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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r 13. 2020

감정 과잉의 시대, 반지하 가족이 불러온 촌극

<기생충> 자본주의적 유대의 실패 (스포주의)

 '감정 과잉'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반영된 시대는 양차세계대전 전후의 상황일 것이다. 그 때가 현시대보다도 더 감정적인 시대이다. 그 시대 이후 '윤리'라는 것이 허울이며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지칭이 무산되게 되었다. 인간은 참혹한 상황 앞에 마주하게 되면 도덕은 더 이상 진정성을 갖지 못한다. 진실의 자리는 오롯이 외관에 위치한 야만성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인간에 의해 발생한 공포가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며,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유일한 지침은 거대한 세력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정론이 되었다. 평화 자체가 목적이 아닌 세력들 간의 균형이 유지됨에 따라 얻어지는 일종의 부산물로서의 평화 말이다. 이 거대한 힘 앞에 선 약자 어떤 괴기스러운 것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땅을 파고 머리만 집어넣는 동물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옆에 바짝 다가와 있다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또는 무관심한 척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결과란 비참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그 행동은 익살스럽고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행동을 취하는 이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땅 깊숙이 머리를 박아 넣는 것이며 그때 인간은 행운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화 속 다송은 방금 적은 글의 내용에 꽤나 부합하는 인물이다. 다송의 어린 마음에서 비롯한 그 순수성이라 함은 예민한 후각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으로 대변된다. 다송이 연교가 생각하는 것만큼 천재인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의미심장하다. 연교와 기우의 첫 만남에서 연교는 다송의 그림을 기우에게 보여준다. 기우는 그 그림을 보고 '원숭이'라고 추론한다. 그러자 연교는 그 그림이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누구의 말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둘 다 옳다. 연교의 말대로 다송의 그림은 자신의 내면을 흰 도화지 위에 투사한 것이다. 그리고 기우의 말대로 다송의 그림은 원숭이다. 원숭이란 인간의 원시적 조상으로 그들 개인과 개인이 속한 집단을 지배하는 일반 정서는 공포였다. 다송은 어릴 때 지하 방공호에서 몰래 올라온 근세의 존재를 이미 눈치챘으며, 근세는 다송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즉 다송은 가장 원시의 감정에 의해 원초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런 다송이 취하는 행동들은 기택네 가족에게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연교와 기우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거실로 다송의 장난감 화살이 날아든다. 기택과 기우와 기정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거실 탁자 밑에 숨게 되었을 때, 다송은 비가 억수로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미제 인디언 텐트를 친다.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다송의 후각은 공포스러운 것을 감지한 것이다. 또한 기정이 다송의 미술 과외 선생으로 오게 되었을 때, 천방지축이었던 아이가 얌전하고 예의 바른 아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다송은 공포의 감정에 굴복당하여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자신을 위장을 한 것이다. 다송은 기택과 기정 그리고 충숙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다송의 모든 행위는 놀이로 비칠 뿐이다. 다송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자신의 일도 해내기 벅찬 연약하고 무딘 존재이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분망스러운 투쟁을 지속해 나가며 무언의 신호를 어른들에게 보낸다 할지라도, 이해심 많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시선을 던지는 부모인 연교와 동익에게는 무상한 기표로만 이해된다. 그렇다면 왜 동익과 연교는 다송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까? 그들이 어른이라서 아이들의 순수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한 번 잃은 순수함은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루소의 말처럼, 그들은 순수하지 않아서 일까? 그들이 다송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순수하지 않은 것이긴 하다만-다송이 갖지 않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사회에 물들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그 무언가란 척도나 기준 아니면 더 엄밀하게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이다. 동익과 연교는 기택네에서 나는 냄새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공포스러운 것이 아닌 혐오스러운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공포가 아니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동익네가 상징의 그물망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택네와 문광네도 동일하다. 물론 다혜는 다송과 마찬가지로 이것과 무관하게 위치하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유행이 된 대사는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일 것이다. 이 말에 비추지 않더라도 세상 살아가는 어느 누구나 계획이라는 것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계획이란 것이 좋은 방향으로, 즉 계획대로 일이 알맞게 진행될 때는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긴 한데, 인간 심리에서의 퇴행이란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발생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최악일 때 함께하라는 격언이 있다.- 가끔 삶에서 방지턱 정도는 있을지언정 거대한 벽이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면 꽤 곤란해지고 무력해지기도 한다.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었던 삶에는 '구김살'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택네는 끊임없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미 기택네가 감당해야 할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부족한 점들을 감추기 급급한 사람들이다. 그를 위해 거짓된 징표로 자신들의 누추한 행색에 분칠을 하기 시작했다. 기우는 4수생 신분을 숨기며 연세대 출신이라고 연교를 속이고, 기정은 일리노이 주립대를 다닌다는 거짓과 함께 온갖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적 용어를 남발했다. 기택 또한 30년 동안 운전기사를 했다고 거짓 자부심으로 자신의 인생 전반을 치장하고, 충숙 또한 있지도 않은 청소 업체의 고급 인력인 척 가장한다. 그들의 거짓된 행보는 아무런 기반도 갖추어지지 않은 밑바닥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다. 언제 파도가 쳐서 이것을 휩쓸어 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다 할만한 근거는 그들이 모두 거짓과 가식이라는 판 위에 위치해 있다는 단순하며 절대적인 사실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거짓을 일삼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비양심적인 인물들이며 기회주의자이다. 이미 영화 도입부에서 '피자시대' 여사장과의 갈등에서 기우와 기정은 친구 민혁을 팔면서 취업을 하려고 한 것에서 그들의 비열한 면모가 드러났으며, 취객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또한 그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 바뀐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 취객이 기택네가 사는 반지하 담장에 소변을 보려 할 때는 기택은 취객을 그냥 놔두라고 하고 기우는 우물쭈물해한다. 기우는 큰 소리를 칠만한 기백이 없다. 그러나 신분 상승의 갈망이 충족되면서 취객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취업에 성공한 후 기택네는 취객을 낙오자로 취급하고 있다. 기우는 취객을 쫓아내기 위해 기세 등등하게 뛰어나가고 기택도 덩달아 신이 나서는 취객에게 물을 뿌린다. 기정은 휴대폰 촬영을 통해 그 상황을 스크린 너머로 바라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가? 휴대폰은 칸막이처럼 기능한다. 칸막이는 취객과 기택네의 심리적 유대감을 끊어내는 실재적인 것이다.


