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Oct 01. 2020

완성된 타자

<TENET> 놀란이 전한 3가지 교훈(스포주의)

 영화 <TENET>을 본 후에 떨렸던 마음이 금세 식게 된 이유는 놀란의 의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기 때문이다. 놀란이라는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 이번 영화를 통해 보여준 시도는 의미심장하다. 언제나 대중들의 흥미거리인 '시간'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세간에 넘쳐나지만 놀란의 이번 신작은 그런 류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자면, 다수의 영화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사항을 내지 '후회'라고 불리는 본연적 정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말해 무엇하나 싶기도 하지만 자명하게도 시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인버전'이라는 기술이 미래에 발명되어 시간을 역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신박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에 발맞춰서 이것이 정녕 실현 가능한 지를 묻는 영화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과학도는 아니기에 영화에서 보여준 물리학적 지식들을 일일이 풀어낼 순 없겠지만, 이를 고사하고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주에 질량은 일정한 데에 반해 공간은 계속 팽창해 나간다. 이를 '엔트로피'라는 지표의 총량이 증가한다고 말하는데, 즉 자연법칙에서 엔트로피란 무조건적으로 증가하는 지표이다. '무질서함'이라는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인 '엔트로피'는 모든 것들이 흐드러지며 질서 정연한 것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개념화한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인버전' 기술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아무튼 간에 이로써 시간을 역행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영화적 장치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게 되면서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데로 시간이 얽히게 된다는 것이다. 앞 문단에서 계속 '역행'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엄밀하게는 물리학계에서 유명한 '고양이'처럼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인 '중첩', 즉 과거오 현재와 미래의 시간대가 동시적으로 겹치게 된다는 발상으로 정리하면 좋을 것이다. 내 무지함 덕택에 물리학적으로 영화를 해석하진 못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런 기술이 실제로 가능할 지에 대한 물음보다는 허구라는 점에 착안해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 대사처럼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뭐, 비행기가 창공을 누비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으니 무작정 불가능하다는 낙인을 찍는 건 무지의 논리이니, 이런 측면을 논외로 치고서  해석을 감행한다면, 놀란의 영화는 언제나 철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어떤 형식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안에 담긴 내용이 항상 우선적으로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언제나처럼 인간 존재와 인간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현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은 놀란의 전작들이 그렇기 때문이다. 영화 <메멘토>에서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사건을 풀어내는 과정을, <인셉션>에서는 꿈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의 가장 심층적 영역까지 파고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발견한 철학적 의미는 3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실존에 관한, 즉 우리의 삶에 좀 더 직접적으로 귀감이 될 법한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들면서 나지막하게 긍정하지만 한 편으로는 은밀하게 부정하고 싶은 바람이 든 의미이다. 이 두 번째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니까 감독의 의도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심스럽기 하다만 그렇다고 해석이나 또는 글을 쓰면서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 가당치 않으면서 또 불가능하다 생각되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배제하고 오직 사실만을 나열한 글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은 2번째와 연관이 깊은 교훈이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의미이기도 하다. 즉 인류가 어떻게 현재의 세계를 지속해 왔는지에 대한 의미이다. (왜 이리 서두가 긴 것인가?)



 첫 번째 교훈은 나에게 있어 만큼은 하도 반복하다 보니 진부한 내용이 되어버린 내용이다. 첫 내용은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인간의 '후회'라는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모든 타임루프물이 그러하듯이 과거의 잘못들, 즉 '오류'라고 불리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현재적 정념이며,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놀란이 보여준 것은 유사하면서도 조금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눈 여겨보아야 할 점은 영화에서는 '자유 의지'에 대해 딱 한 번만 언급한다. 이 '한 번'이라는 숫자가 놀란이 이번에 너무 불친절하다는 평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심리학의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아들러는 목적론적 심리학에 대해 강조한 사람이다. 프로이트가 '트라우마'를 근거로 삼아 과거의 구성물을 재차 상기하고 해석하는 것에 집중한 반면, 아들러는 과거의 사실들로 인한 고정적 자기 이해가 오히려 조악한 현재를 형성하는 것이라 보며 되레 절망으로 빠진다고 주장했다. 아들러는 미래를 향한 의지가 현재의 상태를 규정한다고 보며, 프로이트가 '원인이 멈추면 결과도 멈춘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명제를 아들러는 '트라우마 따위는 없다'라고 단호히 반박했다. 그런 원인들은 딱히 중요하지 않으며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 누가 더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한쪽이 무조건 옳다는 극단적 주장이 오히려 편협하고 고지식할 따름이다.


