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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13. 2020

미안하지만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병적인 의심의 마지막 (스포주의)

 위대한 시인들은 찰나적이고 열광적이며 호색했고 철이 없었으며, 의심하고 신뢰하는 데 있어서 경솔하고 충동적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영혼은 보통 감추어야 할 어떤 결함을 가리고 있으며, 때로는 작품을 통해서 내면의 상처에 보복하려고 한다. 때로는 드높이 비상함으로써 너무나 강한 기억에서 도피하려고 하며, 때로는 진흙탕에서 뒹굴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며, 늘 언저리를 떠도는 도깨비불처럼 되어 자신을 별로 착각하게 만들며 -이 경우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 때로는 오랜 자기혐오와 반복해서 나타나는 자기 불신의 망령과 싸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사랑하는 연인들은 언제나 행복할까? 말해 무엇하겠는가. 언제나 행복하고 싶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에 이미 이 질문의 의도조차 모호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점이 있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 사랑이란 것에 말미암았을 때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의문인 점은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을 하는데 왜 그토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질투에 사로 잡히고 또한 원망하기도 하는가. 이 불가해한 역설을 감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기를 갈구하다가도 그 고통스러운 연애가 끝이 나면 다시 새로운 연인을 찾는다.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임에도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이 영화도 사랑 이야기이다. 그리고 니체의 저서에서 빌려온 저 문구는 영화 속 극작가인 '앙트완'을 잘 대변해 준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앙트완의 이야기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앙트완이 그리 큰 비중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아마 영화의 제목처럼 난해함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감독은 이해불가능성을 위해 영화 속의 관객들, 즉 앙트완의 지인들이 앙트완의 극의 주인공들의 대사를 읊조리고 연기하는 방식으로 영화 내용을 전개시켰다. 그래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영화의 평은 대게 난해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중 다수는 사랑의 절실함과 심오함을 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앙트완의 미숙함 또는 멍청함이었다고 갈무리하는 것이 더 옳지 않나 싶다. 내가 여기서 적고자 하는 바는 영화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의 제목처럼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영화 속 대사인 '개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면 의자가 된다'처럼 머리와 꼬리를 잘라 놓았기 때문에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리송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개의 머리와 꼬리에 관한 내용이 될 터이다.


 영화는 유명 극작가인 앙트완의 유고작을 보기 위해 그의 지인인 배우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지인들은 모두 앙트완의 극인 '에우리디스'에 출연했었던 배우들이다. 그들은 앙트완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극 '에우리디스'를 관람한다.


 그들이 영화 속에서 시청한 영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연인인 '에우리디스'를 너무나 사랑한 오르페우스의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죽어버린 에우리디스를 되살리기에 이르지만, 또한 사랑의 과오라 칭한다면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동굴을 빠져나갈 때까지 에우리디스의 얼굴을 쳐다보아선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만다. 오르페우스의 과오로 인해 그는 또다시 슬픔에 빠져 살다가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앙트완이 만든 극은 이 신화를 토대로 삼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난해함을 돋우기 위해 감독은 극을 관람하는 배우들과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교체시키면서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이건 그리 의미 부여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들면서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꽤 의미심장하다. 이는 타자의 장에서 등장한 주체와 절대적 주체의 끊임없는 '전치', 즉 자리바꿈이다. 이 방법을 '감정 이입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데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감독의 악의(?)가 아닌가 싶다. 영화가 절정이 치닫게 되면서 극의 주인공에게 이목이 집중되기보단 배우들의 연기가 더 돋보인다는 점도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


# 1막

 극 중 오르페우스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모든 것들이 통제되는 삶에 불만족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부권에 저항할 만한 동기나 용기가 없다. 허황된 삶을 살지만 허황되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것을 깰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순간은 오르페우스가 바이올린 켜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에우리디스의 등장이다. 서로 첫눈에 반해 강렬하게 끌린 두 사람은 너무나도 경솔하게 사랑을 맹세한다. 극 중에 오르페우스는 '기꺼이 장님이 되겠다'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에 마지막에 자신을 두 눈을 찌른다. 즉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견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맹목적이게 된 오르페우스의 문제란 에우리디스가 남자 문제가 꽤 복잡한 여자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마티아스라는 남자 친구가 있었음에도 오르페우스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알게 뭐람? 에우리디스는 마티아스보다 오르페우스를 더 사랑하는데!) 에우리디스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개의치 않아하며 마티아스를 매몰차게 대한다. 허나 이는 마티아스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오르페우스의 의심을 유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아직까진 이 의심은 여전히 불명료하다. 그 이유는 마티야스가 에우리디스의 선고에 의해 기차선로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죽은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들이 사랑이 시작할 즈음에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 이 남자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운명' 아니면 '죽음' 자체이다. 이 남자는 애매한 암시들로 오르페우스를 흔들리게 한다. 그가 말하길 '죽음은 탁월한 선택이다'라고 말하며 독약은 느리고 고통스러우니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죽음은 고통이 아닌 달콤함이라 말하기 까지. -앙트완의 죽음에 관한 복선이다-


