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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Dec 17. 2019

넷플릭스 연재 드라마 '종이의 집'에 대한 냉소

<종이의 집> 종이에 대한 사적인 생각들 및 입장

 이 글은 최근에 정주를 마친 넷플릭스 연재 드라마 '종이의 집'에 대한 간략한(?) 사견이다. 글의 제목대로 제목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이며, 기본적인 골자는 '종이'의 기능과 성질에 따른 기술이 될 터이다. 일단 간략하게 드라마의 세부 내용에 대해 적자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과 선악의 담론을 중축으로 이야기가 개진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저항을 몸소 담아내는 '강도짓'과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인간적이라는 점-일상적이라 해도 무방한-이 드라마의 흥미 요소이다.


 자본주의는 돈의 논리를 근간으로 하는 이념이라고 한다면 너무 협소한 정의로 치부하는 것인가? 자본주의는 절대로 온전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노력의 숭고함을 절대적으로 숭상하는 이념이며 인간 사회는 이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그와는 반대급부에 있는 나라들과 과거의 영광조차 되지 못하는 '소련'을 떠올려 보라. 소련이 문을 닫은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소련은 '무임승차자'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국가는 거대한 사회 실험이었다. 실험의 주도자는 마르크스와 그의 제자인 레닌 그리고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나는 마르크스가 주창한 사상의 실패 지점을 인간을 너무 선하게 봤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인간의 나태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 성질로 '선'의 자리를 꾀차는 관념적 개념은 '희생'이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선하다고 판단하며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를 존경하는 사람은 존경의 대상보다 덜 이타적인 사람이다. 존경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핍과 자신에게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표이다. 아주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돈이 많은 사람을 존경한다고 할 때, 만약 본인에게 돈이 많다면 돈이 많은 사람을 존경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인간적인 존중과 존경을 헷갈리진 말자) 강요된 희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표상되는 것은 전체주의이다. 이 문제는 일상적이다. 우리는 같은 임금을 으면서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다. 그 화라는 감정이 주관적인 고통에 편승해 있는 것이지만, 아주 간단한 예로, 조별과제를 하면서 무임승차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화가 나는가? 보상이란 차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르크스의 실패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때로는 '평등'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분노를 냉소로 대체하는 심급일 뿐이다. 이 사유의 보충물로서의 라이프니치의 권위는 지금의 냉소를 합당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지평을 열어 놓는다. 지금 이 순간이 결합 가능한 모든 것들이 최선에 도달한 상태이며, 현재보다 더 나은 과거는 없다는 그의 주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과거에의 집착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분명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 보면 현재의 불만이란 감사함을 망각한 비루함일 뿐이다. 그렇기에 세계 어느 곳에라도 '자유'라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위배한다고 여겨지면 심각한 문제로 치부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게 되었다. 모든 반사회성은 역사적 실패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금기시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합리론에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 수 있다면 양차 세계 대전 또한 '최선에 도달한 상태'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조차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사태였다고 한다면 합리론의 무책임한 변명에 방점을 찍어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상황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 허무주의자이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적 질서에 대한 더 세밀한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뭐, 동양의 죽은 철학으로 분류되는 '주역' 쯤을 끌고 와야 할 판이다. 공자가 아침에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 책 말이다. 여기서는 이 학문이 인간의 지각 수준을 넘어선 초감상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을 정리하면, 자본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분노할 수 있을지언정, 이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는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드라마는 이런 문제적인 사태를 풍자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인물들은 각자가 굉장히 매력적인 사연을 들고 있다. 골통 좀도둑 부자인 모스크바와 덴버, 다혈질적이며 거침없는 도쿄와 천재 해커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순수한 청년 리우, 시대의 신여성을 상징하는 나이로비, 군인이자 동성애자인 헬싱키와 그의 전우인 오슬로, 그리고 오직 원칙만을 따르는 냉혈한 사이코패스인 베를린, 실질적인 수뇌부이자 단 하나의 오점마저도 예측하려고 드는 이상적 합리론자 교수. 그들의 조우는 유쾌하고 호탕한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문제적인 인물들이다. 범법자인 건 물론이거니와,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미혼모, 사이코패스, 히키코모리 등등은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들은 사회의 부랑아일 뿐이다.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이해의 원 외부로 튕겨져 나간 존재들이다. 즉 사회의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인 인물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강도짓이나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 빠져든다. 마치, 드라마에서 언급한 '스톡홀름 증후군'을 시청자에게 유발하는 것이 작가들의 의도인 마냥, 그들이 조마조마한 짓을 벌일 때마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하지만 이 증후군을 도외시하고서라도 그들이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들은 통념적으로 나쁜 짓을 하긴 하되, 결코 절대악을 실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성 탈출> 시리즈 1편에서 시저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듯이, 그들은 강도짓을 벌이되 결코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상대적으로 절대악의 자리에 살인 행위를 놓는다면 그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들은 선하다고 할 수 있다. 덜 악하다는 뜻과 동일하다. 강도짓이 나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여담이 좀 많이 길었는데, 제목의 상징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1. 조폐국 

