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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14. 2019

타자로서의 '주체'가 직면해야 할 곤경에 대해서

<서치> 라캉, '타자의 욕망'과 주체의 자리 선정 (스포주의)

 가상의 공간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가장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드러나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곳에서는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딱히 도덕적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타인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행위들이 가능한 이유는 단순하다.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로 위장될 수 있으며, 굳이 일부러 은폐하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위장된다. 나의 이름이 아닌 닉네임만으로도 나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불가해한 특질이 존속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꽤 솔직해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얼굴을 대면하는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부끄러움은 덜하고 자유로움은 배가된다. 솔직하다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솔직한 덕분에 그곳은 거짓이나 위선조차도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진실로만 가득 찬 공간이다. 우리는 범지구적인 조화와 유아론이 교묘하고도 이상하리만치 섞인 최근의 사이버 공간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로 난 창문이 없는 가상의 시뮬라크르와 대면한다는 것은, 즉 스크린 앞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서 가상적 상대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전체 지구와 동시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기묘한 생생함에 전도될 수 있다. 그 순간 만큼은 거대한 세계적 연결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곳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심연, 그러니까 너무나도 솔직한 나머지 타인에게 험담을 늘어놓는데도 거리낌 없는 모습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에서 드는 생각은, 어쩌면 윤리적인 관념으로 치장한 도덕적 존재라는 칭호가 하나의 가면일 뿐이고, 그 뒤에 감추어져 있었던 혐오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가학적인 성향이나 가혹한 폭력성이 인간의 더 진실한 면모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 즉 우리 자신들에 대한 오해로 금칠된 해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상이기 때문에 진실이 은폐된 상황, 하지만 이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의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해'라는 개념을 '앎'이라고 단순 치환시키면, 즉 나는 타인에 대해 알 수 없고 타인도 나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앎은 본질적이지만 타인에 대한 본질적인 앎이란 불가능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내는 알 수 없다는 옛 속담에서도 이미 이것에 대해 적시하고 있듯이, 타인은 완벽한 타인이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타인으로 존재한다.


 '완벽성'이라는 속성에 대해 환기해 본다면,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해 앞에는 '완벽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가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종종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너를 충분히 이해해'라는 표현을 쓸 때, 이는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관례적이며 상투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의 고유한 한계 앞에서는 어쩌면 오만할지도 모를 그런 표현으로 전락한다. 이 오만함을 규정하는 것은 '언어의 벽'이 존재하며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의미한다. 언어는 타인과의 연결이나 또는 대타자라는 상징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체계이며, 공백을 메우는 방식이 아닌 공백을 덮는 방식으로 타인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이 한계로 인해 담화가 교접을 이루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서로에 대한 오해가 존속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타자에게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니까 이 한계점을 적절히 시사한다고 해서 '언어'가 무가치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리가 유일하게 기대어 있는 방식이다.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절감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번외적으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이 개발 중인데,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키는 기술 즉, 신경과 신경을 연결시키는 기술이 개발 중이라고 한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머리카락 끝에 달린 촉수를 연결시켜 교감하는 방식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떤 신체적 접촉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과 느낌을 알 수 있다면 서로에 대한 오만을 줄일 수 있을뿐더러, 오해를 풀기 위해 언어가 들어서야만 했던 자리가 위축되거나 아니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시도인 '페르소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숨기고 싶다면 신경 접촉을 아예 허용하지 않으면 될 것이고, 그럴 때면 타자는 여전히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형상을 유지한 채로 남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엄마의 죽음'이다. 삶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인 죽음은 공교롭게 찾아오며 인류는 여전히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무기력하다. 엄마의 존재는 아이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어릴 때는 아빠보다 엄마를 더 찾는다. 하지만 죽음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엄마의 부재는 어린아이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전우주적으로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엄마가 세상과 이별하면서 가정의 화목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부재로 인해 텅 비어버린 공간은 딸과 아빠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의미한다. 그 둘은 피상적으로만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물리적인 간격마저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빠의 동생이다. 아빠에게 항상 '딸과 잘 지내냐'라고 묻는다. 아빠는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머뭇거린다.