# 2막

 둘의 경솔한 사랑이 고조되며 미래를 맹세하면서 현재를 행복으로 물들이는 중이다. 그런데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웨이터가 등장한다. 그 둘이 더 가까이 사랑하려고 할 때마다 문득 찾아와 훼방을 놓는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그 웨이터를 눈치 없는 사람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헌데, 웨이터는 오히려 조력자였다. 둘의 사랑을 굳건히 만들어 주고자 돕는 존재이며, 엄밀하게는 에우리디스를 도와주고 있다. 웨이터는 에우리데스에게 편지를 건넨다. 그 편지를 본 에우리데스는 황급히 그 편지를 찢어발기고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웨이터는 황급히 그 찢긴 조각들을 자신의 품에 숨긴다. 여기서 편지에 문제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웨이터는 그 문제를 감추려고 한다. 편지를 받은 후 에우리디스는 두려움에 빠진다.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어 자신에게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편지의 발신자는 에우리디스의 내연남(?)인 극단장이었다. 그녀는 마티야스 말고도 극단장과도 내밀한 관계를 이미 맺고 있었다. 편지에는 '5분 뒤 역으로 나와'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만으로도 둘의 관계를 끝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또다시 '레인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두 종류의 인간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왕성하고 행복해서 반죽할 덩어리가 차고 넘치는 사람으로 죽음을 상상하지 못하는 부류이다. 둘은 자기 머리에 난 창백하고 붉은 구멍을 언제라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다. 이 극단적인 성향 중에 오르페우스는 어디에서 속할까? 전체 맥락을 따져보면 당연 후자이다. 그리고는 '행복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되오.'라는 불편한 진실을 건넨다.


# 3막

 3막이 되어 진자 운동을 하는 추를 움직이는 건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 즉 '죽음'이다.(그냥 '죽음'이라고 부르겠다) 에우리디스는 공교롭게 찾아온 사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오르페우스는 그녀의 죽음에 슬퍼한다. 그때 비탄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앞에 '죽음'이 나타나 그녀를 살릴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오르페우스에게 2가지 기회를 주는데, 하나의 기회는 그녀와 재회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머지 기회는 그녀와 재회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이다. 지나간 사랑에 후회하는 사람은 당연히 재회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허나 죽음은 왜 재회하지 않을 기회를 선택지로 제시했을까? 죽음은 오르페우스에게 "죽음의 문 앞까지 데려왔는데 궁금한 게 애인 뿐이라고?"라며 그의 에우리디스를 향한 일관적인 태도를 비방하기에 이르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그의 마음은 에우리디스와의 재회를 아무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란 고통의 시작이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는커녕 에우리디스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는 그녀를 갈망하지 못하게 한다. 그의 불신이 구체화된 계기는 에우리디스와 극단장의 관계이며, 그 둘의 은밀한 점을 의심하게 됨으로써 그와 에우리디스와의 사랑의 무대가 펼쳐질 수 있는 믿음이라는 토대가 흔들리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이미지를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의 얼굴을 마주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에우리디스는 오르페우스에게 매달리지만 오르페우스는 끝내 에우리디스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를 다시 죽이게 된다. 여기서 이 죽음은 실제로 죽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단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관계의 단절로써 오르페우스가 더 이상 그녀를 신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닌 존재적 차원에서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며 그 대가란, 거기에 관계된 기억은 모조리 무상해지며 고통이라는 삶의 잔여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해서 무엇하겠는가?- 그에게 요청되기 시작한 건 되돌릴 수 없는 일 앞에서의 의연함이었지만 그는 실패하고 만다. 이 실패 앞에서 '죽음'이 건넨 비밀인 '죽음의 비밀이란 끔찍하게 착하다는 것' 또한 오르페우스가 겪는 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무이한 탈출구를 의미한다.


