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Sep 08. 2019

자기 검열 1 : 니체적 의지와 광기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정신

 먼저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분명 살다 보면 갖갖은 장애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이 원하는 데로 이루어질 만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연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막연하고 우연한 일들이 모여 좋은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만약에 절대적으로 행운을 타고난 자가 아니라면 그런 것들은 모두 헛된 망상이다. 그리고 우연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우연이라는 불확실성의 수혜자쯤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끌어안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대다수라 할 수 있는 보통의 경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라 생각되는 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본질은 염려이다'라고 말했듯이 걱정은 무언가 해결하기 위한 이성의 작용이다. 그리고 어떤 걱정거리를 갖던 간에 근본적으로는 의지를 예찬하는 것에 도착해야만 한다. 물론, 의지를 어떻게 활용하는 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그 의지의 방법론이란-극강의 노력을 통해 모든 고난들을 극복해버릴 수도 있는 의지적 행동도 있겠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선의로 포장된 거짓을 남발하는 것도 의지라 할 수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인식과 논리의 차이에만 머무른다. 같은 사건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입장 차이이다. 애초에 의지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옳다면 그것이 선하다! 라는 단적인 견해로 갈무리될 뿐이다. 그렇다면 모범 답안의 반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지의 부정'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도리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마땅한 해결책도 내어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 또한 의지가 아닌가? 즉, 그 조차도 의지의 부정을 위한 '의지'가 된다.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부가적으로 니체를 인용하면, 최근에 나타난 철학인 쇼펜하우어의 철학 배후에도 종교적 위기와 깨달음이라는 이 전율할 만한 의문부호가 거의 문제 자체로서 존재한다. 의지의 부정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성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모든 것들에게 탄복스러운 어투를 건넨다면 '그래서 도대체 의지가 어떻게 부정되는데?'라고 말하고 싶다. 의지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죽음까지도 말이다. 허무주의를 주창한 쇼펜하우어의 삶만 들여다 보아도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는 본인의 철학과는 다르게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그 당시 인기가 절정이었던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배치하면서 그와 경쟁했고, 그 결과 수강생들을 모두 빼앗겨 열등감만 생겼다. 그리고 말년에 자신의 최대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흥행하자, 자신의 명예스러움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지 않는가? 왜 그는 그토록 명예롭기를 원했고,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랬는가? 그의 철학에 대해 일설하자면 그 시대에 절망한 수많은 청년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 아마 나는 그의 이중적인 면모, 언행불일치를 보면서 그의 감추어져 있던 위선이 탄로 난 것에 눈꼴이 시렸던 것 같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쇼펜하우어 또한 무의식의 보상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니체 또한 그의 행동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물론, 염세주의의 슬로건쯤이라 할 수 있는 '이 세계는 고통이요. 최악의 세계!'라는 통찰은 잊지 않았다.


 니체의 사상은 간편하게 말하면, '그래, 그렇다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숨만 쉬면서 살자고?'라는 고통에 대한 항변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모순된 행동에서 처럼, 의지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지를 주체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의지로 재정의했다. 특히, 시대적으로 십자가의 계율이 막강했던 암흑의 시대에, 그는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하면서 우상에게 종말을 고한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또한 니체의 의지는 과거의 사건들에 머무르지 않는 의지까지 내포하며, 무의식적인 문제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전복시키면서 예방 조치를 내린다. 트라우마 따위는 없으며 과거는 지금의 나와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자유의지를 찬양한 아들러의 목적론적 심리학도 동류이다. 의지는 과거에 머무르는 정신이 소여하는 충동적 정념들 조차도 무화시킨다. '의지적 명령', 즉 내가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대로 나는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완벽한가. 스스로를 절제하는 힘, 그리고 이 정성스러운 힘이 무화로 체현되기까지의 발전 과정은 스스로 엄격해야만 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쉬이 종종 말해지는 교훈적인 말로,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인고의 쓰디쓴 시간을 감내하기를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무엇이든지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언젠간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단순히 희망적인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뭐 이게 아니면 무엇을 긍정할 것인가? 물론, 인생에서 시간문제가 아닌 것은 없겠으며 이런 교설들이 어디까지 어두운 부분을 걷어낼 수 있을진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니체의 말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미셸 푸코가 그의 1000p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논문이며 래디컬 페미니즘의 현주소를 옹호-발원지라 해도 무방하겠지만-할만한 논리들로 채워진 <광기의 역사>에서 니체와 반 고흐를 어떻게 묘사했는가? 


 빛의 정의 속에서 폐기되었다가 완전히 되찾아진 시간의 망상에 매혹되고 가장 덧없는 겉모습의 변함없는 진실성에 마음을 빼앗긴 그들은 이로 인해 가혹하게 배제되었고 어떤 것과도 맞바꾸어질 수 없고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해 다시 직접적 확실성이 된 자신들의 진실 속에서 광기를 상징하는 고통 속으로 유폐되었다.

 난해하다. 쉽게 말해, 그의 저작의 제목대로 니체는 '광인'이었다. 니체가 말한 의지는 모든 부정성들을 감내하며 모든 것들을 극복해버리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영웅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니체가 40살에 미치기 시작함과 동시에 유명세를 타고 52살에 죽기까지, 그의 저서들에서 그토록 부정하려고 애썼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의 증상이라고 무시하던 투로 말을 뱉던, 심리학적인 나약함들인 우울증과 허약증에 시달리면서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한 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니체'라는 인물을 니체의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2가지에 반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광기는 천재들의 도구이며 정신 건강에 해롭지만 또한 미치지 않고서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둘째는, 니체가 미쳐버렸다고?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소만... 그가 정신병자라고 해서 그가 응시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그의 인식이 어디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왜냐면 그의 마지막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린아이'가 아닌 '사자'가 되면서 끝이 났기 때문이다. 죽고 나서야 더욱더 유명해졌지만 죽고 나면 뭐가 소용이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작은 것들의 축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