 종이의 의미는 '화폐'이며, '종이의 집'이라는 표현 그 자체로 빗대어 보면 조폐국을 연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폐국은 자본주의의 근간이 된다. 자본주의의 밑바탕에 피처럼 순환되어야 하는 화폐를 생산하는 곳이자 통화량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기능적 측면의 실천적 영역을 현현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강도짓을 벌이는 배경이 된다. 강도의 클리셰 정도로, 그런 짓을 하기 좋다고 지목되는 곳으로 은행을 떠올리기가 쉽다. 그런데 조폐국을 선택한 것은 그 클리셰를 깨부수는 것과 함께 자본주의의 근간 자체를 흔들어 버린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그들이 작전 회의에서 모형 '종이의 집(조폐국)'을 보면서 범행을 도모하는 연출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 연출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듯이 조폐국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며, 모형일 뿐이더라도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관망하면서 살피는 시선들은 그들이 한수 위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교수가 협상을 할 때마다 고전적인 취미인 종이 접기를 하는 습관적인 행동도 그 시선의 의미를 더욱 강조한다. 종이로 자신이 원하는 모형을 접는 행위로써, 즉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마음껏 연출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으로 환원되는 것이 그의 취미인 것이다.


2. 강도짓, 그들의 계획 

 집을 만들 때는 콘크리트와 철근이 필요하다. 철근은 집의 토대로 전체 무게를 지탱하며 콘크리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성질을 갖고 있어 안전한 집을 짓기 위해 안성맞춤인 재료이다. 그런데 종이로 만든 집을 상상해 보라. 그 집은 얼마나 위태롭기 그지없는가? 그것은 언제나 쉽게 부서지기 쉽다는 관념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면 강도짓을 벌이면서 그들이 얼마나 많이 위태로운 상황들을 연출하는가? 교수의 엄밀한 계획에 비해 실제로 조폐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들 간의 미묘한 갈등과 그것을 무마시키는 도둑의 도의를 보여준다.(사족 : 도의란, 만약 범법 집단이 모두 사이코패스들이라고 한다면 그 집단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도 의로움이 존재한다) 그들이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정부 및 공권력과 대치하는 상황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데로 그 위태로움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이다. 그들이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교수가 정해 놓은 규율을 어기고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하려 하며 항상 위험이 수반된다. 그리고 강도짓을 하면서도 그들의 이해관계가 틀어지는 것도 부지기수이다. 경영학적으로는 협업을 할 때 개인의 감정이 아닌 공통의 목표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그들의 갈등은 항상 불필요한 노동을 요청할 뿐이다. 인간의 정념이란 항상 충동의 자리에서 환원되기 십상이다. 이는 이상적 이성주의자인 교수조차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 또한 리비도의 충동에 의해 그가 금기시했던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3. 이데올로기적인 의미

