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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07. 2019

부재함, 의미와 비-의미의 역전

<버드맨> 보드리야르 읽어내기 (스포주의)

Q : 당신은 그럼에도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A : 그렇다.
Q : 그게 무엇이었나요?
A : 내가 지구 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레이먼드 카버, 레이트 프래그먼트 중>


 현시대에 모든 것들은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특히나 그곳에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이며, 그것은 일상에 깊이 있게 침투해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으며 스마트폰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 가령, '카카오톡'을 지우고 전화나 문자만 한다고 말하니 주변 사람들의 눈은 금세 이상하게 변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SNS부터, 너도나도 시작하고 있는 영상매체인 Youtube,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TV나 신문과 같은 언론매체들까지 대체하며, 이것과 이것의 기능들 그리고 '일상'이라는 표현을 딱히 구분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그런 것들이 일상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상들은 모두 파생실재가 되고 있다. 실재를 재현하지만 실재보다도 더 실재같은 시뮬라크르인 파생실재와 그것을 재현해 내는 작업인 시뮬라시옹. 더 이상 실재와 파생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게 된 시점에서, 그 안에서 실재를 찾기 위한 노력도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니까 굳이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영화 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존재하기 위해 노력을 정주하지만 그 노력은 역설적으로 존재함을 상실케 한다.


 '불행 속에 있으면서 행복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큼 쓰라린 일은 없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리건 톰슨'만큼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저 짧은 글귀가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리건은 자기 자신을 굉장히 특출 난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여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대우에 불만족스러워하며 언제나 자신을 거짓들로 관철시키고 있다. 첫 장면에서 공중부양한 상태로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 여긴 정말 끔찍해, 거시기 냄새가 진동하잖아.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니야.'라고 누군가 말을 건다. 뇌리 속을 헤집어 놓는 목소리는 자신의 상황을 비꼰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버드맨'이다. 그것은 곧 리건의 과거이자 무의식이다. 그때의 영광스러운 기억은 언제나 리건의 존재적 가치를 각인시키는 요소이다. 하지만 버드맨은 더 이상 흥행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한물 간 캐릭터이며 리건 또한 퇴물배우로 인식될 뿐이다. 이젠 늙어버린, 그래서 자신보다 더 젊고 열정적이고 더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기를 내어준 상황이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캐릭터는 '아이언 맨'이다. TV에서 나오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보고 리건의 무의식은 '네 재능의 반도 못 따라가는 광대가 깡통 슈트를 입고 떼돈을 벌어 들이고 있어. 우린 진짜였어. 리건, 그땐 모든 걸 가졌었어. 다 날려버렸지.'라며 혀를 찬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불만족은 은폐되고 그 감정을 보상하는 유일한 방편은 잘 나가는 배우를 비난하는 것이다. 이는 질투의 표상에 지나지 않으며 일종의 자기 위로이다. 리건에게서 보이듯이, 타인에 대한 적개심은 의식적이고 공공연하게 표출되는 반면, 자신에 대한 적개심은 대개 무의식적이고 간접적이며 합리화되어 있다.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어버린 자리에서 그나마 그의 가치관을 가장 그럴 듯하게 대변하고 있는 문구가 거울 앞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실제로도 그럴까? 리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고 있을까? 그 옆에는 딸이 사 온 꽃과 메시지가 그가 소유한 의미를 반문한다. '아빠가 원하는 꽃이 없었어요.' 대치되는 두 문구들은 리건이 진실되게 바라는 것과 리건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빛나고 있지 않다. 원하는 모습으로의 자기 자신이 아니다. 저런 문구들은 언제나 리건을 유혹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되며 초라한 상황을 부각하고 집착을 발생시킬 뿐이다.