 그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새벽에 딸에게 걸려온 두 통의 부재중 전화는 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케 한다. 딸에 대해 무지한 아빠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미규정적인 상상이 따른다. 인간의 불안은 실제로 발생하진 않았지만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불안과 직결된 작인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의존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다.

 

 실종 신고 이후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릴 수만은 없다. 딸 가진 아빠의 마음이랄까. 아빠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딸의 기록을 뒤적거린다. 딸의 친구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주고받은 메시지, 그리고 은밀히 해오던 인터넷 방송들. 가상의 기록들 속에서 아빠는 딸의 내적인 부분들을 알게 된다. 자신이 평소 알고 지내던 딸과는 전혀 다른 딸의 모습에 당황하기 그지없다. 교우 관계는 원만치 못했고, 피아노 레슨 비용을 몰래 빼돌리고 있었고, 아빠에게는 비밀스러운 것들을 아빠의 동생에게 털어놓는 등등. 딸의 솔직한 기록들을 통해서, 아빠는 딸의 행방을 추적해나가며 이래저래 추측을 해보지만 결국 옳은 방향을 견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것이 솔직하다고 한들, 그조차도 정의상 하나의 가상이기 때문에 아빠는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의심이 중첩될수록 실수만 늘어갔다. 그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고 그의 중압감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이런 것들은 욕망의 결과물들이다. 라캉에게 '욕망'이란 결핍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그 부족분을 채워 넣는 비실재적 양태이다. 진실에 닿기 위해 노력을 정주하지만 결코 실재적인 것에 귀착하지 못하기에, 거짓된 시도일 지도 모를 그런 것들이다. 욕망의 주체는 눈 앞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리라는 응시점에 의해 존속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은폐하는 역설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탐욕스러운 자취는 언제나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를 명하면서 공중을 떠돌게 한다. 주춤거리지 않는 일련의 방황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안 죽는 것이다. 그런 시도들 끝에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상상적 오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아빠는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관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어 낸다. 뉴스 기사에 그녀가 받은 표창과 범죄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프로그램에 활발히 참여하는 이미지들은 그녀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책에는 '엄마는 위대하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이 말에 딱히 이견을 달진 않겠다.)


 영화에서도 경찰관은 엄마가 위대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 상징적 문구는 경찰이라는 직업적 자아와 충돌한다는 것에서 불일치가 발생한다. 영화의 결말이자 반전이지만, 그녀는 사건의 진실을 거짓으로 위장한다. 경찰 이전에 '엄마'이기 때문에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는 행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자신이 진실되게 믿고 있는 저 문구는 모성애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기표로 작용한다. 여기에서만큼은 맹목적이고 순종적이다. 하지만 저 순진무구한 믿음은 자식을 위한 행위라면 모든 것들이 용인될 수 있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문제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면서도 어머니로서의 자격에 대해 운운한다. 이런 도착적인 성향 속에서 경찰로서의 직분은 그녀에게 부차적인 임무일 뿐이다. 그리고 '엄마이기 때문에'라는 당위성은 하나의 왜곡된 상으로써, 그녀가 경찰로서 이행해야 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함과 동시에 범사회적 윤리의 위상마저도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아니면 비약적으로 해석하면, 경찰이라는 직업마저도 자식을 위한 수단으로써, 단순한 생계로써, 아들을 보필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보편적 도덕 감정과 입법적 질서는 그녀에게만 전치되어 있을 뿐,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법의 위상이 부서진 것은 아니다. 그녀의 위장 행세는 결국 세상에 알려지고 클리셰적인 마무리로 영화는 끝을 맺지 않는가. (나에겐 언제나 클리셰가 옳다. 그렇지 않은 결말의 찝찝함보다야 훨씬 좋다.) 그리고 이 불편한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그녀가 몸소 실천해야만 했던 경찰의 공권력은 그녀의 불합리성에 지목하고 은폐된 진실을 밝히면서 처벌한다. 이것의 위상 아래에서 저열한 욕망은 좌초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녀에게 수모적일지도 모를 이 힘은 '대타자'이다. 그리고 이것의 근본적인 힘은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 속에서만 확인된다. 다시 말해, 모든 각 개인들에게 이것은 비실체적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만 기능한다. 대타자는 법, 자본주의, 민주주의, 민족, 국가, 사회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인 토대이며, 존재적 기반 그리고 삶의 의미 전체를 포섭하는 참조점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은 인터넷 창 속에서 진행된다. 마치 우리가 매일 가상의 공간을 기웃거리며 타자를 마주하듯이 말이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인물들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틀(시선)을 살펴보면, 영화 도입부에서 엄마가 죽기 전에는 가족들이 함께 있는 영상이나 사진이 나오다가 죽고 나서부터는 한 명의 주체만 담아낸다.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고립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영화가 진실에 조금씩 더 가까이 근접해 갈수록 하나의 스크린에 둘 이상의 주체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둘을 연결 짓는 유일무이한 계기인 '소통'이 놓여 있다. 그 자체는 어떤 진실된 것을 추구한다. 아빠가 딸에 대해 이야기를 동생을 통해 전해 듣거나, 딸의 가짜 장례식에 사건 담당 경찰관인 그녀와 마주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을 구하고 나서 함께 찍은 사진 등등. 라캉에게 현상학에서의 고립되어 있더라도 완벽할 수 있다는 주체는 역설이면서도 환상적인 무언가, 즉 규정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상학적 주체의 대척점에는 우리는 태어나면서 어떤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자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유의지와는 무관한 존재의 불가피한 규정들이다. 나의 경우에는 눈을 떠보니 부모님과 누나가 있었고,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였고, 경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런 사실들은 실존적 무기력에 처한 유아에게 있어선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자유의지에 앞서서 나를 규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로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의 삶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긴 하다만...

