다. 나는 강인한 의지를 욕망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강인한 의지만큼 이 세계를 살아가기에 유용한 것은 또 어디에 있을까! 의지적 존재를 의지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넘쳐나고 여전히 인간이란 존재는 미심쩍기만 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런 것들은 수세기가 지난다 하더라도 의문만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일을 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모든 것들이 의미부여의 결과이긴 하다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고독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열정' 정도라고 둘러대자.


 타인에게 항상 솔직하게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 입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순수함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것은 가면이다. 자신의 진실된 얼굴을 감추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지나 가면을 쓰게 되면서 가면을 벗는 행동, 즉 나 자신을 타인에게 비춘다는 건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항상 투명해야 한다는 행복을 겨냥한 정언적 명령을 위배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투명하지 못하며,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느끼는 것들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리고 남에게 자신의 가짜를 보여줄 수밖에 없거나 하는 것은 열등감이나 무기력의 근원이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말하는 것만큼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가면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가면의 두께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형성하게 된다.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존재들 간의 불일치, 그리고 타인이 던지는 혐오와 비관적 시선은 모든 가면들이 탄생한 유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망치를 든 니체의 욕망이다. 그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이고 이질감을 주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니체는 그의 말들이 천박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가면을 썼다.


 과격한 표현들을 숱하게 쓰면서 니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왜 가면을 썼는가? 우선 가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면이란 일종의 도덕적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적 심급의 최종으로써 절대다수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란 어느 정도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와 선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있어야만이 더 나은 공동체와 미래의 무궁한 발전을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이 부정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자신을 어느 정도 숨기는 것이 덕목으로 여겨진다. 즉 타인에게 자신의 진솔함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가면을 쓰는 행위로 환유될 수 있는데, Persona의 어원에는 이미 '사회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니체가 최악으로 규정한 나약한 모습들이 자기 자신 본연의 가장 진실된 면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진실일 수 있으리. 그러니 나의 허약한 자아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이 문제라고 한들, 이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나의 솔직함을 아무런 가감없이 내비치는 것은  나를 투명하게 유지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가면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게 된 연유이다. 어떤 이유들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언제나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은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솔직한 모습을 비추지 싶지 않은 것이고 곧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특히, 자신에 대해 침묵하는 이들에게는 나에 대해 말한다는 건 꽤 위험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인식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있다고 다 보여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빌려주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마라.

 이 말이 '사회생활'이란 것을 할 때에는 유용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 번 비틀어 보자면, 과도한 의심이 리어왕에게 어떤 비극을 안겨 주었는지 그리고 주변에서 굳이 이 말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라. 우리에게 '친구'의 의미란 무엇인가?

 

 가면은 치장을 하는 도구이며 나의 얼굴을 가리는데 쓰인다. 으레 가면을 쓰게 되면 타인에게 나를 들키지 않게 되고 타인은 가면의 너머에 대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를 감추는 행위는 무엇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이해된다. 나의 약점이나 결점을 들키거나 또는 사회적인 추문을 받지 않으려는 속셈, 즉 자기 보존적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 결과로써 남이 나를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은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묵하는 행위도 가면의 기능을 수행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나에 대해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반대로 아무런 대화도 없이 어색한 적막을 공유하는 타인은 낯설기만 하다. 나름 예리한 눈을 가졌다면 몸짓과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상태를 유추할 순 있겠다. 하지만 그러니 그곳에는 과한 해석과 오류가 범벅되어 있을 수밖에. 그럼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행위는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령, 옛 속담을 세 치 혀의 날카로움이 잘 갈아진 칼보다도 더 예리하게 상처를 내고 발 없이 천 리를 내닫기도 하지 않는가. 말의 조심성에 대해 교설하는 속담들은 넘쳐난다. 그리고 말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비틀거리기 쉽거나 아니면 비틀거리는 중이거나.