 무대 위에 배우는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산다. 그들에게 대중의 관심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과 존재적 위상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즉 자신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는 곧 무의미함이라는 경험에 짓눌리게 된다. 앞서 짧게 언급했듯이 영화에서는 존재감을 상실한 인물들이 파편화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진실된 관계도 구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고 애쓴다. 리건에게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로라', 리건의 위로와 로라의 키스를 받고서야 자신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레슬리', 마약 중독자에 언제나 말썽을 피우는 반항아 이미지를 리건에게 각인시키는 딸 '샘'까지, 일단 그들은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작중에서 리건과 대치구도를 형성하는 '마이크'는 무대 위에서 술을 마신다. 실재적인 허구인 무대 위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를 찾는다. 그러면서 '가짜들 속에 진짜는 이 치킨들 뿐이야'라고 고함을 치고 관객들에게 스마트폰 속의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경험하라며 비아냥 거리기까지 한다.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지만 그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와 하는 말은 자신의 연기가 최고였다며 알 수 없는 도취감에 취해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위축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발기부전인데, 무대 위에서 발기가 되어버려서 상대 여배우인 레슬리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습은 실재와 허구가 역전되어 있다. 특히, 샘과의 게임에서 언제나 '진실'만을 고르며 진실만이 재밌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리건에게 마이크의 존재는 그가 바라는 절호의 기회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재기를 꿈꾸고 있는 리건에게 자신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관심이 마이크에게로 향한다는 건 자신의 욕망과 점점 더 멀어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무대 위에서 발기된 마이크에게 대중의 관심이 쏟아졌을 때 그는 깊은 낙담에 빠진다. 하지만 낙담에 빠져 있을 만한 여유가 있는가? 그 와중에도 그의 존재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데. 그는 경영난에 허덕이면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이혼한 아내에게 건네는 말속에서 리건의 강박증이 엿보인다.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인데 놓치기 싫어. 반드시 해야 해.' 그 말을 부추기는 건 버드맨이다. 언제나 버드맨의 환영에 사로잡힌다. 버드맨은 그에게 마법적인 조력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는 불명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는 현실적인 기호이다. 과거는 현재를 이해하는 기재로서 현재의 모든 행동들을 규정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어제 했던 일-그것이 옳든 그르든-들이 오늘 또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은 동일하지 않다. 반복에서는 언제나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발견되고 반복의 영역을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이 차이를 근거로 과거의 시간대와 현재를 분명히 경계 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유는 리건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방금의 사유를 전복시키면 '버드맨'에게 존속되어 있다는 것은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 자체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아니다. 버드맨은 비실재적이며 순수한 유사 존재인, 중심의 공백을 덮고 있는 순전히 환영적인 것이다. 버드맨은 버드맨일 뿐 버드맨보다 이상적인 무언가가 결코 아니다.


 리건의 이런 상황들 속에 어떻게 자신의 존재감을 성취하는가? 그 방법은 하나의 매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마이크가 무대 위에서의 발기한 사건은 대중의 이목집중시키면서 신문의 1면을 장식한다. 반면 자신에 대한 기사는 뒷장에 아주 작은 부분에 할애되어 있다. 리건은 화날 뿐이다. 엄밀히는 마이크를 질투하고 있다. 리건은 마이크에게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그건 열등의식일 뿐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리건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리건의 옷이 그만 문에 끼어버려서 그는 나체로 거리를 활보한다. 사람들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찍기에 여념이 없고 거리는 조소가 섞인 웅성거리는 백색 소음들로 채워진다. 그런 와중에도 그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팬들도 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바로 무대로 뛰어든다. 자신의 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연기를 시작한다. 무대는 당연히 웃음바다가 되고 연극이 끝난 뒤 허탈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우려에 반해 리건의 행보가 SNS에서 조회수 대박을 기록한다. 리건이 전혀 의도하지 못했던 관심들에 둘러 쌓인다.