 이런 심리학적 관점들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 속의 인물은 우리의 주인공이 아닌 여주인공 '캣'이다. 캣이라는 여성의 인물상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자면, 자신을 항상 구속하려고만 하는 남편인 '사토르'에게서 벗어날 의지가 없는 가련한 여인이다. 남편은 그녀를 겁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고 또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아무도 갖지 못하게 파괴하려고까지 하는 저열한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런 남편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일찌감치 낙담하고 무기력으로 삶을 일관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주인공을 믿지만 그 믿음은 자신의 일마저도 모두 주인공에게 맡겨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에 따라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남편에게로 향해야 할 응당한 분노를 '원망'이라는 의존적 형태로 주인공에게 쏟아내기도 한다. (원망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또한 자살할 용기조차 갖지 못해 요트에서 뛰어내린 미래의 자신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가. 이러한 캣의 무기력함은 영화 중반부까지도 지속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게 된 시점은 인버전 된 총알에 의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본인이 '인버전'하게 된 순간 이후이다. 즉 인버전이라는 영화적 장치가 '캣'에게는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룩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간을 역행-앞서 '중첩'이라고 말하긴 했다면 이것에 관해서는 말미에 좀 더 세밀하게 적을 것이다-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발상 자체는 왕왕 등장하는 소재인 것에 반해, 과거는 지금 발을 디딘 현실보다는 덜 하겠지만 꽤 자명한 시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간 여행'은 과거라는 "이미 발생한 사건"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일축되지만, 우리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 관객들은 '영화'라는 장르가 허구이며 이 영화조차도 놀란의 상상적 내용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며 작품을 관람했다. 이에 따라 대다수가 가질 법한 흔한 인식으로 여겨지는 것은 과거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시간대이므로 가정법이 무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무용함에 또는 불가능하다는 판결이 인간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적 시선을 완전히 배제한 때에라야 성립된다. 다시 불가해한 물음을 반복컨대, 우리는 정녕 과거를 바꿀 수 없는가? 구태여 말하기를, 과거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달릴 수 없는가? 그런데 일상적으로 우리가 현재의 그릇된 행보나 잘못된 것이라 여겨지는 습관 아니면 범사회적으로는 관습적인 것 따위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식의 의문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바뀔까?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사고의 양태를 '후회'라고 부르며 이 정서가 '반성'의 선행 조건이다.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바꿀 수 없다. 이런 가정적 물음을 스스로에게 달아 놓지 않는 자들은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변증법'으로 보자면 좀 더 거창하게 젠 체할 수 있는 글이 될 터이지만, 간단하게 '자유 의지'라는 표현에 담긴 함축적 의미가 그렇다. '자유 의지'란 변하고자 하는 자의적 투쟁 상태이다.