 결국 그들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사기 행각들로 취업을 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왜 그들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날 밤에 계곡 물이 불어나서 동익네가 이른 시간에 귀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가? 그들이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연기 연습를 마다하지 않았던 각고의 노력에 비하면, 비가 와서 계곡물이 불어날 것이라는 자연의 이치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느낀 승리의 쾌감은 그들을 충분히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사건이 터지기 전 그들은 모든 가족들의 취업을 자축하기 위해 동익네를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사용하며 축하주를 한껏 들이킨다. 기택네가 먹는 술은 그들의 계급 상승의 욕망이 고취되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필라이트를 먹던 가족이 아사이를 먹고 다음엔 비싼 양주를 병째로 들이키는 모습은 야망대로 비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비상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취감과 남궁현자의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소여 하는 위상을 알코올의 망각 효과와 함께 아주 일시적으로나마 맘껏 즐기는데, 그런 것들은 그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며 기이한 도취감에 젖어들게 한다. 그들 스스로는 절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감정, 그리고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계획은 더 거창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들의 허무맹랑한 계획은 익살스럽기만 하다. 다송에 대한 질투가 가득한 다혜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우를 비롯한 그들 가족은 동익네와 사돈을 맺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 집이 자신들의 집인 것처럼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상상적인 것은 모래성, 즉 언제 무너져내려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리고 그들의 망상의 결과로써, 그들의 신분을 규정짓고 있는 실재적 공간인 '반지하'라는 터전으로 도망치듯이 내려가는 장면은 그곳이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장소였다는 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어떤 특이한 완력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 힘은 그들을 끌어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밴 냄새는 그들이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그들에게 자유가 있는 목숨은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영화 내에서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남궁현자의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등장인물이 여러 주체의 우월성에 대한 갈망을 표상하는 실증적인 건축물이다. 남궁현자의 예술작품인 집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결과물로 보이면서 그 배후에는 우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찬을 즐기는 기택네들 뿐만 아니라, 문광과 근세가 집주인 내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파고들어 클래식을 틀어 놓고 햇살을 맞으며 춤을 추는 것, 이와 더불어 동익네도 마찬가지로 남궁현자의 기사글을 액자에 담아 걸어 둔 것, 이 세 가족의 행동은 제각각이지만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궁현자 선생의 집은 모든 주체들을 함열하는 상징적 질서의 실증적 건축물로서의 의미 있는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 가족의 의도는 예술적 위상과 자신들을 합치하려는 시도이며 그 방법은 과시와 멸시 그리고 소유로 나타난다. 그 배후에 놓여 있는 남궁현자의 이름이 갖는 예술적 기지와 명예스러움은 누구나 탐낼만한 값어치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비판대에 오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집을 설계하고 축조한 남궁현자 당사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주권은 남궁현자에게만 있다. 반대로 나머지 가족들이 애써 누리려고 벌이는 모든 행동들은 모두 헛된 시도에 불과한데, 이것은 우월성을 탐닉하려고 하는 열등의식의 내면적 징후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동일화 과정에 충실히 임하는 것, 즉 남궁현자를 최대한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에 유일무이하게 무게를 실을 만한 지침이다. 동일자를 포착하고 구성해 내는 것이 이데올로기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집은 동일성이라는 것을 결코 구현할 수 없다는 것에서 이데올로기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함이 드러나는데 이는 항상 간과되고 만다. 이념으로서의 틀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위치해 있는 여러 공간은 그들이 결코 같지 않다는 점을 주지하는 식으로 동일성을 계속해서 해체하고 있다. 이는 그들 각각의 사랑의 행각에서 드러난다. 다송이가 걱정돼 거실 소파에서 사랑을 나눈 동익과 연교의 대화는 동익이 윤기사를 몰지각한 사람으로 의심할 때 남발하던 추리이다. 그 추리는 동익네의 섹스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차량 뒷자석에 떨어져 있던 '싸구려 빤스'를 찾는 동익과 마약을 사달라고 조르는 연교의 저질스러운 이미지가 그들의 사랑이다. 반대로 문광과 근세가 지하 방공호에서 찢긴 콘돔 포장지로 대체된 사랑의 이미지의 그 비루함은 충격적이기만 하다. 무엇이 사랑의 이미지인가?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반지하의 집에서 기택과 충숙의 사랑의 이미지를 상상해 보자. 무엇이 사랑인가? 셋 다 사랑이다. 그들 모두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외면을 장식하며 그들의 입지를 규정짓고 있는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은 '사랑'이라는 동일한 행위를 각각 다른 것으로 해체시켜 의미를 부여해 버린다. 그리고 그 차이에 의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라 할만한 것이 딱히 놓여 있지 않은 듯하다. 기택이 동익이 정해놓은 선을 넘는 질문은 '그래도 아내분 사랑하시죠?'이다. 그러나 앞서 다송과 다혜에게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던 상징성의 토대는 세 가족의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위치한 곳은 어디인가?


