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에는 구멍이 있었어,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깊은 구멍 말이야 그래서 마음이 슬프고 뭔가를 갈구하는 거야, 인간은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려 할 거야 어느 날 이 세상이 더는 줄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언제부터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인류는 언제까지 이 감정과 함께할 것인가? 이 감정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에 앞서 무수히 뻗어져 나가는 가능적 환상들을 잠식한다. 인류의 문명에 '찬란'이라는 밝고 열려 있다는 느낌을 연상시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으려면, 인간의 역사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도야의 과정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형성하는 음지는 여전히 빛의 밝기가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꽤 오래전부터 심적 체계에서 막대한 지분을 행사하는 원초적이고도 원시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모든 것들 앞에서 움츠러든다. 얼굴은 굳고 창백해지며 그 얼굴의 입에서는 무지의 눌언들이 끝없이 세어 나온다. 그리고 그 말들은 자신의 주변을 전염시킨다. 질병처럼 퍼져 나간다. 주변부를 급속도로 잠식하며 심지어 존재함 마저도 은폐시켜버리는 부정성의 극치이다. 이것은 여전히 불명료하다. 그나마 이것의 유용성이라 함은 진화론적 논리로,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위험 앞에서 조심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공포의 시발점은 사냥 도중 도망자들과 마주했을 때이다. 그 순간 주인공은 그것에 빠져든다. 자신이 겪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경직된 표정과 흔들리는 눈동자들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사로 잡힌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칠 것처럼 예견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싹을 틔울 자리가 없다. 그의 옆에 든든한 아버지라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훈계는 자신의 공포가 금세 자신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주인공의 예민한 촉이자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개 짖는 소리가 멈추는 것이 죽음의 단말마이자 신호탄이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가혹적인 폭력은 모든 안정적인 것들을 처참히 무너뜨린다. 마을은 잿더미가 된다. 모든 것들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돌아간다. 함께 지내던 부족원들은 죽임을 당하고 주인공의 아버지마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과 이별한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아들아' 그리고 주인공에게는 '하마터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항상 조심스럽지만 공포스러운 것들 앞에서 항상 애처로운 존재이면서 조마조마하게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존재에 대한 망각, 곧 자기 자신의 가능성도 함께 망각된다.
그들은 갖은 모욕을 겪으며 끌려간다. 여자들은 노예로 남자들은 제물로서. 주인공 일행이 끌려간 곳은 더 발달한 문명이다. 그들이 살았던 촌락의 소박함에 비하면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진 곳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다. 그리고 그곳은 계급이 있었다. 제사장이 있고 왕이 있다. 평민이 있고 노예가 있다. 거대한 체계에 속에서 그들은 나약함을 보상받는다. 그들이 떠받드는 태양신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의탁했다. 두려움을 통제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미신에 기대는 것이다. 평온을 바라는 행위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면 긴장 상태의 해소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거대한 틀을 유지시킴으로 대중의 공포를 막아냈지만, 그 실질적인 힘의 근원은 그들의 복종이었다. 샤먼의 암시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우리는 강인하다.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시간의 주인이 될 운명이며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운명을 타고났다.' 신이라는 미심쩍은 존재, 혹여나 단순한 기호에 불과할지도 모를 것에 의존해 모든 것들이 좌지우지되었다. 그렇다고 이를 파괴시킬 순 없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을 유지하는 힘이 파생된 곳은 몰개성적이고 피학적인 성향의 사람들의 본성적 갈망이며, 이미 일상적이다. 이 안에서의 갈망들은 안락과 피상적 평온이라는 보상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 믿음은 결코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는 믿음은 언제나 추문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것들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어떤 폭력적 사태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 불합리함은 개기일식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신이 노했다'는 비약적인 해석으로 오도한 것이다. 그 불합리함에 이끌려 주인공 일행들은 제물로 바쳐진다. 그 말에 의해서, 신의 갈증을 풀기 위해 제단 위에 피를 뿌리고 대중들은 환호한다. 어쩌면 샤먼은 그 시대에 대외적으로 숨겨진 탁월한 과학자였을 지도 모른다. 개기일식은 공전 주기에 의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사태지만 그것이 딱히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은 죽음조차 빗나간다. 무엇이 이 상황을 이끌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주인공의 차례에 주인공의 친구는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이라는 위로이자 일종의 체념을 건넨다. 그러나 주인공은 비관을 비관한다. '아니, 나는 못 떠나, 아직.' 이 말 한마디에 죽음의 여신이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하필 주인공이 죽을 차례에 달 뒤에 숨었던 태양이 빛을 비추었다. 이런 절묘한 우연!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우연, 아니면 운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겨우 죽음을 피한 주인공은 또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피해야만 하는 수모를 겪는다. 즉, 여전히 '하마터면'이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폭포와 마주했을 때 주인공은 용기를 낸다. 그리고 뛰어내려 살아남은 주인공은 자신이 살았던 숲으로 돌아온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세계가 자신을 둘러싸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담긴 포부를 외친다. '나는 표범 발, "부싯돌 하늘"의 아들, 사냥꾼이지. 이 숲은 나의 것이다. 나는 두렵지 않다.' 주인공은 '하마터면'이라는 자신을 지칭하는 부정적 기호를 벗어던진다. 그리고 자신의 원래 이름, 본래적이라 할 수 있는 '표범 발'로 돌아온다. 언제나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면서 각성의 순간을 맞아들인다. 영화에서 죽음은 언제나 나약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들이닥친다.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펼쳐질 법한 모든 가능적 상태들을 묵살시키면서 아무런 규정도 되지 않은 무언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반면 주인공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한다.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며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던 모든 것들을 펼쳐 낸다.
두려워하는 자는 어떤 가능성에도 머물지 않으며, “주위세계”가 사라져 버리지는 않지만 더 이상 그 주위세계를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만난다. - 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처음으로 던지는 화두는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이다. 두려움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펴내는 과정 속에서 위기들이 극복된다. 위기와 공존하는 두려움은 애매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애매함은 일시적인 것도 사실이다. 지나가면 기억이 왜곡된 마냥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애매해진다. 하지만 일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이것에 항상 건네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게 되는 무성으로 직결된다.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전반적인 맥락을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런 결정적 규정들은 행동의 근거로 작용한다. 하나의 직유가 있다. 삽으로 땅을 계속 파헤치면서 근거를 찾는다. 그리고 땅을 파헤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근거가 있다면 사용하던 삽을 등 뒤로 던져버린다. 그 때부터 생각하지 않고도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파헤친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솓아 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의 마침표를 찍겠다.
"어떤 운동들은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앞에서는 누구나 수동적인 인내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한에서 이 인내자는 다시 어떤 유충이나 맹아일 수밖에 없다. 진화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퇴화를 겪은 것만이 진화하고, 말하자면 안으로 말린 것만이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ps. '존재하지 못함', 즉 비-존재와 같은 철학적 수사는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질병과 함께 등장한 정신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굉장히 현대적인 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연의 법칙 내에서는 '생존 또는 죽음'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갈린다. 외부적 환경에 따라 감정적 표현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그것 각각은 불안과 공포이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내적인 문제에 귀인하며, 공포는 외적인 상실이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라 보았다. 원시의 조상들 그리고 여전히 정글의 법칙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공포가 생존을 위한 가장 큰 동인이 된다. 반면 불안이나 우울증은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하나의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우울한 생명들은 무기력하게 존재했을 것이고 포식자에게 잡아 먹혀 유전적 개체를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불안과 공포는 사돈의 팔촌 정도로 이해된다. 인간의 불행은 방구석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 있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공허한 안락이 일종의 사치 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것도 꽤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