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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13. 2020

환상적 국면에서의 선택의 불능

<미스터 노바디> 불완전함의 용기 (스포주의)

 영화 <기생충>에서의 '다송'을 기억하는가? 다송은 지하 방공호에 숨어 살던 근세의 존재를 가장 빨리 눈치챘으며, 그로 인한 불미스러운 공포와 대결하며 분투를 지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쉽게도 다송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조차 해내기 벅찬 어린아이이다. 특히, 다송이 그린 그림인 '자화상'은 기우가 지적한 데로 '원숭이'이다. 진화론적으로 우리의 원시적 조상들에게 지배적인 정서는 공포였다. 현재 우리의 삶은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 융의 말대로 현대인은 공포라는 감정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불안이라는 감정과 공존하기에 이르렀다. 역으로 말하자면 원시인에게는 공포의 감정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들은 현대인만큼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간혹 가다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재앙을 상상하곤 한다. 가령 달콤한 낮잠을 즐기던 찰나에 갑자기 집의 토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 잔해물에 깔리게 될지도 모른다거나, 아니면 교통 법규를 어긴 타자가 자신에게로 돌진해 와서 불의의 사고를 겪는 바람에 사지가 마비되거나 또는 절단해야 하는 참사를 겪을지도 모른다. 또 실제로 본 사람의 이야기인데, 그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무서워해서 12시간 비행 동안 한 숨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통계적으로 비행기는 가장 안전한 운송수단이니 눈이나 부치라 말해줘도 눈 한 번 감지 않았다. 이 말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미 당신의 운명은 기장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일단은 그냥 믿도록 합시다." 아마도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을 재앙에 걱정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이 명언에서의 가르침이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면 보험 업계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소모적이기만 하다. 이런 생각들을 한 번 즈음해볼 수는 있겠지만 서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런 상상이 허투루 남게 하지 않으려면 재난 영화를 만들면 될 것이다) 이 모종의 불안은 인간이 우연이라는 통제-불가능한 상황을 상상했을 때 벌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통계적으로 보면 비행기 사고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차에 부딪혀 사고가 날 확률이 훨씬 높으니 이를 더 불안해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걸어 다닐 때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나 아니면 불행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 정도이다.(비행기 사고가 났을 때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영화 <미스터 노바디>의 도입부에서는 주인공 '니모 노바디'가 어떤 연유들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우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주인공 니모가 직면하는 선택의 상황과 우연적으로 찾아오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끊임없이 교차되며 니모를 괴롭힌다. 니모는 영화 전반 내도록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듯 하지만, 여기에서의 주체성이란 환상적이다.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주체적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즉 역설적으로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선택을 할 어떤 필요조차 존립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주체성은 궁핍에 처해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는 니모의 엄마가 니모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설정은 영아가 부모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시작부터 부모님의 불화로 이혼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니모는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를 맞이한다. 불완전한 존재들이 만든 불완전한 상황은 불완전한 존재의 몫이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차후의 상황과 또 그 이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들에서 총 9가지의 미래를 마주한다. 다시 한번 더 언급하자면, 니모를 움직이는 건 상황이 틀어짐에 따라 발생하는 후회와 반성 그리고 사후적인 결심이며 그것을 통해 과거를 끊임없이 고쳐나가지만 여기에서 의지란 아주 소박할 따름이다. 최초의 선택이 벌어진 시점에서 이미 주체적이지 못했으니 애초에 니모에게 단연코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은 없었다. 마치 영화 시작에서 비둘기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니모는 영화에서 우연한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우연한 일들을 결코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일련의 사건들의 끝인 관객들에게 처음 보여준 죽음의 이미지들은 니모가 끝끝내 마주해야 할 것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니모가 죽는 장면들은 니모의 여러 가능적 미래의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이다. 그러나 니모는 9개의 가능적 미래와 그 끝인 '죽음'이라는 동일한 결말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다. 특히, 영화 중반부에서 '빅 크런치'에 대해 소개하는데, 간단히 축약하면 우주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질량이 공간의 팽창하는 힘보다 커지면 대수축이 일어난다고 한다.(그렇다고 한다...) 영화에서 왜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이 수축의 시점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영화 내에서는 아무런 선택을 내리지 않는 행위와 연결된다. 니모는 최초의 선택 앞에서 도망친다. 그로써, 니모는 모든 환상들을 가로지르며 영화의 제목인 '미스터 노바디'처럼 -직역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환상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택적 불능', 즉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택하지 않음에 따라 모든 가능성들도 동시적으로 폐기된다. 영화 마지막에서 모든 것들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연출이 그것이다. 사실 모든 미래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이율배반적인 상태로 놓여 있다. 가능성이란 언제나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그런 것이다.