 서사에서의 감정선이 절정에 치달을 때, 기택이 동익을 찌르게 된 연유를 단순히 보면 동익이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응당한 분노의 대가를 치르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분노에는 각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인간이 분노를 하게 될 때에는 단순하게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놓여 있을 뿐이지만 이 분노는 동일화 과정의 실패를 의미한다. 기택이 동익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는 일명 '믿음의 벨트'가 작동하고 있을 때엔 절대 분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은 너무나도 쉽게 부서지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에서 다송의 생일 파티를 위해 인디언 분장을 한 동익과 기택의 대화에서 동익은 '주말 수당'에 대해 들먹이며 기택에게 임금에 대한 노동을 제대로 수행할 것을 요청한다. 동익에게 기택의 존재란 자기 자신이 더 유려하고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보증 정도이다. 우리는 쉬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 속에서 쉽게 질투하기도 하고 그만큼 쉽게 안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익이 근세를 보고 코를 틀어막는 행위는 기택의 의심이 구체화되는 지점이다. 즉 기택이 동익과 동일선상에서 연대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기택은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른 분노에 의해 칼을 집어 들게 되고 동익에게 돌진해 가슴팍에 칼을 꽂는다. 그 실재성의 날카로움이란 동익이 찔려 죽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의 휘어지게 만드는 효과이다. 실재성은 상징적 질서를 왜곡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 칼날은 가슴팍을 뚫은 것과 동시에 양자 간의 믿음을 구현하던 사슬을 끊어내기에 이른다. 그로써, 그들이 애써 서로에 대한 가식을 감추기 위해서만 사용되던 유대가 박살나 버렸다. 다시 묻기를, 그래서 그 유대란 것이 뭐냐고? '주말 수당'이다. 기택이 받은 임금의 액수이다. 자본주의의 돈의 논리이다. 동익이 죽게 된 온전한 이유는 기택의 분노가 아니다. 동익의 잘못도 있다. 기택에게 수당을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쳐 주었다면 기택이 그 순간을 잘 참아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충분히 합당하게 이해될 만한 사안일 것이다. 기택과 동익의 유대는 기택이 동익에게 받는 수당 만큼 아주 빈약하게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상징적 토대가 무너짐에 따라 상상적인 것들은 모두 폐기 처분된다. 일찌감치 파국을 맞은 문광네, 그리고 동익이 죽음에 따라 연교의 자식들은 아비 없이 자라야 한다. 기택네에서 기정은 죽었고 기택은 근세가 살던 지하 방공호로 도망치듯이 쫓겨나고, 그렇게 건강을 자부하던 충숙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기우가 한 달 여만에 깨어났을 땐 모든 것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기우가 꿈꾸던 것들도 무산된 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잠잠해져 있었다. 미시적으로만 상징성들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항상 계획에 대해 묻는다. 계획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거창하던 미미하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것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인간이 허무감이나 공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익숙하게 자리 잡은 방식이다. 허나 폭우로 인해 체육관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을 때 갖은 고초를 겪은 기택의 몸에 쌓인 피로는 자연스레 무력감으로 기택을 인도하며 그는 더 이상 계획이란 것을 세우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계획이 없으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이다.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기피해야 할 문제적 감정과는 결코 맞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이란 것은 이것에 투여된 상상적 힘이 크면 클수록 실패했을 때 실망감과 분노는 더 가혹하고 무자비한 징벌의 효과를 안겨 준다. 그것이 폭발한 것이 동익에게 향한 질투였고 그 근간은 열등의식이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어떤 연유에서든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는 사이코패스에게서 나타나는 성격 유형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충동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미래의 시간대를 떠올리질 못한다. 즉 무계획이 그들의 계획이다.


