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Aug 05. 2019

Memento mori, 영원히 존재하는 삶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희생에서 연역되는 존경심 (스포주의)

 소크라테스도 죽었듯, 어느 누구나 죽는다. 이 말은 아직까진 유효하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호모 데우스>는 제목 그대로 인간이 '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에 이르러 열정적인 맹신을 얻고 있는 과학이 '영생'을 인간에게 가져다줄까? 영원히 살면 행복할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이란 것이 꽤 허무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죽음의 현전을 상기하는 것이 왜 새로운 활기를 얻는 원동력으로 작용을 할까? 나는 죽으니 시간은 너무나 소중해! 간단하게 갈무리되는 말이 진실되도록 소중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에서는 '죽음'에 대해 보편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만 상반된 행동 방식을 취하고 있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퀄을 낳은 아버지인 '에고'이고 나머지는 키운 아버지인 '욘두'이다.

 

 퀄의 친아버지인 '에고'는 셀레멘티얼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그 존재는 신이다. 신? 영원, 무한, 창조, 절대 등등. 이런 관념들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완벽한 존재. 하지만 창조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는 첫 등장에서 퀄 일행을 좇고 있는 함대를 한 번의 손동작으로 궤멸시켜버리는 파괴적인 힘을 과시한다. 영화에서는 '신에 필적하는 자'라고 명명된다. 특히, '에고'라는 이름과 빛을 사용한다는 설정은 꽤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Ego의 뜻인 '자아', 그리고 '빛'을 통해 플라톤의 '태양의 비유'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태양은 그 자체로서 '선함'을 의미한다. 어두운 음영들로 덮인 곳을 밝히는 그런 가치적 존재로서, 선의 이데아는 세상을 비춤으로 어둠을 걷어내는 것인 본질이다. 에고도 영원한 삶을 사는 존재이면서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영원히 사는 존재의 불행은 무엇일까? 영원 앞에서는 어떤 시간의 양을 들이밀어도 한 점으로 축소된다. 그 앞에서는 어떤 시간대들도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원성은 또 다른 비극을 내포한다. 드넓고 광막히 펼쳐진 우주에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마주한 고독은 에고를 존재론적인 고찰로 몰아넣는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면서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의 기억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원래 그런 것이다. 자연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특별한 목적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누구라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동기에 대해서 말할 순 있겠지만,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물음을 가질 수 없다. 또한 에고처럼 영원히 산다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아끼는 것이다. 그런데 에고에게 내일이란 허망한 것이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철학의 가장 큰 문제인 '우울'을 달고 살아야 하는 숙명이다. 끝없이 공허하기만 한 그의 삶, 그리고 언제나 다시 혼자가 되고 마는 운명. 영원히 지속될 고독과 마주한 에고는 고독이 선사한 자유를 활용하기 위해 목표를 잡는다. 영화에서 에고의 대서처럼 '목표가 있다면 공허하지 않다.'


 그의 목표란 온 우주를 자기 자신으로 덮는 일이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빛으로 우주의 광막한 공허를 비추면서 공허를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에고의 이데아는 참된 의미가 변절되었다. 에고의 뒤틀린 욕망은 행성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행성은 또 다른 에고가 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생명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파괴시킨다. 불모지가 된 행성이 말해주는 건 에고의 고독한 자아의 파괴성이다. 고독한 자는 타자에게 복종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보상한다. 자신이 타인보다도 더 우월한 존재라고 인지함으로써 고독을 해소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방식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고독을 벗어나는 효과를 누린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무가치함과 비-존재함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개의 경우 알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자식인 '퀄'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에고에게 퀄은 사랑하는 자식이 아닌 위업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영원한 삶을 살 줄 알았던 존재에게도 죽음이 임박한다. 퀄과의 싸움에서 무기력해지고 그루트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영원할 줄 알았던 영원함의 끝자락을 예견한다. 그 징후로 그의 얼굴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 잡힌다. 공교롭게 찾아온 죽음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은 영원히 살 줄 알았던 존재의 오만함이며 오해이다.


 '에고'에 반해 '욘두'는 죽음에 대한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다. 욘두는 1편에서부터 비중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퀄과는 애증의 관계로 그려진다. 그는 퀄에 대해 과격한 표현을 일삼는데, 그것이 욘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며 매몰차게 굴면서도 항상 퀄을 아낀다. 욘두는 에고의 의뢰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퀄을 양도하는 것을 거부한 채 퀄을 자식처럼 키운 것이다. 하지만 욘두의 선행은 의뢰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왜곡되어, 그의 행적은 온갖 오해로 점철된다. 그러면서 동료들과 갈등을 겪는다. 무리의 수장인 스타호크는 욘두의 죽음을 아무도 애도하지 않을 것이라며, 욘두가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말을 들은 욘두의 표정에서는 불안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욘두는 끝내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료들의 비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올곧은 선행을 말하지 않는다. '사필귀정'이라는 옛 사자성어대로 모든 일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욘두의 행적은 금세 오해라는 것이 밝혀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퀄을 지켜낸다. 영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설정이지만 딱 하나의 우주복이 주어지고 그것을 퀄에게 입힌다. 그리고 자신은 광막한 우주의 찬기 속으로 내던져진다. 죽음의 싸늘함을 맞아들인다. 이 자체가 죽음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지 않은가. 죽음보다도 더 한 상실은 없다. 죽음에 대한 보편적 규정을 탈자한 존재는 그 어떤 상실 앞에서도 무덤덤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욘두는 그런 지극히 높은 존재가 아니었다. 욘두가 오롯이 보여준 것은 퀄에 대한 사랑이었고, 그 희생의 이편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 존재했다. 이타심의 배후에 염세주의와 이기주의가 있다는 칼 융의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설들은 사랑이라는 애매하고도 위대한 긍정 속에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희생적 인간의 삶은 자신의 삶에 대한 소중함보다도 더 가치를 가진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욘두의 죽음을 화장하고서 그 재가 우주에 흩뿌려진다. 욘두의 실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욘두와 오해를 빚은 그의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화려한 폭죽을 수놓으며 우주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 낸다. 그러고선 그들의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욘두는 정서적으로 유대를 맺었던 사람들의 기억 언저리에 살아간다. 남은 사람들의 긍정 속에서 그의 행동이 충분히 가치가 있었음이 증명된다. 욘두는 비실체적인 채로 그들의 기억 언저리에 살아간다. 그의 존재가 타자로 이전됨으로써 육체는 소멸되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 그럼으로써 존재는 죽음을 초월한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초월적 현존의 확실성은 타자성의 영역에서 가능해진다.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욘두를 기리는 방식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간다. 더 이상 그 기억에서 변화는 없다. 그럴 필요조차 없는 것이 그의 모습은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의 탁월함을 비춘다고 한다. 에고와 욘두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명체의 본능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의 방식은 극적으로 다르다. 에고가 자신의 물질적인 힘을 과시하고 싶어 했던 반면 욘두는 희생이라는 숭고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선의 이데아란 타인을 위하는 '윤리'이기도 하다. 가끔 유튜브를 통해 '스탠 리'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본다. 항상 주변의 어떤 사소한 낱말이라도 읽으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책을 많이 봤었다는 그를 이제는 영상으로만 만날 수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창시한 그는 2018년 11월 12일 작고했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마블의 세계관은 그 인기가 식지 않는다면 후대에도 계승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막이 내릴 때까지 '스탠 리'도 여전히 살아 숨 쉰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매거진의 이전글 가학성에 대한 광적이고 지적인 호기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