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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17. 2020

돈가방의 결정론, 이 시대의 목적은 무엇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신이 죽은 세계 (스포주의)

'신은 죽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자크 라캉 <에크리>


 인간은 위험을 기피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얼마나 정당할까? 종종 위험한 상황들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령 아마존이나 남극과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를 도전하는 사람들이나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외줄타기나 심해 다이빙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탈인간'이라고 칭송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칭송받는 자들의 무모함, 즉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하고 싶다거나 에베레스트의 높이보다 더 깊은 파나마 해협을 탐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은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인류는 이런 정신들 덕분에 현시대를 풍미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의 배후에는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목적이 없다면 위험을 감내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리고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우연과 그 우연에 의한 모종의 위험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시작할 때 관객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처음에 '르웰린 모스'가 사냥에 실패한 순간부터 우연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존 정도의 목적에 의해 미물로 취급되는 사냥 대상인 사슴을 총으로 쏘지만 총알이 빗나가고 만다. 그리고 사슴들이 놀라 도망간 자리에는 거대한 구름이 몰려온다. 이 장면부터 벌써 암울한 전조가 펼쳐질 것이라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모스는 사슴이 흘린 핏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그의 제스처는 사슴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은 마피아들의 마약 거래 현장으로 그를 이끈다. 어떤 우연의 참혹함 속으로의 귀착 그리고 이 과정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곳엔 모두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명이 짧다는 말마따나 그 극악무도한 사건 현장을 마주한 모스의 운명도 이미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서 모스는 아직 가냘픈 숨이 붙어 있는 사람과 돈가방을 발견한다. 그는 돈가방을 획득해 늦은 밤에 집으로 귀가한다. 하지만 그는 물을 원하던 사람을 잊지 못해 잠을 청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물을 떠다 준다. 이 도입부에서 모스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그는 꽤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사람은 죽어버려서 그의 노고가 무색해졌을 따름이며 그 자상함 때문에 그의 정체가 발각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모스가 이 연민이라는 감정 때문에 앞으로 대적할 미지의 타자에게 한 번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선빵필승'이라는 싸움의 공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모스는 돈가방을 소유하면서 수모를 겪을 예정이다. 본인도 이미 어떤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모스는 죽음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여기는 듯하다. 그가 그 위험에 대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자신감에는 얼마나 충분한 근거가 있을까? -몇몇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불행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런 근거 없이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불명료한 것에 의존해 모스는 돈가방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애석한 점이 있다면 모스는 돈가방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스가 돈가방에게 소유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목적 자체인 '돈가방'이라는 사물은 모든 주체들을 함열하는 기표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선험적이라 할 수 있는 미래 가치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그 돈가방을 노리는 미지적 타자와 조우하게 될 예정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돈가방을 소유한 자들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죽음도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분명 모스가 목도한 현장의 죽음의 이미지들은 섣부른 판단이 화를 부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인간의 탐욕은 그 의미들이 건네는 위험성을 저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주인을 잃은 물건은 경찰서에 가져다 주자)


 모스와 대적하는 '안톤 쉬거'는 영화 내도록 긴장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다. 그의 이질성은 혼돈 그 자체를 상징하면서 그에 걸맞게도 그는 무자비한 성격의 사이코패스이다. 영화 내도록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며 죽이고 또 죽인다. 그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으며 그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르거나 자신의 신변에 위해가 될 것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면 잔악무도하게 살해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여러모로 베일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공포스러움이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 선처를 베푸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때이다. 안톤 쉬거는 애매한 순간이 닥칠 때마다 '동전 던지기'라는 수단에 의존해 결정을 내린다. 앞면 또는 뒷면, 즉 죽일지 안 죽일지 두 가지로만 나뉘는 수단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것은 우연 그 자체이며 타자에게는 '행운'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만이 그가 따르는 유일한 질서인 '우연'이다. 우연을 보고 질서라거나 원칙이라고 부르기가 어렵긴 하다만 역설적이게도 이것만이 유일무이하게 사이코패스의 충동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동전을 던지는 순간은 안톤 쉬거를 마주한 타자가 항상 행운을 바라는 순간이다. 또한 이 동전을 통해 안톤 쉬거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발화에 종속되지 않는 인물인데, 즉 자기 자신의 주관이 타자로 향하긴 하되 자기 자신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동전 던지기'를 한 장면에서 가게 주인을 살려 주면서 동전을 주머니에 넣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동전을 건네다. 그 이유는 다른 동전과 뒤섞이면 그 동전이 갖는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모스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주머니에서 뒤섞인 동전을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어떤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의미 부여된 세계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반사회성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언급한 데로 그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이를 입증하는 장면은 안톤 쉬거가 모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내인 칼라 진을 찾아갔을 때 선처라고 하기엔 모호한 것을 베푸는 장면이다. 동전을 던지려는 순간 칼라 진은 '동전으론 결정 못해요, 당신이 결정해야죠'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안톤 쉬거는 얼굴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며 나름 반론이라고 펼친 건 고작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걸'이다.