 그래서 이 글들을 통해 무엇을 이해하는가? 지금의 '자유시장'의 개념을 아무리 버릴 수 없는 것이라 치부하더라도, 이 허구의 창작물에 등장한 인물은 현실에서도 종종 등장할 수 있으며, 영화 상에서 보여준 주체와 타자의 대결구도는 사회의 긴장 상태를 이해하게끔 돕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은 이것을 해결하기는커녕 더 부풀리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적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진화론에서의 '자연선택' 개념을 끌어와 약자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는 논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이것이 자본주의에 적용되는 논리라는 점을 꽤 익숙하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 선택의 결과란 무엇인가? 동익과 근세가 죽고 기택이 지하 방공호의 주인이 되면서 근세 대신 꺼림칙한 생활을 대신 영위하게 되었다. 그렇다. 살아남은 개체가 강한 개체라는 말마따나 모든 인간적 자질을 무시한 기택이 가장 강한 자가 되었다. 그래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전체 구조에서 가장 음침한 사각지대로 도망치게 된 기택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죄의식을 갖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비-도덕적이며 가식적인 인간이다. 기택의 죄의식은 자신이 죽인 박사장에게만 향하고 문광의 시체를 수목장 해주면서 '이 정도면 나도 최선을 다 한 거지. X발'이라며 싫증을 낸다. 여전히 문광과 근세는 그들에게 귀찮고 불필요하며 하찮은 존재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대에 오르게 한 하나의 화두는 피지배계급의 '도덕적 우월성'이다. -빈자들은 선한 사람들인가?- 오래 전부터 대게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찬사 받았다. 그래서 이 사회적 인식은 보통 정도의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치켜세우는 흔한 활로로 이용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근본적인 성향에 의해 착한 척을 하는 것을 망성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행동은 의존적이려는 갈망으로 쉽게 이해되는 터라, 자기애적 편향의 가장 적절한 사례로 보일 뿐이다.


