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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10. 2019

자기 검열 2 : 니체의 무의식

니체의 의지와 정신분석

 니체가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후 변신론은 빛바랜 낡은 가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후에 시대는 자본과 과학이라는 새로운 신을 맞아들인다. 과거의 신들보다 훨씬 더 유용성과 실용성을 창조해내는 신들이다. 하지만 뭔가 조악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한한 자비로움이라는 속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나로서 이런 말들은 감사함을 망각한 채 신들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것인가? 니체는 다윈을 긍정하며 앞으로의 세계에 과학이 도래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니체의 사변적 입장은 진화론자의 입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상을 부정하고 개인의 나약한 의존성을 터부시 한 니체의 생각은 리처드 도킨슨이 인간의 공포심이 신과 종교를 만들어 냈다는 <만들어진 신>의 내용과도 일맥한다.


 이런 말들은 일단락 짓고 그래서 그는 도대체 왜 미쳐버렸는가? 신을 죽였기 때문에 심판이라도 받은 것일까? 니체는 성서에서 최초의 인간 중 하나인 '이브'와 비슷하다. 뱀에게 유혹당해 신의 계율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그 부당한 손길을 뿌리치기보다는 그것을 실천한 인간이다. 그녀의 상징은 최초로 도덕률을 파괴한 행위라 할 수 있겠지만 최초의 자유의지이자 최초로 인간적인 행동이다. 대관절, 그가 미친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더 뜸을 들여 그가 미친 이유를 논하기 전에 그거 조금 덜(?) 미치기 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886년 출간된 저서인 <선악의 저편>은 제목도 그렇듯이 도덕의 바깥에서 현재까지의 내부를 조망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이다.(철학자들이 하던 짓들이 다 그렇다) 그중 이 저서에서 잠언 형식의 문구를 한 번 살펴보자.


146.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심연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그대 속을 들여다본다.

 니체는 심연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터라 미쳤을까? 그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것들을 마주하면서 자신이 괴물이 돼버리지 않았을까? 니체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품은 생각들에 대해 약간은 망설이고 주춤거리지 않았을까? 이런 의심들이 저 짧은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내 생각을 정당화할 이유라 한다면 '조심해야 한다'는 표현 때문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면 위험천만한 것들에 대해서이고 그런 것들을 경계하는 경각심이 있듯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도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본성이 엿보인다. 니체는 이 세계의 어쩔 수 없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할 것을 의무처럼 요구했지만, 괜히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서 테디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괴물로 평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니체는 신을 죽이면서 더 이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는 강인한 자아를 추구했다. 어쩌면 더 쉬운 길이 있음에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 니체에게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그러니 이제 나 자신에게만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데카르트 이후 의심할 수 없는 존재가 명확해졌으니 때늦은 시도인가?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심연을 들여다보자. 심연은 빛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 자체로 우연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어둠이다. 원초적인 상태에서 이 세계를 마주한다면 그것들은 우연이 지배하는 곳이고 불확실하기 그지없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문명과 사회 그리고 법체계 따위를 통해 우연한 것들을 이해하면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의 외부에 위치하는 것들이 우리가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들이요, 반대로 니체가 끝까지 수긍하면서도 처절하게 투쟁하려 했던 것들이다. 그 모든 부정성들을 열거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그중에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토대로 논의를 진척시키자. 그것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혼자 있으면 외로운 것인가? 그리고 니체는 일부러 고독해지기를 선택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 중에 하나라 생각이 되는 이 감정을 철저히 깨닫고 또 극복에의 의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든 문제는 외로움에서 기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로운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면, 그들은 딱히 그럴듯한 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타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 마저도 좋지 않게 평가를 내린다. 또 어느 정도 관련이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타인에게 권유하며 자신을 가치 있게 평가하기를 원하며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듯이 늘어놓으며 때로는 그런 모든 행동들이 친절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호혜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들의 고독은 충족되지 않은 보상적 욕구에 기인해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본래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엄청난 양의 외로움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은 제일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인데,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들이 해석되어야 하며 주위의 모든 관심들이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만 향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나 충고는 그들의 귀로 들어가면 비판과 비난이 되고, 자기비판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피하기만 한다.


 뭐 니체가 이런 것들을 모르진 않았다. 그의 글들 속에 녹여진 수많은 정신분석의 난제들은 그의 천재적인 관찰력을 돋보이게 한다. 인간은 '개인'이 되면 될수록 수많은 난관-그것이 경제적이든 심리적이든-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 '개인'이 된다는 것은 양의적이다. 혼자일수록 누군가의 간섭을 피할 수 있게 되고 함께할  발생하는 번거로운 일들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운명과 고뇌를 스스로 끌어안아야만 한다. 즉 고독하다는 것은 가장 완벽한 의미로서의 '자유'를 내포하지만 또한 우리는 항상 혼자이기를 어려워하는 그런 존재이다.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의 인격이란 완벽하게 자유롭고 강인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끝내 이 고독에 굴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단, 니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며 굴복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법적인 조력자에 묶여 있다. 어느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신경증들은 언제나 의존하고자 하는 기초적인 욕구와 사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일어난 충동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 원자화된 개인은 어떤 장애와 마주치게 되면 주체의 고립감과 무력감은 극대화되고 이것은 고독하고 싶지 않은 욕망 그리고 다른 말로 '자유'에서 도피하는 행각으로 이어진다. 자유! 그 이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또 그것만큼 난해한 이름도 없으리.


 '니체가 혼자여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밖에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로 이것이 현대에 만연한 질병인 우울증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여담으로 만약 니체가 조금이라도 덜 똑똑했다면 결코 미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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