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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20. 2019

어른이지만 어린 마음의 소년

<문 라이트> 관계의 부재 그리고 정체성의 허울 (스포주의)

나도 너처럼 못 말리는 꼬마였어. 달이 뜨면 맨발로 뛰어다녔지. 한 번은,
어떤 할머니를 지나쳐서 가고 있었어. 미친 듯이 들떠서 뛰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날 잡더니 그러는 거야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s : 그럼 아저씨 이름은 블루예요?
아니.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영화 속 후안과 샤이론의 대화>


 아이가 자라나는 성장 과정 속에서의 환경은 어른이 되어서 절대적인 토대로 자리 잡는다. 환경이란 물질적 제반 조건들만 규정짓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어떤 사람과 교우하느냐에 따라서 개별적 주체의 자아가 형성된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책은 사람이 쓴 것이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이는 불가피한 필연적 구조이다. 특히, 태어나면서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인간관계란 것이 존재하는데, 어릴 때는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존재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유아기 시절에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는 실존적 무기력 상태에서는 부모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의존성에 의한 관계는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커가면서 교우 관계가 중요해진다. 부모님의 터울을 어느 정도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욕구 속에서 친구와의 관계에 의한 자아가 형성된다. 그리고 커서는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되며, 자식이 생기고 가정을 꾸리면서 인간은 더욱 성숙해 나간다. 하지만 자아의 통시적 구조에 있어서 각각의 시기에 발생하는 '관계 맺음'에 균열이 생길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그 깊은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불행히도 모든 관계 맺음에 실패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1. 리틀, little

 어린 소년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단어에 대해 시비가 가려지기란 불가능한 듯 보인다. 이것은 고작 해봐야 믿음의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대화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명에 대해 논하지 말고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믿음'은 일종의 방향성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것을 나는 행할 뿐이며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다. 이는 철학 전반에서 나타나는 진리에 대한 질의응답이기도 하다. 즉, '무엇이 더 옳은가?'를 정해야 하는 모든 문제들조차 하나의 믿음을 형성하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다 위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믿음조차 주체를 규정짓는 자아의 심적 구조를 벗어나서는 생성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믿음이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수긍하기만 하는 그저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존재의 숙명적 비애이기에, 모든 불만 사항들이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신을 원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우리 샤이론의 어린 시절은 '비참함'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가련한 인물이다. 우선적으로, 그 어린 소년에게 주어진 운명의 가혹함이란 빈민가에 위치한 녹록지 않은 가정환경이다. 그리고 마른 체구에 작은 키 때문에 친구들에게 'little'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더해서 어디에 가서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 탓에 언제나 만만하게 보이기 일수이고 괴롭히기 딱 좋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없고 엄마는 매춘부에 마약 중독자이다. 그런 가정환경은 그에게 운명이다. 의지적 행위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그 가능성 이전은 샤이론이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태어나 보니 그런 환경과 신체적 조건이 주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그에 따르는 성격이나 외형 같은 결과는 부차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부차적인 모든 것들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하지만 이런 결과론적인 사유가 아닌, 비-규정적인 측면에서도 '운명'이라는 개념에 존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샤이론은 또래들에게서 도망친다.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갖고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도망친 곳은 후안의 마약 창고이다. 샤이론이 대면한 낯선 어른, 샤이론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샤이론을 침묵으로 이끈다. 언제나 감추기 바쁜 샤이론에게 침묵은 일종의 가면이다. 여기서 후안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우연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새로운 사람과 마주하는데, 어떤 연유 때문에 하필 그 사람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 샤이론은 친절한 후안과 그의 여자 친구 테레사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샤이론은 후안을 만난 날 하루 동안 후안의 집에 머문다. 다음 날 후안은 샤이론을 집에 데려다준다. 그때 만난 엄마는 후안을 경계한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후안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면서도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강박증적 집착이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샤이론의 엄마는 샤이론을 '평소에 앞가림을 하는 녀석인데...'라고 지칭한다. 그렇다. 또래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겨우 도망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앞가림'이라면 충분히 앞가림을 잘하는 녀석이긴 하다. 여기서 이미 엄마의 샤이론에 대한 몰이해적인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 문단에서 미리 언급했듯이 샤이론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그래서 후안의 존재는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는 존재이다. 작은 샤이론은 후안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샤이론인 후안에게 정확히 무얼 가르쳐 달라고 했는 진 알 수 없지만, 후안은 바다에 나가서 샤이론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다. 바다 위에서 몸에 힘을 뺀 채로 둥둥 떠 있을 수 있는 방법부터 파도의 거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힘까지. 이를 하나의 상징적인 비유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상에서도 '중력을 거스르면서 세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후안의 대사는 실존주의의 중축이 되는 사유이다. 그래서 샤이론은 세상에 중심에 서 있을까?