 기우의 목표는 과오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자신이 책임질 수 없었던 일로 인한 상실을 메우기 위한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기우는 굴러들어 온 운에 의존하는 나약한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꼭두새벽부터 전단지를 돌린다. 그런 기우가 기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하다 할만한 깨우침을 얻은 것은 아니다. 기택네는 원래 돈을 벌려고 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근본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이 대목은 '근본=돈'이라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 사회의 공식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건 인륜적인 애정이 아닌 돈의 논리이다. 전체 시민 연대를 이끌어 내는 상징적 질서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나 정서적 교감을 추구하는 것도 있겠지만, '돈'이 항상 모든 것들의 우위에서 우선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이념은 '물신주의'나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문제 삼을 수도 없고 문제 삼을 생각조차 없다. 딱히 잘못된 것이 없기 때문일까? 뭐, 누구나 기우처럼 기회가 찾아오면 붙잡으려고 안 간 애를 쓸 것이며 잡은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기우가 잠에서 깨어나 형사 같지 않은 형사와 의사 같지 않은 의사를 보고 웃은 이유에는-일종의 조소처럼 보이긴 하다만-약간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그들의 행색이 자신이 벌인 어설픈 짓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뉴스를 보면서는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고 동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기택 가족이 취객을 휴대폰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세 가족의 불운한 촌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일 뿐이다.


 가장 문제적인 감정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견되는 가장 흔한 오류인 혐오와 그에 응하는 질투이다. 현재 가장 만연해 있는 감정이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작금의 세태를 양차세계대전 전후의 상황에 비한다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 상황이라는 것이 혐오가 극에 다다른 상태인데 현재는 그것보다는 괜찮지 않은가? 그러나 그 정도에서는 미약한 수준이라 할지라도 이 미묘한 긴장은 불특정 대상을 파괴시키도록 이끈다. 그리고 내부적 압력이 상징성의 임계치를 돌파하는 순간은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 된다. 이는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때에나 상상 가능한 것이다 보니, 그렇기 때문에 망상적 결과물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오묘한 점이 발견된다. 기택네가 축하 파티를 벌였을 때의 그 상상의 심급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들이 동익네가 자신들의 사돈이 될 수 있다는 괴이한 상상 말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항상 기죽어 있던 가족들의 면모는 사라지고 어느 시점부터 그들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상상은 별 볼 일 없었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나 가능해지는 것이 창조적 행위의 근원인 인간의 상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행동이 꽤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불안하거나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잠재 의식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유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평화라는 건 반드시 그 구색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의 평화든 아니면 내면의 평화든지 말이다.


 내 주변 친구들이 종종 말하는데, 자신들은 돈을 충분히 많이 벌어서 그 벌어놓은 돈으로 나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거라고 한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만약 그렇다면 현재는 꽤 문제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인의 사적인 욕망에 훼방을 놓을 하등 이유가 없기에 교의적인 말을 늘어 놓는 건 삼가하겠다. 그리고 나는 순진무구한 낙관주의자니까, 기우가 성공해서 기택과 재회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겠다.


 ps. 뒤늦은 감상이지만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아 적게 된 주관적인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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