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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12. 2020

타노스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건네는 비판

<어벤저스 :  엔드게임> 배부른 돼지들의 철학 아닌 철학 (스포주의)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가 막을 내린 후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 여운에 수많은 글과 영상이 쏟아져 나왔다. 마블을 웬만큼 챙겨보긴 하지만 영화를 애써 찾지는 않는 입장이다 보니 종편을 본 것은 아니다. 물론 쏟아져 나오는 스포일러를 통해 아이언맨이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니 아이언맨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타노스의 인기(?)도 덩달아 오른 듯하다.


 나는 인터넷 댓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가상의 공간인 만큼 댓글들은 아주 솔직하다. 현실에서 하지 못한 말들도 그곳에서는 가능한 것이 꽤 매력적이게 보이기 까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무책임한 말을 뱉는 사람들도 많이 보여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다. 그러면서 한나 아렌트가 양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의 원인을 '무사유'에서 찾은 것처럼, '그런 사람들은 생각이란 걸 하고는 살까?'라는 잡념에 시달린다. 그 잡념들의 주인들은 타노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입에는 인구수가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개체수보다 초과 상태이니 영화에서처럼 인구의 절반을 날려버려야 한다는 둥, 아니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전쟁이라도 나야 한다는 말을 뱉고 있다. 그들의 말은 장난 삼아 던진 말에 불과한가? 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탓인가? '진지충'이라는 표현이 진지한 사람들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나타날 때 쓰는 부정적 표현인데, '진지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 쓰는 태도나 행동 따위가 참되고 착실하다'이다. 고로 진지함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의미와 대립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택할 진 여전히 의문스럽다.- 전쟁 상황이라는 그 극단적 폭력과 비극 앞에서 한없이 가련하고 나약해지는 인간으로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기도하는 것이 더 옳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3가지 관점 정도로 축약할 수 있다.


1. 이성의 간지

2. 허무주의

3. 공리주의


 첫 번째의 경우, 헤겔의 역사철학에서의 개념에 따라 타노스는 역사 속에서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필연적 주체였다. 그의 대사인 'I am inevitable'에서 보이듯이 그가 역사의 부름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타노스는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로 역사의 종말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청년 헤겔이 지목한 인물은 '나폴레옹'이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보고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을 남겼다. 그러나 헤겔은 희망으로 바라본 나폴레옹이 권력욕에 찌들어 가는 것에 실망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헤겔은 인간의 결점을 두둔할 수 없지만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것마저도 아우르는 가장 격상된 상태인 '절대정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의 경우,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전제를 항상 밑바탕에 깔아 두지만, 혹여나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타노스를 옹호할 만하다. 삶이란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타노스의 행보조차 세상의 이치(?)에 걸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는 옹호한다기보다는 그냥 무관심한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의 노자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냉정하고 가혹하다기보단 세상사에 무관심할 뿐이다. 말 한마디를 거드는 것조차 그들에게 귀찮을 따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냥 마음에 불만만 가득 쌓여 희망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자신의 치부를 들키기 싫어 거만하게 구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문제의 심도는 대게 무의식적인데 그 거만함의 원인이란, 어떤 지적인 의식들에서 연유하기는 하되 의존하려는 욕구가 섞인 뒤틀린 욕망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경우는 공리주의를 따른다. 이것은 극단적인 원칙주의인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굳이 집어내자면 '자연선택' 정도일까? 즉 자연의 개체로서 자연스레 일어날 법한 일들이다. 또한 공리주의는 정치 철학에서도 단골인 화두인데, 공리주의의 구호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소수의 희생'이다. 즉 최대 다수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입장 표명이 불명료하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영화 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절반의 생명을 소수의 자리에 위치시킬 수 있다. 특히, 공리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부의 총량을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데, 이를 따를 수 없을 때는 경쟁 -희소성의 원리-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이해하는데 원칙이 아니어도 되는 것들이다. 타노스의 대사처럼 이것은 언제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하며 생활 전반에 있어서 아무런 도덕, 즉 그 어떤 지침도 내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타노스가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렸는데 공리주의의 구호에서의 '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기만 하다.


