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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Oct 31. 2019

양심의 행방, 묘연한 궤적에 대하여

<카운터 페이트> 양심과 행동 그 불가분적 양상 (스포주의)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 해도 한 가지만은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삶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빅토르 F.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세계에는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 있는 반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악한 인간은 없고 악한 상황만 존재한다면, 불합리한 것들을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이 자명해진다. 하지만 불합리함을 만드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탄생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양심적일 수 있는가?


 가난은 의식을 잠식한다. 그곳에서 발현한 빈곤은 처절한 몸부림에 가담하고 그 궁핍함은 비루한 광기가 된다. 그 광기는 폭력성으로 번지는 악의 순환 고리를 만들어 낸다. 이 물림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가난이 범죄와 더불어 있다는 실증적 공식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이 감응적 존재이며 타고난 도덕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정의를 퇴색시킨다. 우리는 어느 정도로 선한 존재인가? 어느 정도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들은 상대적이고 양적 합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만, 합리성이 파괴된 시점에서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적중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혼돈의 장에서는 어떤 행동이라고 쉽게 수긍될 수 있다. 즉 그곳에서는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한 모든 행위들은 옳다.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일종의 냉소일지 모른다.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마주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건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양심적이었던 극악무도한 상황을 고발하면서, 그 속에서 '아' 속의 '비아' 간의 투쟁을 다룬다. 그러면서 양심이 무엇인지 답변을 해준다.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919년 베르사유 조약 때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청구한다. 연합국은 어리석게도 독일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배상금에 더하여, 12만 마리의 양, 1만 마리의 염소, 1만 5,000마리의 돼지, 4350만 톤의 석탄을 요구한다. 이 결과를 들은 케인즈는 회담장에서 서류를 던져버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지적 양심에 호소해 승전국들도 나름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요설쯤으로 전락한다. 패전국들에게 내려진 응보적 처벌은 또다시 그런 잔혹한 폭력이 재발할 가능성을 억지시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보기 좋게 빗나가면서 2차 세계대전이 다시 발발했지 않는가. 독일은 청구된 값을 지불하기 위해 화폐를 찍어냈고 시장에 풀린 엄청난 양의 마르크는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킨다. 서민들은 치솟는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덩달아 대공황과 치솟는 실업률은 사람들의 삶을 빈곤으로 이끌었다. 전체주의는 공포를 해소하는 나름의 수단이었다.


 영화의 소재는 '위조지폐'이다. 위조지폐는 인물들 간에 서로 다른 기의로 작용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기표이다. 소로비치를 필두로 한 유대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도구이면서, 나치들에게는 영국의 경제를 망가뜨리는 공격의 수단으로, 그리고 브루거에게는 유대인들을 착취하고 평화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장애 요소이다. '위조지폐'라는 수단은 위법이지만 혼돈의 양상에서 '선'의 정의는 그저 내가 옳다고(좋다고) 믿는 일일 뿐이다. 생존의 갈림길 위에서 믿음의 배반은 곧 죽음으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지폐를 만들기 위해 선별된 140명가량의 유대인들은 수용소 내에서 특급(?) 대우를 받는다. 숙련된 기술이 있었던 그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들은 비참한 수용소 내에서 샤워를 하는 수혜를 누리고 위생적이고 푹신한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또 그들이 성과를 내자 나치는 그들의 유희를 위해 탁구대를 설치해 주었다. 평화로울 땐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엄청난 보상인 것처럼 계상되고, 그것에 감사하는 기이한 상황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안도였다. 유대인에게 나치의 보상이 가식적인 친절이라도 부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에게 죄책감이란 심리적 간격에 의해서 무화되었다. 그들은 위조지폐를 만들 뿐이지, 위조지폐를 사용하는 것은 나치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으로 합리화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임무를 완수해서 사용가치가 떨어지면 사냥개처럼 버려질 것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로비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무리를 지키기 위해 나치들과의 교묘한 줄타기를 벌인다.


 소로비치를 중축으로 그가 직면한 상황들을 통해 우리는 거대 담론 속으로 던져진다. 앞서 언급한 질문을 재차 상기하면, 인간 존재란 극단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인간은 불합리한 처지에서도 칸트의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도덕 제1법칙은 실천적일 수 있는가?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 앞에서 윤리는 아무짝에도 쓸 모가 없다는 것을 그들의 모습을 통해 대변해주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윤리 규범들이나 법제적 질서는 사회적 존재의 삶을 지탱하는 틀로 기능을 분담한다. 하지만 구조가 붕괴된 시점부터 윤리는 폭력성의 배후로 자취를 감춘다. 이를 정확히 지목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이다.


