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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21. 2019

가학성에 대한 광적이고 지적인 호기심

<원초적 본능> 광기의 양의성에 대해서 (스포주의)

 영화 속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떠오른 역사 속의 거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다빈치는 인간의 신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천재이다. 그 호기심에 못 이겨 무덤의 시체까지 들추어내면서 자신의 실험대에 올린 천재이다. 그러나 인류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에 반해 그의 행동은 충분히 비정상적이었으며, 광적인 호기심으로 인한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을 실제로 목격한다면 어느 누가 그 사람의 행동을 옹호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자인 제레미 벤담이 자신의 시체를 공적으로 써달라고 기증했다는 사실만이 다빈치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접적으로만 그의 삶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의 그의 광기는 천재성이라고 이해되기 쉽다. 영화에서 캐서린은 그런 광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욕정을 나누던 장면을 상기해보면, 정사 장면에서 남자가 아래에 있고 여자가 위에 있는 체위이다. 그리고 남자는 피학적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 남자는 성행위를 하는 동안 두 팔이 묶인 과격한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정렬적인 행위에 매혹되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은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음송곳을 집어 든다. 그리고 절정에 이른 느낌과 동시에 날카로운 송곳의 끝은 사정없이 남자의 몸체를 난도질한다. 좋은 시간이라기엔 그 끝은 극악무도한 살인으로 귀결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특히 이 정사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천장에 거울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두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녔다. 이는 지각의 명석한 한계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란 거울에 비친 빛의 반사된 상이거나 아니면 카마레 렌즈에 의한 빛의 굴절된 상이다. 거울이나 카메라는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구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수단이다. 하지만 거울 속에 맺힌 상을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거울 속에 존재하는 내 모습은 내 실제 모습을 모방한 파생 실재이다. 그 수단만으로는 두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우월한 이미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광학적 기술로 만들어 낸 사진의 이미지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건 미학적 예찬론일 뿐이다.


 첫 정사 장면에서 캐서린은 피학적인 쾌감을 즐기는 사람에게 피학성의 가장 끝이라 할 수 있는, 즉 고통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선사한다. 살해당한 남자는 피학적 성행위를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피학성의 끝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거울에 비친 대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 순간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은 피학적 쾌감을 느끼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피학성을 관찰하기에 이른다. 주체적 피학성과 객체적 피학성이 동일화됨으로써 남자는 더 높은 쾌감을 느꼈을까? 누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는 증거로 그녀의 호기심은 자신이 죽인 남자에게서 그쳤지, 닉 형사에게로 이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닉 형사는 코카인에 취했을 때 범인이 아닌 일반인을 실수로 죽인 경력이 있는 형사이다. 그런데 그의 문제란 마약에 취했을 때 닉은 기묘하고도 짜릿한 쾌감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잊지 못해 지속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가학적 주체로 거듭난다. 대상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성행위를 할 때도 과격한 행위를 일삼는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때의 쾌감을 재현해 내고자 하며 항상 충동에 몸서리친다. 캐서린은 그런 사실을 모두 간파한 채로 닉에게 접근한다. 닉이 수사를 목적으로 캐서린의 집에 찾아갔을 때, 닉에게 사람을 죽였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묻는다. 이 질문 그 자체로 광적이다. 광적이지 않다면, 윤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결코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닉에게 던진 것이다. 그녀가 던진 질문의 의도는 가학성으로 인한 쾌감이 어땠는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첫 정사 장면에서 죽었던 사람이 거울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처럼, 타자를 죽일 때 쾌감을 느꼈던 닉 형사가 자신의 죽음을 보고서도 쾌감을 느낄까? 마찬가지로 캐서린은 닉 형사와 정렬적인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죽이진 않는다. 왜 형사를 죽이지 않았을까?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한데, 천장에 거울이 없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학대성의 여러 감정 양태를 관찰하고 싶은 욕망을 지녔다. 만약 거울이 있었고 닉을 죽였다면 닉 형사는 자신이 죽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울이 있었다면 자신의 욕망을 해갈하기 위해 형사를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캐서린은 자신의 정사에 의한 쾌락보다는 형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쾌감에 대해서는 주체가 아닌 이상 결코 알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얼굴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뿐이다.


 얼굴은 최초의 의미 작용이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를 하면서 쓰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만 그런 언어적 의미들은 감정을 모사하는 의미를 전달할 뿐 감정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의미 작용은 언어보다도 더 명확하고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가령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을 담아내는 표현들이 존재하는데, 슬픔, 분노, 기쁨, 환희, 희열, 정렬, 비애, 황홀, 애잔 등등. 하지만 이런 개념적 표현들 보다는 우수에 젖은 눈동자, 잔뜩 찌푸린 미간, 활짝 만개한 웃음, 휘둥그레진 눈 등의 얼굴 표정을 묘사한 표현들이 더 확실한 감정적인 부분들을 전달한다. 다빈치는 아버지의 장례식 때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가도 자신이 찡그린 표정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궁금했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올 정도로 말이다. 또한 캐서린이 자신의 호기심을 합당하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살인 조차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실제로, '키메라'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들의 유전 조직을 면밀히 연구한 후 온갖 동물들을 산체로 해부하고 다시 접합하는 실험을 시행한다. '키메라'를 왜 만들고 싶은 지에 대한 대의적 명분 따위가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보기에는 맹목적으로 그런 생물을 만들고 싶어 할 뿐이다. 이런 연구는 윤리의 시험대에 오르기 십상이다. 물론, 이런 과해 보이는 연구들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 실험들도 정도의 차이로 귀결될 뿐이다.


 '배우고 배우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의 말처럼 그녀는 앎을 충족하면서 타인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은밀한 황홀감을 누렸을지 모를 일이다. 한 개인에게 주어진 광적인 호기심은 축복일 수 있겠지만 그것에는 저주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다. 그것이 충족되었을 땐 미칠듯한 희열을 느끼겠지만 윤리를 완전히 무시해버릴 정도의 과격함에는 파국의 전조가 스며들어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은 그녀의 광적인 호기심에 비춘 추론적인 의심으로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런 광기가 인류를 진보시킨 지식의 발원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산을 보기 위해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야 하는 행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는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돋보였다는 것이지 않는가. 인류에서 천재라 불린 사람들의 생애는 대체로 불행에 근접해 있고 괴기한 행위들로 채워져 있지만, 강박 관념에 가까운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평생을 기여했고 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인간은 알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에 말미암아 영화의 제목인 '원초적 본능'은 성적인 쾌감이나 또는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닌 '열광적인 호기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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