 굳이 셋을 구분하긴 했지만, 셋 다 유사하면서도 부정성을 공유한다. 개인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인류가 나아감에 있어 이런 태도를 취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언지해주길 부탁한다)


 이런 관점들에 비롯해서 가상의 공간에서 무책임하게 말을 뱉는 사람들은 위선자일 뿐이다. 이런 입장들을 그들만의 도덕적 원칙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절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위선을 제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위선적이지 않으려면 그들의 말을 실천하면 된다. 즉 지구의 인구를 줄여야 할 필요성을 주창한다면 그들의 말에 따라 솔선수범을 보이면 된다. 그들의 죽음은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노스의 게임에 참여하기도 싫은 사람들을 억지로 게임에 끌어들여 주사위를 굴릴 뿐이다. (그래서 타노스는 왜 자기는 절반에 포함 안 시킨 건데? 그러면 영화가 시시하게 끝을 맺어버릴 테니!)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런 비관적인 태도를 역사 속의 지성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구론>을 쓴 맬서스는 앞으로의 인류가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식량난에 허덕일 것이고 그로 인해 투쟁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 예언했다. 이런 비관론을 내세운 맬서스는 살아생전에 수많은 비판에 시달렸으며 그의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것처럼 세계의 인구는 100억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먹거리는 더욱 풍성해지고 과학자들이 대체 자원까지 연구하고 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적중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맬서스의 주장대로 인류는 점점 투쟁 상태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게 강조해야 할 점은 이런 비관에 맞서는 자들만이 미세한 박동을 통해 인류의 진전을 이루었다. 가장 좋은 예시는 '아이언 맨'의 실제 모델인 '엘론 머스크'이다. 왜 엘론 머스크는 화성을 식민지화하려고 할까? 그는 왜 전기 자동차를 만들고 우주에 발사체를 쏘아 보낼까? 그의 상상이 성공적일 수 있다면 맬서스의 비관은 기우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엘론 머스크는 화성에 도시를 세우려는 꿈을 꾸기 전에 한 번 즈음은 인류가 처한 상황을 비관했을 것이다. 비관적인 마음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삶의 문젯거리에 집요하고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가? 그리고 엘론 머스크가 그 반응에 이끌려 마주한 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비관주의자들은 별의 비밀을 발견해낸 적도 없고,
지도에 없는 땅을 향해 항해한 적도 없으며,
영혼을 위한 새로운 천국을 열어준 적도 없다.
-헬렌 켈러-


 <아이언맨> 1편부터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토니가 어떤 심경 변화를 이룩해 왔는지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편에서는 전쟁광이라 불린 토니 스타크는 강인한 힘만이 평화로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무기 개발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일련의 사건들 마주했고 <시빌 워>에서는 필연적 희생을 막으려면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반대급부를 형성한 캡틴 아메리카와 대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의 결말에서 보이듯 그 끝은 스스로가 희생의 주체가 되었다. -그가 진정한 '이성'이며 필연이다- 이 연역은 나에게 자연스럽기만 하다. 이 생각은 무엇이 인류를 보전하고 진보시켜 왔는가?라는 의문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연역일 뿐이다. 현재 인류의 존속은 어떤 이데올로기적 환영들이 아닌 실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희생적 양태가 주축이 되었었다.


 우리는 희생하는 자들을 기념해야 한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기념할 대상의 잠재성을 식별할 수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희생하도록 이끄는가? 희생하는 자들은 왜 희생을 하는가? '희생하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확실히 안다'는 니체의 말마따나 그런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의문들을 반년 전에 던졌었는데 지금껏 아무런 진전은 없다.


 ps. 헤겔의 저서는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고 공리주의에 관련된 생각은 1년도 더 전에 이해하지 않고 읽기만 한 롤스의 <정의론>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영화도 보지 않고 간략한 영상들을 보고 적은 글이다. 참조점으로도 삼기 힘든 텍스트이니, 푸념거리 정도라 생각하고 너그럽게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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