 하지만 이런 기능을 담당하는 가면을 니체는 다르게 보았다. 모든 것들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건가. 니체가 그토록 완성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인간상 '초인', 그것이 되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침묵을 감행했다. 도래할 존재를 예견한 니체는 모든 것들을 오직 의지의 힘으로 극복하길 원했으며 가장 최악이라 여겨질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스스로 고독하기를 반복하면서도 최대한 자기 자신을 감출 것을 요구했다. 니체가 이해한 가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언의 정신적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고뇌하는 자 그리고 인식의 선민의식을 갖는 자, '정통한 자',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주제넘은 간섭이나 동정으로부터 그리고 자신만큼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변장이 필요하다.

 여기서 니체의 명령은 자기 자신을 가리는 '변장'의 의무화이다. 왜 자신을 가리라는 것인가?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운명들은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것으로써, 티끌만큼이라도 타인의 개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박약한 의지를 가진 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간섭이나 동정하는 것조차 터부시 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보고서 동정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니체는 가면을 써서 나의 얼굴을 가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침묵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탄을 늘어놓으면서 허투루 시간을 보내고 굳이 하소연을 남발하며 남을 귀찮게 하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굳이 말하지 말라. 실제로도 얼마나 합당한 처사인가? 오로지 나의 소유일 뿐인 내적인 고통에 대해 발설한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말을 함으로써 마음이 조금이라도 평온해진다면 그 평온조차 언젠간 다시 흔들릴 것에 불과하지 않겠냐고 도리어 되묻겠다. 왜냐하면 계속 그런 말들만 할 순 없겠으며 언젠가는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문제들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을 하며 시간을 늘어뜨리지 말라. 우리는 자신이 실패할 것을 염두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남에게 설명하기 급급하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이 상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입을 벌린다. 우리는 자신을 믿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격려의 말을 훔쳐 낸다. 언제부터 격려를 구걸해야만이 믿음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존재였는가? 남을 귀찮게 하지 말라. 나의 시간과 삶이 소중한 것만큼 타인의 것들도 소중한 법이다. 그냥 자신이 생각한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대로 실천에 옮겨라. 생각이란 것은 실천 속에서 더욱 명료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도래할 탁월한 개성을 위해서 말을 아껴라. 이것이 가면이다. 이 말들이 니체가 생각한 가면의 의미이다. 아래의 구절이 니체가 생각한 가면의 근본적 의미인 또다시 의지를 보여준다.

 말만 하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리라! "회복? 회복이라고요? 그대 호기심 많은 자여,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주시려거든 부디..." 뭔데? 무엇을 바라는지 말해보라! "또 하나의 가면!, 두 번째 가면을 주시오!"

 피곤함을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곤함을 감추는 가면을 달라니. 이를 보고 남다른 독창성이라 할 수 있을까? 앞서 가면이란 것 자체가 '사회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니체가 뜻한 가면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 현시대에 비추어 보았을 때도 이처럼 실용적이고 유익한 가면이 있을까? 니체의 가면을 다른 말로 바꾸면 '긍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 누군지를 한 번 생각해보자.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은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은 법이다. 하지만 반대로 음침한 우울과 어깨동무하고 세상을 비뚤게 바라보는 사람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질타를 보내는 중일 것이다. 보편적으로 어느 누구나 밝은 사람을 주변에 두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도리어 자신에게 되물어보자. 나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그런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리어왕처럼 회의 가득한 눈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인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가면이란 나쁜 것들을 숨기는 용도로만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극의 가면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긍정의 가면을 써야 한다. 우리가 유일하게 가면을 써야 할 곳은 우리 자신의 가장 우울하고도 음침한 곳, 누구나 보편적으로 기피하는 곳,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것이다. 가면이 내세우는 원칙이라고 한다면 니체적 의미로서의 가면이다. 온갖 비극적인 표정을 담은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곳은 침묵이 용인되고 권장되며 의무화되어야 할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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