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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Dec 11. 2019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의 꿈이 실현 불가능한 이유

<강철의 연금술사 > 라캉적 욕망의 유비 관계와 순수함 (스포주의)

 '꿈'이라는 개념은 주관적으로 꽤 거창한 의미들을 내포한다. 나에게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목표치를 가졌거나 이상하리만치 이상적인 것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사유이다. 이것에 따라 행위했을 때에만 '꿈'의 개념을, 정확히는 '꿈을 꾼다'는 사변적 행위를 충족한다. 그렇다고 내가 꿈이라는 개념에 이런저런 의미부여를 해봤자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신중함도 간과하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기대치를 지닌 모든 인간들에게 이것을 충족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건 당연하다. 또한 이것에 대해 당위성을 논하고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이는 니체 이후로 끝이 났다.


 그러나 아무리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어도 그 속에서는 공통적인 지평이 발견된다. 그것은 '꿈'이라는 것은 항상 실현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 자가당착에 빠진다. 이는 보편적이면서도 다수 사람들의 기대치를 이해하는 좋은 지표가 된다. 다시 말해, 꿈이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존이 깃들어야만이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표란 것에는 존재론적인 해명이 필수적이게 된다. 쉽게 생각해서, 데카르트가 일부러 의심이란 것을 해본 것처럼, 내가 가진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보라. 스스로 나의 꿈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의지의 문제인가? 또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그 꿈을 향해 어가는 건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 역설을 감당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를 거침없이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외경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 예시로 적당한 인물은 '공자'이기 때문이다. 비참함이 극에 달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은 '공자'를 '불가능을 알면서도 하는 자'라고 불렀다. 이 수식어에 조소가 섞여있다 한들, 내 눈에는 극존칭으로 밖에 안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 본 일본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은 저 수사가 꽤 어울린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 명작의 반열에 오른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에드워드 엘릭과 알폰스의 목표는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이다. 일단 간략하게 그들의 능력인 연금술에 대해 설명하자면, 연금술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가령, 나무의자를 만드는 데는 그것의 원재료인 나무 또는 나무 재질의 성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돌을 얻게 되면 아무런 대가 없이 연금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마냥, 원재료가 없어도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엄밀히 표현하면 그 돌을 대가로 나무의자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를 환기해야 할 점은 엘릭이 종종 입 밖으로 뱉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연금술의 원리이며, 곧 실재적인 질서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종속적이면서 불가침적 조약으로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이해된다. 이 법칙에 의해 연금술은 창조적 행위의 일종이긴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이 기술은 어떤 성분의 변형이다. 그 변형은 원래 있던 분자의 구조적 질서를 바꾼 후 재생성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현자의 돌'을 원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대가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려고 하는 것은 엘릭의 잃어버린 팔과 다리, 그리고 동생 알폰스의 신체이다. 그들은 인체를 연성하기 위해 그 법칙에 따라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가진 신체적 결함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둘 다 멀쩡한 신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법적이며 또한 실재적 질서에 거역하는 잘못된 일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죽은 엄마를 되살리려고 한 것이다. 엄마의 죽음은 그들의 비애가 시작된 지점이며, 죽음에 대한 저항 정신,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이름이다.


 그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어떤 고난의 순간에 봉착하더라도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적인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고통마저도 쾌락 원칙에 종용되는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충동으로 이해된다. 그 행위의 결과는 엄마를 다시 되돌리기는 했는데, 눈 앞에는 끔찍하고 기괴하게 뒤틀린 형체로서의 실패물만 있었고 실패의 대가로 그들의 신체를 잃고 말았다. 그 지점은 상실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욕망이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그들의 여정 전체는 순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이 아닌 과거 자체를 되돌리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의식의 추동력이라 할 수 있으며 거세된 흔적에서 환원되는 장이며 주체의 환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결코 데카르트적 코기토로 포착해낼 수 없는 은밀한 지점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이미 '불가능'이라는 성질이 존속해 있다. 여기서 불가능 개념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불가능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에 대한 추궁이다. 우리에게 진실이 필요한 이유는 불가능을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래야만 가능한 것이 무엇인 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형제의 결핍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무의식 개념을 개인의 역사성에 기초해 있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 정의에 말미암으면 에드워드 형제가 그 돌을 찾고자 하는 여정 또한 과거의 잘못에서 출발했다는 것으로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다. 이는 반성적 사고의 일환으로 보인다. 반성이란 하려고 하던 일이 본연의 의도에 어긋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며 그 어긋남에 의해 발생한 균열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식적 행위가 아닌가. 반성적 사고가 과거로부터 거슬러 온 실재적 힘이라는 것은 합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반성을 통해 현재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려고 한다. 이 논의는 라캉에 의해서 개진된다. 라캉에게 있어서 무의식을 개인의 역사성으로 치부하는 사고는 불충분했다. 그는 반성이 차지하는 자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무의식의 자리를 다시 선정했다. 무의식의 자리는 균열 자체이다. 실재에 근접하지 못하는 내재성으로 인해, 실재와 내적 차원의 간극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며, 욕망의 자리가 무의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행동을 충동적으로 이끄는 데에 주력한다.