 이 연극 무대가 '자신이 살아온 기형적인 삶의 축소판'이라 여기는 리건은 끝을 맺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끝'을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영화에서 그가 모형총이 아닌 실제 총기를 소지하고 무대에 오른 것만 보아도 죽기로 결심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머리에 대고 총을 쏜 게 아니라 자신의 코를 날려 버린다. 그러니까 자살을 결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감한 행위가 인기몰이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조금 더 과감한 행위를 취한 것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 격양된 연기와 함께 총구를 당기고 가짜 피가 아닌 진짜 피를 흘린다. 그는 허구 속에서 진짜가 된다. 자신이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노라고 관객들에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 맥 없이 쓰러졌다. 정적. 일시적인 침묵이 흐른 뒤 관객들의 환호성이 무대 위로 쏟아진다. 그들이 본 것은 허구가 진실에 도달한 것이며, 그의 연기에 대해 박수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가 아니다. 그 자체로 진실이다. 관객들은 허구 속에서 진실을 마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코 그것을 진실이라고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극무대 위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진실은 당연스럽게 허구로 인식된다. 그 어떤 진실이라 한들 허구에 머무를 뿐이다.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즉 리건이 진짜가 되면서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카메라가 처음으로 끊기면서 장면이 전환된다. 리건은 죽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도(?) 코가 날아가서 성형을 했을뿐,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신문 1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를 가짜라 비난하며 험담을 늘어놓던 비평가는 리건이 '극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연극 사조를 창조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극사실주의? 이 마저도 진실을 가리는 하나의 기표로써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허구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그 이후 리건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병실 침상에 누워서 신문을 본다. 그런데 왜일까? 그의 표정에는 기뻐하는 기색은 단 1도 없다.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무덤덤할 뿐이다. 그의 표정에 숨겨진 정체는 무엇일까? 화장실에서 자신의 새로운 코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와 오랫동안 조우해 왔던 '버드맨'이 변기 위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리건은 또 다른 자신에게 작별을 고한다. '잘 있어, 그리고 엿먹어' 그는 창문가로 걸어간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멍한 눈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창 밖으로 몸을 던진다. '샘'이 들어와 텅 빈 방에서 리건을 찾는다. 그러다 열린 창문으로 다급히 뛰어간다. 아래를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서 애매하게 미소 짓는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리건이 자신이 원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작!'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자신의 모습이 실리는 것이다. 열린 결말의 여운에는 석연치 않은 것이 없을 수가 없다. 영화 중간중간에 보여주었던 리건의 초능력들, 그러니까 공중부양한 상태에서 명상을 한다거나(안정감을 얻기 위한 행위 하지만 긴장되어 있음),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분장실의 물건들을 다 박살 내버리거나(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짜증남), 도심을 날아다니는 리건(상상력의 애매한 기대와 황홀감)과 같은 연출은 그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리건은 실제로 초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에 '샘'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시선처리를 통해 우리는 리건이 하늘을 날았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 리건은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마침내 자신을 괴롭히던 강박적인 집착이었던 '버드맨'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억눌러왔던 환영에서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또한 직감할 수 있다. 그가 초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육체는 바닥에 처박혀 갈가리 찢기고 내장이 다 터져버렸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몸을 던지는 행위, 그 안에서 '공허'라는 이름의 해묵은 오해인 자유를 확인할 수 있다. 자살은 극단적인 자유의 형상으로 육신에서조차 해방되고자하는 충동적 행위이자, 정신의 이름이다. '버드맨'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욕망도 함께 사라졌다. 인간에게 어떤 욕망이 끝나서 새로운 욕망의 도래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 아닌 하나의 의무로서 자리매김해야함이 마땅하다. 무언가를 욕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공허함를 추구하는 의지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욕망할 수 없다. '버드맨'이 자신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겪고 나서야 알 수 있었고, 다시는 그런 곤혹스러운 것과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창밖으로 뛰어내린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긍정이었다. 또한 그가 그토록 바라던 성취물-신문에 실리는 것이 '고작!'인 이유-이 그에게는 실망스러웠을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겪고 나서야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충동적 행위는 '이원론'을 옹호한다. 프로이트에 의해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가 창안한 '무의식' 개념은 인간이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권리를 박탈한다. 그렇다면 리건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리건의 욕망을 발생시키는 요소들은 '타자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리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은 '시뮬라크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배우이기 때문에 '연극무대'라는 허구적 장치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가 무대 위에서 실제로 발기를 해서 자신의 대목을 방해했을 때, 리건의 질투심을 유발한 것은 마이크의 존재함이 아니라 '마이크가 실린 신문의 기사'이다. 리건이 아내에게 말하기를, 만약 조지 클루니와 자신이 함께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조지 클루니의 죽음만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자신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 말하며 두려워한다. 샘과의 말다툼에서 샘은 리건에게 SNS인터넷상 어디에도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입부에서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욕하는 것도 'TV 스크린' 안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다. 나체로 거리를 활보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것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속이다. 자신의 존재가 알려진 수단이자 버드맨과 작별을 고할 수 있었던 계기는 '비평가의 글'이다. 하물며, 리건이 연극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진실된 연기 고맙다. 레이먼드 카버'라고 적힌 '휴짓 쪼가리'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고 애쓰는 마이크는 이를 비웃지 않는가) 심지어 결정적으로 '버드맨'조차 가상의 인물로서 그 자체가 이미 허구이다. 엄밀하게 다가가면 '버드맨'은 '리건 톰슨'이 아니다. 그래서 대체 리건 톰슨은 누구인가? 리건은 언제나 시뮬라크르이며, 시뮬라시옹의 중축을 담당하는, 즉 자신을 재현한 다른 무언가로 끊임없이 재현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인 무언가를 꾸준히 양산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심에 위치하기를 바라지만, 애시당초 그 속에서는 주체로서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적 지위를 선점하지 못한다.