 드라마에서 연신 강조되는 점은 교수가 자신들을 단순히 강도가 아닌 '저항군'으로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저항하는 세력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잘못된 점을 집어내고 전복시키는 혁명가들이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나치들에게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군가를 부른다. 스스로의 의미를 격상시키는 행위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은 그들 스스로를 반항아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이념 자체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질들 중 조폐국의 우두머리인 아르투르와의 미묘한 신경전은 이 사실을 함축한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사회의 근간이며 절대다수를 대변하는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그리고 주인공 강도들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발생시키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는 그들과 대치하면서 인질들에게 훼방을 놓기 위한 행동들을 요청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겁쟁이라는 것이다. 아르투르가 선두로 나서는 법은 절대 없다. 항상 뒤에서 누군가를 부추겨서 행동하도록 만드는 재담꾼으로의 기질은 충분하지만 자신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극도로 기피하는 이기주의자이다. 그는 대타자에 접근한 존재로 이해되지만 그 속에서의 위선은 언제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리고 실재적으로 대타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주체란 없다. 대타자는 주권적인 믿음으로 이행되는 관념이다. 그 자리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할 순 있겠지만, 한 명의 주체가 완전한 대리인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대타자인 주체라는 오류는 마치, 루이 14세가 '왕권신수설'에 따라 자신이 '신' 또는 신의 대리인이라 형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이 되는가? 현대판으로는 대통령은 국민의 일부이며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자리이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아르투르 또한 이념을 숭상할 순 있어도 한 명의 주체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드라마의 배경과 더불어 이것이 스페인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더 의미심장하다. 2012년 스페인에 찾아온 경제 위기 이후 치솟는 실업률과 국가적 디폴트 위기, 그리고 최근에는 스페인의 자본이 많이 투자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불안정은 현재의 위험을 더 고조시킨다. 여전히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보장받기 어려워졌다.


<스포주의>

 그들이 시즌 3에서 1억 4천만 유로라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돈을 도시 상공에 뿌렸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그들이 통화론자라도 되는 것일까? 돈을 뿌림으로써 돈을 주운 사람들은 소득이 늘어났다. 그들 덕에 경제적으로 소비를 진작시키고 부의 양극화로 인해 발생한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했다면서, 강도들은 꽤 합당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강도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중축인 교수는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규범적 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반사회적인 인물이며, 범법 행위를 저지를 대담함과 치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의 소유자이며, 많은 돈을 만지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시즌 3 마지막에서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절대적이고 유일한 이유를 그만두게 되었다. 교수의 이상향으로 절대악을 실현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스스로 깨고 만 것이다. 거대한 힘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과제를 수행했다고 거창하게 포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장용지가 아무리 거창하다 한들 안에 내용물이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즌 4가 언제 나올 진 모르겠지만, 결말은 좋지 못할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결말은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어릴 때의 기억인데, 나는 드라마 <장길산>을 보면서 의적들로 인해 사회적 부조리가 깨끗하게 청산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드라마를 보았다. 그런데 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실패했고 모두 죽게 되었다. 십수년도 더 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어리고 순진무구했던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그 사실이 긍정적인 허무로 다가온다. 혁명의 결과가 부정의 극치에 귀결한다는 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행복한 결말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평범함일 뿐이며 나에게는 따분한 공상에 그치고 만다. 행복을 바란다면 삶에서 혁명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바람은 대타자로 행위한다고 믿는 주체의 오만함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장 자크 루소의 명저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자연 상태'라는 상황을 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 순수한 상태로의 복권을 주창하고 있다. 허나, 그가 말년에 한 번 잃은 순수함을 되찾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허탈한 말을 뱉었다는 건 역설적이게 보인다. 그러나 내 눈에는 사유가 종말 하는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출간 70년 후에 그의 저서는 프랑스혁명의 불씨를 지피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뿐만 아니라 혁명의 주동자였던 로베스 피에르 마저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우리는 문학 작품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의 탈출구를 찾는 듯하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의 이점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내가 항상 구태여 생각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준다거나, 허구적 인물에 대해 생각하면서 실제 만나게 되는 타인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거나, 텍스트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정념의 미묘한 공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문학이란 우울을 덮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직시하기 싫을 때 환영적인 것들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 풍자 또한 억눌린 울분을 어딘가 풀고 싶을 때 의존했었던 허구이지 않는가. 루소의 글이 프랑스혁명이라는 기폭제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조차 의심하는 마당에 텍스트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의구심이 날이 갈수록 커진다. 참고로 나는 혁명이 싫다. 혁명은 필연적인 사태이지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ps. 대학을 다닐 때 강의를 들으면서 혁명보다 혁신이 더 어렵다는 늙은 교수의 말에 반감을 가졌던 것도 앞선 사유에 기초한다. 혁명이 더 어렵다. 왜냐면 혁명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상실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즉 잃을 것도 없을 때 동반되는 두려움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상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고로 혁명은 일어날 확률 자체가 굉장히 희박할 수밖에 없다. 죽는 것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비약일까? 최근에 홍콩 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나와 동년배인 여성이 대학가에서 농성을 벌이면서, '오늘 밤이 나의 삶에서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인터뷰를 봤었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나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족으로, 분노하는 자들만이 나에게 돌을 던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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