 정신분석에서의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라는 형용모순적 표현은 기억이란 것이 지워지기는 커녕 현사태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이다. 피분석자가 잊혔다고 믿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분석가가 행해야 할 분석 기술이다. 특히 감독이 설정한 영화의 '인버전'은 마치 '심리적 퇴행'을 적절히 묘사하는 방식의 일종으로 보인다. 캣이 세계를 무관심하게 관조하는 무기력증에서 탈피하게 된 '계기', 즉 변화의 구심점이 되는 순간이 바로 인버전을 통해 상처를 치료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캣이 사토르를 죽이기 전에 자신이 인버전 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며 배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 또한 상징적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아들러를 보충하자면 의지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이라면 주체는 무엇을 변화시킬지를 인식해내지 못하고서는 변화를 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과거를 교정하는 '만약'이라는 현재에서 성립하는 표현이 모든 과거의 오류를 전복시킬 만큼 강력한 것인가? 이것 또한 전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서 미래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 시간대는 다가올 현재이기도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기 때문에 불확실한 곳이다. 미래를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말을 통해 상기시키는 것은 결정론이다. 거기에 인버전이라는 영화적 장치는 단순히 미래의 시간대를 현재로 당겨오거나 또는 현재의 시간대를 과거로 당겨오는 기술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가 이미 존재한다는 모순되는 설정을 부과했다. 이 설정이 영화의 연출에 가미되어 관객들에게 신박한 볼거리르 제공했으며 그런 장면들에 함축된 의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시간의 얽힘', 즉 '중첩'이다. 글에서 '역행'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더 엄밀하게는 시간의 역행은 중첩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일환이며, 이 불가해한 역행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미래라는 가정적 상황, 아니면 '가능태'라고 불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가 현재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상적인 표현으로 '계획'이나 '목표'라고 쓰다면, 지금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왜 미래의 시간대가 현재의 상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지를 이해시키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여기서 아들러의 관점으로 프로이트를 보충하자면 어떤 부적절한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를 바로 잡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은 편협한 시도일 따름이며, 미래를 향한 목적이 더 우위에서 영향을 미친다고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놀란은 '미래'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부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역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역설은, 내가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면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마치 기억이 잊힌다는 흔한 현상에서의 오류가 문제인 것처럼, 과거가 현재를 그리고 현재가 미래를 구성한다는 통상적 생각을 전복시킨 것이다. 즉 과거를 소거시킨다고 한들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교훈적 의미는 조금 난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난해함은 놀란이 이것을 의도한 것인 지를 몰라 더 조심스럽기도 한 내용이다. 지금 적힐 내용은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은밀하게 긍정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로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적인 동의를 보낼 수 없다. 그것은 '주인공'과 관련된 서사들이며 이 글의 제목에 쓰인 '완성된'이라는 수식과도 관련이 깊다. 한 마디 더 붙여서 조금 의아하게 적어보자면, '계몽'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글의 시작은 '캣'이라는 여주인공의 인간상을 중축으로 우선해서 설명한 이유는 영화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심오한 의미들이 일반 대중들의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즉 대다수 사람들은 '캣'처럼 살아간다. 즉 직언하자면 '캣'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교만스러워 보일 수 있으나, 그 이유는 초인이나 영웅은 낭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면 쉽게 납득할 것이다. 영화 시작 후 'TENET'이라는 영화 제목이 화면에 나오기 전까지의 서사들, 그러니까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이 보여준 태도는 이미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 보여준 장면은 시간의 알고리즘을 뺏기 위한 목적을 숨긴 가짜 테러였는데, 이 테러에는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관객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계획에 대해 알아차리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즉각 설치된 폭탄을 수거해 무고한 자들이 목숨을 구했다. 그 후에 계획 착오로 인해 러시아 용병에게 붙잡히게 되면서 이가 뽑혀 버리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 어떤 비밀도 실토하지 않기 위해 동료가 건넨 자살약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삼켜버렸다. 놀란은 주인공이 영웅의 자질을 갖춘 자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주인공은 타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희생하는 선한 의식을 내재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만큼 고통을 무감각하게 대했고, 하물며 죽음조차도 그에게는 당연히 불사해야 할 것에 불과했다. 감독은 '캣'이라는 여주인공이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인물로 설정한 반면 주인공은 시작부터 비범한 존재였다. 그래서 주인공은 곧바로 'TENET'이라는 조직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당신이 '캣'의 성향을 닮지 않았다고 말하려면 주인공의 태도를 당연시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아무런 존경도 보내선 안 된다.