 영화의 롱테이크 기법은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단일한 사건처럼 담아낸다. 그러면서 연극 무대와 분장실 그리고 거리를 배회하는 상황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무대 위와 뒷편, 건물의 안과 밖, 분장실과 분장실이 아닌 곳,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면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게 그리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물음이 허구의 자리를 채워 넣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실재적인 것인가? 만약 이런 것들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자아'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몽상적인 물음에 근접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는 '가치 없는 세상의 허무함을 가리기 위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라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연극 무대의 마지막 대사는 허무감을 적나라케 현전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여기에 없어.'


 그래서 '존재하고 있음'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저 물음의 답은 언제나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할 지도 모른다. 앞에 풀어놓은 관점들은 비-존재에 연원하는 근거들이다. 그리고 인간이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고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는 이유이다.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우울과 불안을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존재감을 성취하는 방식들 또한 보여준다. 영화의 인물들은 리건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언제나 파편화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융합을 꾀하는 존재들이다. 샘은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리건의 가르침에 반목하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는 그것이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샘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샘은 아빠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마이크는 발기부전 때문에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무대 뒤에서의 샘과의 사랑을 통해 극복한다. 레슬리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리건의 격려를 통해 극복한다. 또한 로라와의 키스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성정체성을 발견한다. 리건은 자신의 나체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낙담하고 있을 때 샘에게 위안의 말을 듣는다. 이혼한 아내가 리건의 꿈을 격려할 때 리건은 '왜 우리가 이혼했지?'라고 아내에게 되묻는다. 재정 담당자인 제이크는 리건의 안정감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서슴없이 뱉으며, 그의 코가 날아가서 신문 1면을 장식했을 때는 자신의 일인 것마냥 기뻐한다. 그들은 언제나 어떤 상징성들의 허구에서 활동하면서도 타인들이 선사하는 은밀한 안정감을 만끽한다. 이런 것들은 사소하면서도 영화 상에서조차 스쳐지나가는 순간들에 불과하다. 일상적으로도 딱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타자와 의미있는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가장 진실되고 근본적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별 것 아닌 호의 정도로만 치부되고 마는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리건이 겪어 내는 기묘한 삶이라는 거대한 서사에 몰입하게 되면서 감추어져 있으며 사소한 것일 따름이다. 실제 삶에서 우리에게는 대개 무의식적이고 은밀하게만 작동하고 있다.


'언제, 누구 그리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톨스토이의 답변이 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

 

ps. 한 편으로, 이런 행동에 대해 니체의 비판을 덧붙인다면, 타인에게 항상 믿음과 격려, 위로 따위를 구걸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말과 다름 아니기도 하다. 이런 의문이 가능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건네는 격려만으로는 왜 충분치 못한가? 왜 항상 타인을 귀찮게 하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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