 집에 가보니 TV가 사라졌다. 아마 생활고 때문이거나 아니면 엄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 마약을 구매하기 위해서 내다 판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신의 탈출구를 잃어버린 샤이론은 목욕을 하기 위해 물을 끓이고 욕조에 세제를 잔뜩 붓는다. 세제에서 일어난 거품으로 몸을 씻고 머리를 감는다. 그러면서 작고 초라한 욕조에 몸을 뉘인다. 후안과 바다에서 느꼈던 추억을 상기하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샤이론에게 있어 그런 재현 행위는 자신이 처한 각박한 상황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그때의 황홀한 느낌을 상기하는 것은 허구적인 시도이다.


2. 샤이론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최초의 인류'라는 흑인에 대한 수식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일까? 후안은 흑인이 '최초의 인류'이기 때문에 지구 어디에나 흑인이 있다고 어린 샤이론에게 말했다. 후안에게는 그것이 자부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학교에 다니게 된 샤이론은 '생물학'을 배운다. '데옥시리보핵산', DNA에 대해 배우고 있다. DNA라고? 이것만큼 인간의 운명을 확실시하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어린 샤이론의 자그마한 체구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환기해볼 수 있다. 샤이론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다윈의 이론과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좀 더 면밀히 샤이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다윈은 진화론을 주창함에 따라 자신의 얼굴과 몸을 합성한 이미지들로 설욕을 겪게 되었다.(이것이 왜 설욕이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육두문자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설욕이라는 것을 수긍할 것이다. 사람을 동물에 빗대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건 오래 전 조상들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팽배해 있던 신성한 규율,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생명이라는 교의적인 믿음과 다윈의 이론은 충돌했다. 다윈의 주장은 인간 역시 자연의 수많은 개체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개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의 여러 산물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종이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뛰어난 위상을 가진 존재이며 신의 보필을 받고 있다는 절대적이었던 권리를 박탈당한다. 하지만 다윈조차도 '우연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개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런 형식적이고 공허한 물음이 가능한데, 왜 샤이론은 하필 그런 체구를 가지고 태어 났을까?


 샤이론의 키는 꽤 컸지만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깡마르고 비실비실한 체구를 가졌다. 또래들이 얕잡아 보기 딱 좋은 규격이었다.(또래라는 표현보다는 동네 양아치라는 표현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샤이론은 양아치들에게 언제나 먹잇감이었다. 먹이 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한 초식 동물에 불과했다. 양아치들은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를 욕하거나,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를 욕하면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힘의 차이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샤이론은 맞고 다녀서 그런지 주변 눈치를 살피는 습관까지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신적 지지대였던 후안은 죽었다.(마약거래상의 삶이란...) 하지만 언제나 치이고 다니는 샤이론에게도 친구 케빈만큼은 그의 곁을 맴돌면서 힘이 되어준다. 또래 중 유일하게 샤이론에게 말을 걸어주는 친구이며, 어린 시절에도 샤이론에게 자신의 강함을 타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친구이다. 케빈에 대한 감정은 애틋함 이상이다. 오죽하면 그가 꿈에 나와버려서 몽정을 할 정도이겠는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던가. 고생 끝에도 샤이론의 고난과 그것에서 비롯한 우울은 계속되었다. 가정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역시나 엄마의 존재이다. 엄마는 중독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집에 들어가니 샤이론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샤이론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엄마의 나르시시즘적 집착은 샤이론에게는 속박일 뿐이다. 그녀에게 샤이론은 그녀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정신적 완충지대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책임의 중압감을 견딜 의지력이 없어 마약 성분이 주는 황홀한 망상과 망각에 이끌려 갈 뿐인 삶을 선택했고, 만약 샤이론마저 떠나가버리면 자신의 무가치함과 정신적 결핍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못한다는 건 꽤 슬픈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집에 손님이 올 예정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샤이론은 거리를 배회한다. 유일한 안식처라고 할 수 있는 테레사의 집마저도 가기가 어렵다. 그가 테레사와 연관되면 될수록 그를 괴롭히는 양아치 무리의 그녀에 대한 험담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돈다. 그러다가 그가 후안과의 추억을 상기할 수 있는 바닷가에 간다. 그곳에 앉아 있으니 그의 친구인 케빈이 와서 앉는다. 케빈은 대마초를 피려 했을 뿐이다. 그들의 만남 또한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자신의 속내를 비춘다. 너무나 울어버린 나머지 자신이 눈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슬픔을 케빈에게 털어 놓는다. 그러자 케빈은 그러면 저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거냐고 비난 아닌 비난으로 받아친다. 시무룩하는 샤이론에게 또 위로의 말을 건네는 케빈. 샤이론과 케빈 둘 사이에 미묘한 눈빛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러고는 갑작스레 샤이론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위행위를 해준다. 샤이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한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그것이 샤이론이 겪었던 유일한 육체적 해방이자 정신적인 위안 그리고 케빈은 그의 유일한 탈출구로서 유일무이한 의미로 자리 잡아 버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시적인 안도감도 잠시, 양아치들에 의해 사건이 터진다. 양아치 무리들은 케빈을 시켜 샤이론을 때리게 한다. 그들의 영악함이란 샤이론을 괴롭히면서 학교 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다른 학생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고, 또한 케빈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법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케빈은 샤이론을 때리면서도 그에게 더 이상 일어서지 말라고 만류한다. 하지만 샤이론은 꿋꿋이 다시 일어선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게이'라는 말은 괜찮지만 '호모'라는 말을 들으면 참지 말라는 후안의 가르침 때문일까? 아니면 케빈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샤이론은 교사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교사는 샤이론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설득하지만, 그 진실이란 유일하게 항상 옆에 있어 주던 케빈조차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차가운 얼음물에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얼굴을 씻어내면서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의자로 자신을 괴롭혔던 양아치를 내려친다. 공적인 자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던 가운데 샤이론의 행동은 범법행위일 수밖에 없으며,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비참한 인생은 은폐된 채 소년원에 가게 된다.