# 4막

 오르페우스는 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아버지와 만나게 됨으로써 장님이었던 오르페우스는 다시 시각을 찾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하다. 에우리디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후회한다. 그러면서 허탈함에 빠진 오르페우스에게 죽음이 다시 등장한다. 그러면서 둘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죽음은 오르페우스에게 아버지가 꽤 좋은 분 같다며 아버지와 함께하라고 권고한다. 드디어 여기서 명확해지는 점은 계속 '죽음'이라고 칭한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의 정체는 사실 앙트완의 내면의 암시이다. 오르페우스는 앙트완의 대상화된 주체이며 '죽음'은 표상할 수 없는 절대적 주체로서, 그 둘의 관계는 주체-주체의 관계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즉 1막부터 계속 등장하던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는 오르페우스의 내면의 암시이며 현실적으로는 앙트완의 의지이다. 이 사실이 명료해지는 답변은 죽음의 말이다. '누구한테 소릴 지르냐, 자네? 아니면 나?' 그리하여 극의 마지막은 신화의 내용대로 오르페우스도 죽게 됨으로써 끝이 난다. 영화에선 죽음으로써 그 둘이 드디어 함께 있게 되었다고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시적인 범주에서 허용될 뿐인 문장이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처럼 나란히 무덤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죽고 나서 함께 한다는 것을 현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허나 운명적 부름에 의해 말해지고 있는 바는 스스로 그 기억이 전가하는 고통스러움의 패착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미 영화에서는 내도록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기억과 그것의 범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극의 상연이 끝이 난 뒤 앙트완은 멀쩡히 걸어서 나오고 옛 동료들에게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것을 집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는데 이는 일종의 안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 앙트완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따라 죽기로 결심하면서 걸었던 숲을 지나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유명 극작가의 생은 갑작스럽게 끝이 난다. 반전을 사랑하는 취향인 앙트완이 죽음으로써 더이상 그 취향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진짜 유고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지인들은 앙트완의 반전 없는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슬픔이 끝에 다다른 지점에 그 슬픔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한 인물이 등장한다. 실로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그득하다. 앙트완의 유고작에 등장했던 여배우가 그의 무덤에 찾아왔다. 그 여배우가 앙트완의 에우리디스, 그의 실패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실들은 이미 간접적으로나마 언급되었다. 영화 도입부에서 집사의 말에 이 사실이 모두 담겨 있다. 집사는 앙트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바로 코 앞에서 지켜보던 인물이기에 그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집사의 말이 앙트완의 죽음의 이유를 말해준다.


 앙트완의 집은 근사했죠. 마치 집착 같이 한 장소에 꽂히면 꼭 기거 집을 사야 했죠.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심해져 새 집을 사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굴었어요.
 앙트완처럼 그의 건물들도 하나같이 철저히 구분되어 잇었어요. 몇 번의 실패한 관계 끝에 그에게 남은 건 베르사이유의 저택과, 레리고르의 성, 깐느의 빌라, 그중에 압권은 세느 강의 수상 가옥이었죠. 25살 연하의 젊은 여자와 거기 살다 보니 이런 고지대에 오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작년에 그녀가 떠난 뒤로 모든 게 시들해졌죠. 혼자 몇 달밖에 못 살 집을 굳이 사고 싶지 않았겠죠.

"불쌍한 앙트완"


 그래서 앙트완이 자살을 택하게 만든 병명은 상사병이다. 그녀와의 기억은 그를 항상 괴롭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것들이며 유일하게 그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헤어지는 순간 앙트완에게 죽음이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멍청한 자식!- 한 여자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의 오해와 선택적 실수 때문에 진실된 사랑을 떠나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앙트완의 극 '에우리디스'이다. 우리가 본 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그녀를 외면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한 남자의 가련함이다. 허나 모든 것들이 허구이며 상징으로 범벅되어 있는 이야기를 본 관객들은 그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을 가늠하지 못한다. 이 무능은 관객들의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관람하게 될 때 애초에 '허구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몰입하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처럼 이 근본적 바탕이 되는 인식으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앙트완의 극은 그의 사랑이 실패함에 따라 얻은 고통스러움을 승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동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다. 영화 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날 볼 수 있나요? 그래요. 당신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 없이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마침내 함께 있게 되었다'


 라캉의 말마따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지 피우지 않았는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병적인 의심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극에선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의 사랑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으며 결국 사랑이 진실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진실과는 관계없이, 오르페우스의 의심은 병적이었고 그것이 앙트완의 죽음으로 이끈 불가항력적 힘이다. 뭐, 정신분석의 설명 방법이 신화적인 이야기를 개념화시키거나-영화에서처럼-, 고의적으로 악질적이게 보이는 철학적 용어들이다 보니 이것이 허구적 장르에서만 쓰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여기서의 운명이란 영화에서처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긴 힘들다는 비일상성과 체험 불가능하지만 실재적인 것인 '죽음'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불편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주변에서 '짜증 나서 죽고 싶다'라는 정도의 가벼운 실언을 뱉는 것을 듣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떠올린다면 인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지루하다가 그 결말을 보고선 끝까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역시나 프랑스인이었다. 조금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앙트완을 보고 느낀 안타까운 감정은 그가 너무 늙어버렸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자신에게 '나는 아직 젊어!'라는 부적절한 암시를 주는 건 스스로 더 애처롭게 만드는 행위일 뿐이데도 그는 그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만약 스스로 생각할 때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직 젊다'라는 말을 화장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건네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그 일을 관두도록 하자. '나이'에 관한 사회적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며 근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발판이 될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 자체는 이미 신경증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뭘 하려고 하던 지 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니 굳이 나이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건네야 하는 암시를 주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싶다. 그런 시도를 애써 유지하려는 사람은 니체와 같은 무모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모종의 고통을 유발하는 여전히 모호한 질문이 있는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에 애걸복걸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전혀 모르겠다.


 ps. 솔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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