 안톤 쉬거는 칼라 진을 죽이고 난 뒤 언제나 그랬듯이 유유히 범죄 현장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안톤 쉬거는 공교롭게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는 분명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주행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이유는 교통 법규를 어긴 타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소년이 안톤 쉬거를 위해 웃옷을 벗어주는데, 그는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 우연성의 수혜자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사이코패스가 약자로 전락해 버리면서 협상에 응하고 있다. 어떤 협상도 거절하던 그조차 우연한 사고로 인해 해를 입게 되자 '화폐'에 의존한 '경제 교환 법칙'의 질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들에게 돈을 주면서 '나 봤단 소리 하지 말거라'라고 당부의 말까지 건네는 의뭉스러운 순종을 보여주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여기서 그가 칼슨을 죽이기 전에 뱉었던 대사는 안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믿고 따르던 룰 덕에 이 꼴 됐다면 그딴 룰 어디다 쓸까?' 그리고 칼슨이 협상이 통하지 않는 그로부터 살기 위한 협상을 시도할 때 안톤은 '삶에 미련을 버려, 모양새 나빠지지 않게'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더 와 닿는 이유가 있는데, 모스가 안톤 쉬거에 의해 부상을 입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 장면이 있다. 모스가 거기서 만난 청년들에게 웃옷을 얻기 위해 돈을 건넨 행위와 안톤이 옷값을 지불하는 장면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거래'를 통해 이 둘은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보안관의 말을 통해 노인들은 예외 없이 죽어 나간다. 영화 내도록 보안관은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 계속 말한다. 처음 장면에서 아무런 동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나, 사회보장 연금을 타먹기 위해 노인들을 죽였지만 죽이기 전에 그들을 고문한 부부들, 그리고 칼라 진의 엄마조차 모스를 쫓던 멕시코 갱단에 의해 죽게 된다. 노인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인 바로 '약자'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약자들이 영화에서처럼 더러운 꼴을 면치 못한다는 점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혼돈과 그로 인한 부조리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보안관'의 존재였다. 보안관은 안톤 쉬거와는 반대로 '질서'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현실적으로 충분히 존재할 법한 비참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연출함으로써 보안관의 무기력함과 질서의 무능을 보여준다. 그는 항상 사건이 터진 후에 현장에 도착하며 뒷수습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의 행보는 마치 재난 영화나 범죄 영화에서의 클리셰처럼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나 뒤늦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의 우스꽝스러움 같은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사건이 종결된 후에 뒤늦게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면 어떨까? -내 이웃 중에 영웅이나 초인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결국 그는 계속해서 유보하고 있던 은퇴를 결심한다. 그가 조금이라도 젊었다면 자신이 짊어진 냉소를 견디며 은퇴 시기를 미루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는 노인이다. 또한 그는 보안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우린 매일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옛시대의 정언을 잊고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이 말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이 말의 비장함은 무색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마도 그의 회의는 임계치를 돌파한 지 오래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은퇴 후 자신의 선임이었으며 아버지의 부보안관이었던 자를 찾아가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한다. 그가 말하길 '예전에 나이를 먹으면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겠지 싶었어요. 원망하진 않아요'라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허탈감을 드러낸다.


 인간 개체가 세계에 던져진 순간 어떤 환경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미 할당되어 있는 것들을 보고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구조란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우연이라고 불리는 불가항력적이고 불확실한 힘에 대응하기 위해 앞선 사람들이 구축한 질서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축조물의 존재 이유는 평온을 선사하기 위함이며 이 자체로서 '이성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질서란 것에 의해 인간은 안락한 삶을 유지한다. 질서는 삶을 영위하게끔 돕는다. 하지만 이것을 무시하는 자가 몰고 오는 가학성은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영화에서 안톤 쉬거가 몰고 다니는 공포스러운 긴장을 막기 위한 질서는 무엇인가? 주체와 타자가 공존하는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종종 거래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돈을 건네는 손'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왕년 보안관 이야기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보안관 치고 한 번쯤 비교 안 해본 사람 있나.
 그들이라면 이 시대를 어떻게 꾸릴까.
<영화 첫장면, 보안관의 말>


 타자는 주체에게 있어 항상 미심쩍은 무언가이지만, 주체는 비슷한 타자를 만났을 때 쉽게 안도감을 찾는다. 칼스가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돈을 나눠 갖자고 협상을 하면서 베트남 파병을 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모스는 이 협상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에게 베트남 파병을 갔다는 사실은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르웰린 모스가 다시 멕시코 국경을 넘으려 할 때 국경 관리인의 의심을 단번에 누그러뜨리는 것은 그가 '제12 보병대대에서 66년 8월 7일부터 68년 7월 2일까지' 베트남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다. 상호 간의 유대를 조성하는 것이 참으로 신비스러우면서도 참으로 허술하지 않는가?


 ps. 영화 처음에서 보안관이 한 말과 은퇴 후 자신의 아내에게 말한 꿈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의존의 대상이며 앞서 가거나 또는 지나간 존재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 오늘도 죽은 자들의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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