 아렌트에게 '무국적 난민'의 입장에서 민족성이란 보편성의 폭력으로 베제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아렌트의 주장으로 인권이라는 보편적 이상이 수많은 난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며, 인권의 보편성에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면, 자격을 갖춘 인간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특정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파시즘과 같은 대내외적 이질성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배제하려는 이념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및 그 잔당들에게 윤리에 기초한 감수성을 기대할 순 없었다. 또한 나치들에게는 '유대인들은 악한 존재'라는 선동적 구호에 의해 유대인들은 존재 가치를 갖질 못했고, 가장 하등한 종족으로 낙인찍혔다.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활용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일 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아가고, 하층민들의 박탈감에 불씨를 지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 명분이 되는 민족이었는가.


 영화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오면, 영화는 주인공인 소로비치의 고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고뇌란 현실(삶의 보존)과 이상(양심적 환원)의 중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중점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어떤 쪽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양쪽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양갈래로 난 길을 모두 살피는 정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중간에 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다는 여지와 함께 존재한다. 즉 이념적 대척점에 서서 양립한다는 건 둘 간의 융합을 꾀할 수 없어 항상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부르거는 그 흔들림을 고조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는 인물이다. 브루거는 선한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나치에게 동조하는 행위 자체에 반대하고 또 소로비치에게 노골적으로 반목하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브루거는 함께 작업에 참여하는 유대인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존재이기에, 동료들에게 구타와 질타를 유발하는 존재이다. 그는 언제나 혁명의 과격한 주체가 됨으로써 현상황을 타파해야 한다는 식의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인간, 그러니까 무기력 속에 던져진 유대인들에게는 몽상에 그치고 만다. 이상적인 가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한들, 현실과의 간극을 매우지 못한다면 상상계적 특질들은 경험의 본질을 구현하기는커녕, 정신에 해로운 강박관념으로 환치될 뿐이다.


 '유대 민족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민족적 대의는 소로비치와 브루거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의 차이 속에서도 공통적 지평은 존재했다. 하지만 시선의 교묘한 일그러짐은 인식적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다. 소로비치에게는 140명의 유대인들이 전체 유대인이었고, 브루거에게는 자신들의 안락에 비해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 전부가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방법의 차이로 귀결한다. 이 속에서 과정과 결과의 딜레마가 발견된다. 이 딜레마에서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결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결과가 과정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지 못하면 과정은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는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는 미지수이며, 영화에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부정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극적으로 운명의 여신은 그들에게 미소를 건넨다. 수용소 내의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자신들의 자유가 보장받게 되었다. 우연에 의해서 상상적 차원에 머물던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내부적 갈등은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브루거의 말대로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반란을 감행했다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희생 또한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전체의 종말을 고하는 그런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또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위조지폐를 만들었던 유대인들과 반란을 실현시켰던 유대인들이 대조된다. 반란군의 겉모습은 처절한 사투를 이겨낸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몸 곳곳에 묻은 검댕 자국들과 혈흔은 승리의 이면에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현전했다. 반면에 위조지폐를 만들면서 상대적 안위를 누렸던 자들의 번지르르한 외양은 반란군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들이 같은 유대인이라고 한들 나치에게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씻어낼 수 있을까? 실패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행운이 따랐지만, 반란군에게 그들은 집단 이기주의의 표상이었다. 나치에게 겨누었던 총구가 그들에게 향한다. 그때 위조지폐를 만들었던 유대인들은 서성거리고 당황한다. 어찌할 줄을 몰라 머뭇거린다. 반면 그들의 망설임을 뚫고 나온 브루거는 자신의 몸에 각인된 상징적 징표, 반란군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죄수번호를 거침없이 들이 민다. 브루거는 분명 위조지폐를 만드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떳떳했다. 그가 보여준 행동들은 그에게 어떤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다. 그를 본 반란군은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총구를 살며시 내린다.


 '양심'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자신의 선한 신념이나 기치관 그리고 어떤 생각에 정초해 행동했을 때 어떤 거리낌도 없는 당당한 상태이다. 이 당당함은 자신은 어떤 문제도 없다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인간이 오직 자신의 이기심대로만 행위했을 때 경제적 효율성은 최대치에 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철학자로서 <도덕감정론>을 집필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어 무한한 이기심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고난 도덕적 감각을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셔머의 주장도 이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 이미 인간이 선하다는 가정 하에 경제적 관념을 구성한 것이다. 21세기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주체로 행위하며 실용주의적 행동주의의 관점에서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에 바쁘지만 그 안에서 양심은 어디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때나 브루거처럼 행동한다면 영화에서처럼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착한 사람은 호구라는 통념은 현재에만 적용되는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어리석음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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