 니모는 '어린아이'였다. 그 어리고 연약한 존재가 선택하지 못한 이유는 그 어떤 미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에서 연원한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영화의 특별한 설정은 니모를 자족적 한계 상황을 인식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는 의식이 신뢰하고 있는 자율성이라는 착각을 오인한 결과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인생의 끝이 죽음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삶의 단순한 진리를 9번이나 마주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해 니모가 선택을 하지 않음에 따라 모든 가능성들은 폐기되었지만, 한 편으로 니모가 샛길로 내달리는 장면은 제시되지 않은 제3의 길을 선택했다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엄마 또는 아빠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분법적인 틀을 벗어나 완전히 자율적으로 다른 선택을 내렸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면 선택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의해 니모는 삶에 계속 등장했으며 세 명의 사랑 중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애나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환상이란 이미 실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지만 실존적이지 못하다는 문제를 떠안고 있다. 니모가 자신의 환상을 가로지름에 따라 겪게 되는 주체적 결핍은 다른 3의 기로를 선택하게 된 근간이 되었다. 또한 이 불가능의 토대는 니모(어린아이)가 어린 시절 최초로 관계를 맺은 부모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함에 따라 얻게 되는 일종의 거세에 대한 불안증이었다. 그 속에서 소외를 경험한 분열된 주체는 불완전함에 근거해 도취적인 욕망을 추구하기에 이르지만 그 이후에 '무'로의 체현, 즉 영화에서 9번의 죽음을 맞닥뜨린 사건은 니모가 불완전한 만족의 가능성들을 과감히 폐기시키는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117세인 니모가 어린 시절의 니모를 보고 "'불가능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라고 말한 대목이 이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결말에서 우연하게 애나를 만나게 된 것은 그 자체로 불가해하지만 꽤 그럴듯할지도 모른다. 영화 내도록 사랑을 중축으로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이유에는 '사랑이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든다'는 교리적 해석이 담겨 있지 않을까?(모르겠다)


 어린아이의 경험의 전무함은 살아갈 때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불안한 현실에 만족하라는 어불성설은 언어적 사유로 포착할 수 없는 실재적 영역이 여전히 불명료한 잔해라고 말하며 주체를 끊임없이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주체가 소외되어 있지 않다면 현실에서 '진정한 현실'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또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불안의 징후는 지금 이 선택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이 없지 않다는 극심히 모호한 징조로만 읽힌다. 하지만 이 모호함이라는 통제-불가능성의 실존적 한계 상황만이 주체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다시 말해, 적대적 실재만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끔 이끈다. 니모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조금 더 결말을 열어서 유추해보자면, 니모의 도피적 행위 덕분에 니모의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보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가능성에 말미암아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라캉에게 불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유일한 정서이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모든 사유 작용의 총체성-또는 뇌의 과부하를 일으키는 전기 신호-이라 부를 법 한데, 그 까닭은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항상 어떤 가능성을 염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성이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주체는 갖은 방법을 통해 자신에게로 도달한다. 그 방법들이란 대게 자신의 경험이 전부이겠지만 그것이 아무리 협소하다 할지라도, 가능성을 낳는다. 특히, 심리적 퇴행은 살아가면서 어떤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발생한다. 이것이 무의식적인 이유는 우리가 굳이 하지 않으려 해도 자동적으로 소여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의식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퇴행적 작용이 과도해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이 움직임이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충족하지 않고 심지어 반대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과도화는 무기력증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반성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매번 같은 실수를 동일하게 반복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한 번 멈추어서 생각해 보길, 과연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영화에서의 니모처럼 제시되지 않은 제3의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영화에서 보여준 내용들은 마치 '주마등'과도 같다. 이것은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의 모든 흔적들을 순식간에 관망하는 의식적 움직임인데, 이는 지금껏 경험한 것들 속에서 죽음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면서도, 심리적 퇴행과도 동일한 목적을 갖는 이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경험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가르침을 합당하다는 것과 선택함을 주저하지 말라는 말의 당위성이다. 그래서 영화에서의 교훈은 2092년 117세의 니모가 '무엇이 현실이냐?'라는 물음에 '모든 것들이 현실이다'라고 답한 장면에 함축돼있다. 그러나 긍정성을 불어넣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은 의식의 고양을 위한 진일보적 선택을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 번 멈추어서 생각해 보길, 우리의 선택이 어떻게 해야만이 주체적인가?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반성적이지 못하다. 반성적 사유 작용에는 사후적이라는 문제, 즉 주체가 선험적 부정성을 결코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즉 우리는 니모와 같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ps. 망각의 천사가 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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