 에드워드 형제가 열렬히 욕구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던 '현자의 돌'과 그것을 찾기 위한 여정이 자유가 아닌,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중간 즈음에서 드러난다. 엘릭은 자신이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에드워드 형제와 적대적이면서도 호혜적인 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호문쿨루스'는 엘릭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들은 엘릭의 여정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돌을 찾게끔 이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에드워드는 그들에게 종속된 자동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호문쿨루스들과 그것들을 조종하는 타자가 에드워드 일행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일조하기도 하는 것이 근거이다. 그들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설명하자면, '호문쿨루스'라는 존재는 외관은 인간을 닮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기억도 없는 빈껍데기인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애매한 존재들로, 그들은 배후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숨겨진 존재들로 실천적 영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큰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다. 또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 그들은 라캉의 '라멜라' 즉 외설적인 불멸성이자 기괴함이다. 이들이 에드워드 형제와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애니의 주된 볼거리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심오한 의미는 그들이 형성된 이유에서 찾아진다.


 그들은 인간의 외형을 닮았지만 영혼이 없는 존재로서, 인체 연성에 실패하고 난 잔여물이다. 라캉적 의미로서 '잔여물'은, 연금술사가 불가침적인 조약인 '등가교환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즉 인체 연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들이다. 즉 그들은 연금술사의 욕망 그 자체를 대변한다. 또한 그들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내려고 했지만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으로, 여기에 연금술사들의 인식적 측면에서의 맹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욕망이 환원해내는 재현적 이미지는 원상태로의 복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망의 이미지는 뒤섞인 몽타주를 창출해내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 이미지가 진실이라고 한다면 진실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욕망의 잔여물로서, 애써 부정해야만 하는 인간의 불행한 측면이라고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애니에서도 연금술사들은 호문쿨루스들을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이며 자신들의 실수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그들을 제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꽤 도덕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락적으로 호문쿨루스들은 애니가 끝날 때 까지 '잔여물'로서 연금술사들의 실천적 의미로서의 생산을 이끌어 내는 충동적인 힘이다. 그것들이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간작힌 '찌꺼기'로 이해된다는 것은 바램일 뿐이라는 것이 역설적이기 그지 없다.


 에드워드 일행이 그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피학적 성향을 가졌다거나 아니면 그들의 행위가 단순한 무지몽매함의 외화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행히도(?) 그들의 실패는 그들 스스로에게서 벌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문쿨루스에 대한 부정은 곧 무의식의 충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려는 의식적인 힘이다.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에드워드의 순수함에서 찾아진다. 그가 그토록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란 어떤 강요나 희생 없이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에 빗대어 보아도 유토피아적이기만 하다. 그러니까 엘릭에게 있어 '현자의 돌'을 추구하되, 어떤 죽음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연성을 하면서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이미 그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그 돌을 만들기 위해서 그 법칙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인식하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은 실재적 질서이다. 철학 사조를 따지면 배부른 돼지라 비난받았던 공리주의적 사고를 부정하는 데에 이른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가 몰인식하다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인식의 진보는 어떤 개념적 규정의 현혹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또한 엘릭의 태도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 온 힘의 선순환이다. 이것은 엘렉에게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특히, 에드워드 엘릭이 과거에 잃어버린 오른팔과 왼쪽 다리에 기계 의수와 의족을 차고 있어서 그 무게 때문에 키가 작다는 설정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것 때문에 어디를 가도 '꼬마'라고 놀림받기 일수이고 거기에 대해 자격지심을 갖고 있지만, 니체의 초인인 '어린아이'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순진무구하기에 창의적이며, 용감하기에 도전적인, 동심을 유지하기에 어른들을 감동시키는 존재, 그리고 그의 진취적인 태도는 매 순간이 새로운 창조의 순간이며 그 물레를 쉴 새 없이 돌리는 중이다.


