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가 상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는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환상적인 것들이 자기 자신의 것인 마냥 느껴진다. 인간이 미래로 향하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름 어떤 구체적인 행로를 생각해볼 순 있겠지만 거쳐가야 할 길에서 발생할 일들은 미지수이다. 그저 자신이 몸이 향하는 곳으로, 의식이 향하는 곳으로, 그리고 믿음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이다. 우연성 앞에서 아무런 예지조차 없기에 어떤 기대들도 막연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대감에 의해 시작점에서는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끌어안고 나아간다.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믿음은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이런 정신적인 행동들의 의미를 절하시킨다면 자신이 만든 허상들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라며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면 상상의 본질이라 함은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맥스는 방랑자로서 모든 것들을 잃고 나서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는다. 그저 불모지가 된 지구를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보다도 그를 괴롭히는 것은 환영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이다.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벌레처럼 그의 뇌리를 파고들면서 간질이고, 그가 죽기라도 바라는 듯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소리의 주인들이 그의 행로에 훼방을 놓는다. 그는 끊임없이 정념적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들은 그가 희망하던 것들이 거세당한 흔적들, 그가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의 기억 속에 살면서 그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맥스 또한 그것이 트라우마이고 허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말속에서 명백해진다. '머릿속으로 되뇌어 본다. 그들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다 죽었으니까.' 영화는 맥스가 임모탈의 수하들에게 제압당해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은 핵전쟁으로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되어버린, 인간이 살기에는 극악의 조건이 되어버린 지구와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맥스가 끌려간 '시타델'은 임모탈의 압제적인 권위가 군림하는 곳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은 낡아빠진 견해가 되었다. 임모탈이 생명의 필요조건인 물을 독점하면서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한다. 물을 방수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벌떼처럼 모여든다. 그때의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고통이고 처절한 몸부림이다. 최악의 세계에서조차 인간은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이것이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최악의 현존이라고 한들 인간이 살고자 하는 것은 역설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애매성이다. 그리고 여기에 희망을 바라는 자가 존재한다. 퓨리오사는 어린 시절 임모탈에게 납치당한 후, 그의 밑에서 일하면서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 그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을 모색하며, 그녀는 임무를 빌미로 임모탈에게서 도망친다.
그녀가 희망이 있는 곳으로 지목한 장소는 '녹색의 땅'으로 그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 있다. 그저 서쪽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쪽으로 내달린다. 문제는 지금에 와서 그곳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희망을 찾아 황폐하고 드넓은 사막을 질주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신기루와 같이 흐릿하게만 표상된다. 이런 퓨리오사의 모습은 나그네와 같고 그녀가 바라는 낙원은 오아시스와 같다. 사막 위를 걷는 나그네는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환상을 두 눈으로 인지하지만, 막상 자신이 도착한 곳은 꾸준히 이어지는 황폐한 사막이고 오아시스는 또 저 멀리 떨어져 다시금 나그네를 유혹한다.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알고 허망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를 떨쳐버리고 다시 신기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상황의 연속은 주체를 절망으로 이끈다. 존재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인간은 희망이란 것을 버릴 순 없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공허에 정체되어 김이 빠져버린 것과 같은 삶을 감당해야 하며, 이는 죽지 못해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임모탈로부터 계속 내달음질 친 끝에 퓨리오사 일행은 기억 속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오아시스는 없었다. 거친 행로에서 그녀가 지나쳐 왔던, 음침한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만 감돌던 오염된 땅이 그들이 바라던 희망의 땅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퓨리오사는 사막의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다.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절규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지를 되새긴다. 희망이 없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또 나아가야만 한다. 의지의 충족은 새로운 의지로, 욕망의 충족은 새로운 욕망으로, 의욕의 충족은 새로운 의욕으로 나아간다. 니체는 이를 인간의 본성으로 개괄하여 '영원회귀', 즉 끊임없이 생성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인격으로 규정하였다. 나아가는 매듭의 연결 속에서 끝없이 성취하려는 역동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영원히 만족을 열망하는 불만족과 또다시 신기루와 같은 것을 좇아야 하는 불가침적 규율이 놓여 있다. 퓨리오사는 소금사막을 건너 다시 더 서쪽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신기루를 향해 다시 내달리던 퓨리오사 일행을 맥스가 가로막는다. 맥스는 퓨리오사에게 말한다. '희망을 품는 건 실수다. 이미 망가져버린 삶을 고칠 수 없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고선 맥스는 다시 '시타델'로 되돌아가자고 권한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신기루와 같은 낙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자유를 찾기 위해 도망친 폐허로, 그 곳에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진실이 있다며 되돌아가고자 한다. 퓨리오사 일행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 임모탈의 죽이고 그 시체를 '시타델'에 가져간다. 독재자의 죽음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체계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기표이다. 퓨리오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로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준다.
희망 없는 삶을 떠돌고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최초의 인류-
인간은 우연성이라는 신비스러운 기적일 수도 있고 과격한 횡포일 수도 있는 것 앞에서 주춤거리는 존재이다.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허덕일 때 그것이 절망인지도 모를 때도 있으며, 합리화된 형태로 절망을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절망은 그 어떤 지향성도 죽이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모든 우연한 일들의 연속으로 절망한다는 것이 희망을 되새김질하는 일이랑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희망은 절망과는 무관하게 덩그러니 항상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퓨리오사가 과거의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서쪽으로 달릴 수 있었듯이, 그리고 폐허인 줄 알았던 광폭한 질서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과 같이, 판도라의 상자에 모든 절망이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희망이듯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마따나 진리에 도달하려면 사람은 모든 부정성을 통과해야만 하지 않는가. 희망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희망이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자아에서 근거가 알현된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메시지들을 던지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애매모호함에 대한 징후로 의식이 우수들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망가지지 않은 세계는 그 자체가 희망이고 이는 곧 '살아있다'는 사실로 연역되지 않을까.
ps. 영화 중반부부터 맥스가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고독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고 또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일-그것이 절박한 상황일지라도-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경증적인 모든 증상들은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주기만 하면 꽤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종국적으로 맥스는 결국 그들을 떠나 독존을 선택한다. 또다시 그는 환영에 사로잡힐 것이다. 한편으로 그 선택은 자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 죄책감의 표상일까. 아니면 거세당한 희망의 말로를 잊지 않기 위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