 더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영화 내도록 일관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불굴의 의지를 갖고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모두 헤쳐나갈 수 있는 태도 말이다. 이는 놀란 감독의 전전작인 <인셉션>과는 대조적이다. <인셉션>에서 배우 디카프리오가 맡은 배역인 '코브'는 자신의 트라우마이자 죄의식의 표상인 아내 '멜' 때문에 몇 번이나 작전을 그르칠 뻔하며 동료를 위험으로 몰아넣었지만, 영화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무의식적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여태껏 전작들에서는 주인공들이 어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분노하거나 또 좌절하는 등의 조금이나마 인간적은 모습을 보여준 반면, 이번 영화에서는 그저 강인하기만 했다. 전개상 위기 상황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에서조차 꺾이지 않는 기개와 용맹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영화에서 딱 한 번 등장한 '자유 의지'라는 표현을 고쳐 쓰면 칸트적 의미의 '선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영화의 제목인 'TENET'은 스토리 상에서 거대 조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조직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조직이다. 이 대목에서 놀란이 던지고자 하는 2번째 의미가 드러난다. 주인공 일행은 '사토르'라는 편집증적 야욕을 가진 권력자에 대항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토르의 야욕을 조력하는 미래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사토르에게 '인버전' 기술을 준 집단-에 맞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악의 세력의 대항마로서 로버트 패티슨이 연기한 '닐'은 인버전 된 미래의 존재이자 'TENET'의 수장과 절친한 관계이다. 그리고 그 선한 세력의 수장은 영화 마지막에서 나온 것처럼 미래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를 정의하자면, 한낱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타자의 위상을 짊어지는 영웅이다. 다시 물음을 반복컨대, 그래서 주인공의 정서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주인공은 '선의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선의지'라고 대사를 친다면 답지 않게 친절하며 노골적이기까지 하니 '자유 의지'로 말한 것으로 보이면서, 또한 '선의지'는 대중에게 그리 친밀한 표현은 아니지 않던가.


 앞서 '자유 의지'라는 개념으로 목적의 왕국에 대해 관철시키는 이유는 관객들에게 희망적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다. 진부한가? 원래 교훈이란 것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임에도 재차 강조되는 이유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태껏 보여준 주인공의 태도를 토대로 ㅅ마아 놀란의 의도를 밝히자면, '타자의 타자'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정하는 사고 실험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타자의 타자', 즉 요즘 웹툰부터 시작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으로 인류나 대중을 통제하려고 드는 개인이나 조직적 세력의 거대한 움직임이 있다는 음모론적인 설정을 의미한다. 소설 '빅 브라더'나 영화 <어벤저스>의 '타노스'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프리메이슨'이라던가 '일루미나티'와 같은 실증되지 않은 집단에 관한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 또한 이 개념이 대변하고 있다. 놀란은 이 음모론에 반론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악의 세력들에 관한 음모론에 반해 'TENET'라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도 있다는 낙관으로 영화는 종결된다. 사실 현실에 횡행하는 음모론처럼 그러한 조직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어떤 믿음이 허황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허황됨은 생각보다도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종요하는 정념은 무엇일까? 여기서 라캉의 남성 우월주의자에 관한 고전적 시나리오를 뒤튼 역설적 진실이 해당된다. 그 진술이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은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간에, 남편의 병적인 의심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남편은 병적인 의심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애매모호한 것들은 언제나 의심을 가중시키는 법이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타자의 타자'에 맞서 있는 조직과 더불어 '사토르'라는 클리셰적인 악인을 상정한 것을 보면, 이 개념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만, 여기서 아쉬운 점은 '영웅 신화'에 대한 긍정이다. 현실에 대입하면 우리의 주인공 같은 영웅들이 이 세상을 좋게 바꾸기 위해 힘쓰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듯하다. 특히 주인공은 '베트맨'처럼 음지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토대로 부각할 만한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배역의 '이름'이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주인공격인 '닐'이나 '캣' 그리고 악의 축인 '사토르'나 주인공과 다른 신념을 가진 '프리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주인공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던 찰나라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원하는 지를, 인간이 얼마나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지를, 인간이 나르시시즘적 환영에 근본적으로 존속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조차도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할 따름이다. 지젝이 말하기를, '대타자의 위상을 짊어질 수 있는 개인은 없다'라고 말하며 공동체의 위상에 대해 피력했다. 그러나 놀란의 작품은 이에 반하고 있다. 영웅적 기질을 가진 자들에게 인류가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중점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교훈은 인류가 현재를 구축한 유일무이한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놀란의 영화가 '맹목적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는 근거는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는 문구에 함축되어 있다. 이 말을 중심으로 영화를 조명하면 관객들이 영화에서 본 불가해한 사건의 중첩조차도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오도일지 모르겠으나 닐이 미래에서 인버전해서 현재로 온 이유는 과거나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사토르를 비롯한 그를 조력한 미래의 악의 세력이 과거와 현재를 바꾸려고 시도한 것이다. 영화에서 아주 짧게 사토르의 입을 빌려 지구 온난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미래의 세력은 현재의 인류에게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사토르의 광적인 동기-세계의 무화-를 매개로 삼아 핵전쟁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즉 암울한 미래의 원인이 현재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는 말에 말미암아 이미 사토르와 그 세력들의 공모가 실패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다. 이 말은 결론적으로 주인공과 'TENET'라는 조직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이 '이미 일어난 일'인 것이다. 닐이 현재로 인버전되어 온 이유는 악의 세력이 현재를 바꾸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현재를 현상태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다.