 엘릭의 생각이 기특하기는 하나 이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의 어원적 의미는 '없는 세계'이다. 실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죽음조차 넘어 존속하는 집요한 고집이다. 하지만 엘릭이 추구하는 이상은 경계선 위에 위치하며 그곳은 곧 실패 지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무지하지 않다. 오히려 인식의 총아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설이라 하거나 해괴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항상 입 밖으로 내뱉고 다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초월적 인식은 엘릭이 연성진을 그리지 않고 연성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져다준 '문'을 마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이라는 세계와 세계의 경계를 마주했으며 그 문 안에서 마주한 불경스럽고 불멸하는 것들과 접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그토록 얻고자 했던 돌을 얻어 그들의 신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금술의 절대적 법칙을 뛰어넘고자 했지만,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 법칙을 위배하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엘릭의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는가? 결말에 이르러서, 그들은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긴 했다. 그러나 또다시 이 법칙에 의해 잃게 된 것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바라본 '문'은 평행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였고, 그 두 세계를 양축으로 해서 교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한쪽 세게의 욕망이 과해지면 다른 편 세계에서는 불행이 번졌다. 이 또한 현실에 빗대면 꽤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그리고 엘릭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살게 되면서 연금술을 할 없게 된다. 엘릭의 팔과 다리는 없다. 동생인 알폰스는 신체를 되찾긴 했다면, 어린 시절의 체구를 갖게 되었으며 기억을 잃게 되었다. 정확히는 엘릭과의 추억을 넘어 엘릭의 존재 자체를 망각해 버렸다. 여기서도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신체를 찾았지만 그 대가는 서로의 존재 자체와 실존적 의미를 잃게 된 것이다. 이를 보면 '대가'라는 것이 가혹하게만 여겨진다. 동생의 몸을 찾긴 찾았지만 엘릭의 팔과 다리는 찾지 못하고 동생의 기억마저도 빼앗아가 버렸다.


 그들은 서로를 시간의 단조로움 속에서 점점 잊게 될 처지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니체적 낙관주의자이며, 희망의 회로를 끊임없이 구동시키는 자들이란 것을 말이다. 엘릭은 알폰스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지나온 '문'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우주에 있을 것이라며 확신하며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알폰스는 형의 존재를 망각하게 되었지만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애타게 추구하며 연금술을 공부한다. 그들은 서로 다시 만나는 것을 그들의 '꿈'으로 삼았다. 여기서도 욕망이 순환을 그려낸다. 서로를 상실한 자리에서 다시 욕망이 들어선 것이다.


 이쯤 되니 '인간의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일까?'라고 생각이 든다. 엄밀히 말하면 노자가 공자에게 공자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헛될 뿐이라 언지를 준  것처럼, 욕망을 추구하지 말라고 들린다. 아니면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욕망 개념이 지향성 개념을 충족하긴 하되, 이것이 강박적이라는 문제를 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긴 글을 읽은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살아가면서 모든 것들을 다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밀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꿈 = 희망 이란 것을 가져야만 한다는 당위적인 태도로 직결된다.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명확하게 집어내는 것은 2가지이다.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쓴 비유적 표현으로, 어깨에 들어간 힘을 조금만 빼더라도 좀 더 쾌적하게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을 꼭 즐길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ps. 엘릭이 '등가교환의 법칙'에 대해 계속 중얼거리는 것을 끊임없이 주시했기 때문에 결말이 좋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무언가를 잃긴 잃을 것이라는 사실로 귀결될 것이라고 모종의 확신까지 가졌다. 그래서 그런 결말로 끝을 맺는 것이 더 괜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애니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대타자이기보다는 야만의 질서에 더 가깝다. 대타자가 불특정 다수가 예외 없이 따라야 할 주권적인 믿음인 사회적 산물이라면, 야만의 질서란 주체가 자연스럽게 종속되어 있는 개체로서의 결함이다. 대타자는 그 결함을 주시하며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참고로, 리메이크되기 전의 <강철의 연금술사>이다. 아무래도 리메이크되면서 세부 내용과 결말을 바꿨다는 데, 대다수가 리메이크 전의 결말을 보면 별로 개운하지 않음을 느낄 법하다. 또한 글이 방법론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개진되었다는 비판을 스스로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내 눈에 그렇게 보여서 그냥 적었는데 막상 적고 보니 정성스러운 개소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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