 

 라캉이 프로이트의 모토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나는 있어야 한다."는 말, 즉 "에고가 이드, 즉 무의식적 충동의 자리를 정복해야 한다."로 읽지 않고, "내 진실의 자리에 나는 과감히 접근해야 한다"로 읽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 Slavoj zizek <How to read 라캉> -

 욕망을 대면하는 자세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나에게만 국한된 순수한 물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즉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은 꽤 근본적이게 보일순 있겠지만, 라캉의 질문은 '타인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참을 수 없는 진실에 대해 묻는다. 라캉의 시도는 내면의 평화라거나 생활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곤경, 즉 다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것을 억지스럽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클리셰적 결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상호 간의 진실한 공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관객으로서 우리는 스크린 너머의 타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발행한 글들 속에서 연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또다시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라캉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둔 듯하다. 아마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로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고독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사르트르의 경구로, 그리고 드라마화까지 된 웹툰의 제목이기도 한 '타인의 지옥이다'라는 말은 의미 없는 만남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 영양가 없는 만남-이렇게 이해해도 될 진 모르겠지만-정도로, 타인의 불명료성은 무의미로 이어진다. 웹툰에서도 종우의 처지는 반사회적인 성향의 인간들 속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그 광기의 참혹함 속에서 종우가 미분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가 점점 미쳐가는 과정들, 그리고 그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니냐며 불신하기 까지, 선한 사람조차도 광인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나열한다. 영화와의 차이가 있다면 고시원이라는 공간에는 '대타자'의 손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법을 어긴 사람이 법 아래에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드러나는 민낯인, sns 속에서의 위선적이며 저열하며 악랄하기까지(?) 한 인간의 성향을 보여준다. 이는 니체가 윤리를 벗겨내면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들추어낸 것처럼, 그런 것들이 우리의 진실성이며 또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모두 '타자'들로써, 그들은 나에게 충분히 성가신 일을 만들어 내는 불편한 존재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전체를 수용하게끔 하는 '대타자'의 기능들 속에서 공존하는 또 다른 주체들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순간 세상은 지옥으로 변모한다. 세상은 욕망의 열정들이 판치는 곳이다. 하물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까지 표현하겠는가. 상호 간의 욕망들이 불가침적인 것이어야만이 타자와의 긍정성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주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ps. 라캉은 단순한 포스트-모던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만큼, 타자는 나와 다른 완벽하게 분리된 주체이지만 그 분리에 의한 간격을 어떻게 최소화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고 그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라캉이 정신분석학계에서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걸 보면 역사는 꽤 이성적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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