 

 낙관적 심급이 애매하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식적 지침이 애매하면 할수록 의심은 더 비대해진다. 그렇다면 성급하게 볼테르의 <캉디드>가 교양 도서로 선정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이 글에서 '맹목적 낙관'이라는 현시대에서 경계해야 할 마땅한 표현으로 써 놓긴 했다만, 영화에서 보여준 '말장난'을 참조점으로 삼으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장난이 꽤 나왔던 것 같은데 유일하게 딱 하나만 기억에 남아 있다. 혼란을 방불케 하기 위해 비행기를 충돌시킬 계획에 대해 담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거기서 주인공과 조력자의 대화이다. 


'그건 너무 대담하지 않아?'

'미쳤다고 할 줄 알았는데.'


 동일한 행위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 즉 단순해 보이는 언어적 표현이 사태 전체에 대한 주관적 관점을 결정짓는다. 내가 보긴엔 인간은 보편적으로 미래라는 불확실한 시간대를 마주하면 낙관하기 보다는 회의를 더 많이 갖는 것 같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존중의 표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비아냥대는, 일종의 경각심을 표상하지 않는가. 하지만 착각은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확실성 앞에서 부정적인 쪽을 더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것이 마치 선호의 대상이 되는 듯이 말이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절망이 모두 빠져나가고 맨 밑바닥에 희망이 있었다는 신화적 일화가 주는 교훈과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뻔하다.


 애매한 개념들에 대해 피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무지가 곧 힘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프리야'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인공이 그녀를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주인공은 캣에게 위험을 진지했을 시에 사용하라고 건넨 발신용 전화를 통해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즉 그녀가 남긴 발신 '기록'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매개가 된 것이다. 인류는 무엇이 가치 있고 옳은 지를 기록을 통해 전승했다. 적어도 놀란은 지금까지 수행되어온 익숙한 방법을 다시 제시하면서 영화를 끝맺었다. 이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와 딸이 각기 다른 차원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사이에 두고 소통할 수 있었다는 설정과 동일하다. 여기서 칼 융의 '원형'을 끌어와 주인공과 같은 인물의 탄생에 대해 덧붙이면 괜찮을 것 같지만 이미 너무나도 많이 끼워맞춰진 글이니 이만 삼가도록 하겠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때에 경제적 합리성이 최대에 도달한다'는 말을 신봉하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지만, '이타적' 존재에 대한 그럴듯한 평이 달린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진화생물학에서는 이타적 행위조차도 이기심의 한 표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악하기만 한 존재인가? 이에 대해 부적절하지만 그 의미 자체를 놓치고 싶지 않기에 빈약한 답변으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쓴 말을 인용하겠다. '인간은 악한 것을 원하지만 선한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의 일부'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사적인 소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나는 계몽이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믿는 극단적 회의주의자다. 놀란이 '기록'을 통해 가치가 전승된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믿음을 재차 강조했는데 애당초에 '활자'를 보존해 온 이력은 극소수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뀐 순간은 폭력 이후였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시대를 이끌었던 믿음이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만 말이다. 쓸 여력이 없어 자세히 적진 않을 내용을 하나 덧붙이자면, 영화 전개상 두 세력이 대치하는 이유는 '알고리즘'이란 것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이라는 상징적 표현이 역사가 선택적 조합물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환상적 국면에서의 선택의 불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