3. 블랙, black

 샤이론은 그가 사랑하고 의존했었던 후안이 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 샤이론은 후안이 쓰던 두건과 비슷한 것을 쓰고, 그의 직업이었던 마약거래상이 되어 한 구역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처럼 입술을 적시기 위해 혀를 날름거리는 버릇을 들였다. 후안은 어린 샤이론에게 있어서 남자 어른이라 할만한 유일한 사람이며 롤모델이 되었지만, 샤이론은 그저 그를 무턱대고 모방한 것과 다름 아니다. 대상으로서 재현된 이미지는 주체의 응시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실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은 최종적으로 그 겉을 맴도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애쓴다고 한들 결코 후안이 될 수 없다. 어설프게 따라한 후안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건 후안을 재현하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허약한 체구를 가진 나약한 샤이론이 아닌 거대한 덩치를 지닌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제 샤이론은 나약하지 않다. 그의 공허한 눈빛을 더해서 미간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돈의 액수가 잘못된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한다. 부하는 어리둥절해하면서 그를 두려워한다. 쭈뼛쭈뼛한 채로 금액을 재차 확인한다. 그러자 샤이론은 장난이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면서 '장난에 쫄면 이 짓도 못해'라며 그를 훈계한다. 이 훈계는 샤이론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를 보여준다. 그의 훈계에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그의 행동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샤이론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고약한 꿈자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근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이두를 단련시킨다. 그가 아무리 겉으로 번지르르할 지라도 여전히 그의 공허함을 달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케빈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처음으로 케빈에게서 온 연락이다. 그리고 그날 밤 샤이론의 꿈에 케빈이 나온다. 그는 몽정을 해 버리고 만다.


 샤이론은 케빈을 만나러 간다. 친구로서 그를 동정해준 유일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 케빈이 일하는 곳에서 샤이론은 그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케빈은 샤이론과 다르게 결혼을 했다. 잘 지내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자식까지 있다. 케빈은 샤이론에게 '삶'이 있으며 예전에 했던 걱정들은 하지 않으며, '밥 말리'와 같은 자유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이 둘의 재회는 케빈과 샤이론이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가족이 있는 케빈에 비해 샤이론은 여전히 혼자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케빈은 샤이론의 모습에 난감해한다. 샤이론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케빈은 자신이 예전에 알던 샤이론과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과 성격들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샤이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샤이론은 그가 케빈을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해서 솔직히 말한다. '날 만져준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너 하나였어. 그 후로 아무도 만져본 적이 없어, 그 이후로 아무도 나를 만진 적이 없어' 케빈은 소파에 앉아 샤이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바다 앞에 푸른빛이 감도는 어린 샤이론이 서 있다.


 아무리 달빛이 그의 검은 피부색을 가릴 지라도, 그의 피부가 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 제목 '문 라이트', 달빛의 의미는 위장이다. 겉만 번지르르 해진 위장에 불과하다. 허나 아무리 그렇게 보일지언정 결코 자신을 감출 수 없다.


 ps. 술이나 마약 같은 망각을 기제로 환희를 주는 것들은 모두 현실의 중압감을 도피하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샤이론의 엄마는 재활치료소에 들어가서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 시점이 언제인 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샤이론이 소년원에 들어가고 가서 독립한 이후가 아닐까? 즉 엄마가 혼자 남겨져 의존할 곳이 사라진 이후라는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이란 일종의 책임감으로 환원된다. 엄마는 샤이론을 끔찍이 아끼는 건 분명했지만, 큰 문제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활치료소에서 그제서야 자신이 엄마로서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과 어린 샤이론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 수긍하고 사과한다. 엄마와 샤이론은 그 자리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모자는 진즉 흘려야 했던 눈물을 뒤늦게 쏟아냈다. 죄책감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사과'이다. 진정성 있게 사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여담으로 실제로 사과를 잘 못하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쌘 편인데 그런 사람들은 항상 결핍에 이끌려 다닌다.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씻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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