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적 환상에서의 주체
<크리드> 프로이트적 관점으로 바라본 정체성의 의미 (스포주의)
노력하는 인간, 열정적인 인간상은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만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삶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는 염세주의적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적중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나 자신의 내적인 고통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고통스러움을 개선시키고 거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화에서의 주인공 '크리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사고를 배양해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진정 자기 자신의 본래성이라 할 수 있을까?
크리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유아기를 보냈다. 너무나도 어린 크리드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세상에 대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누군가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택한 것은 '폭력'이다. 소년 교도소에서 매일 다투었고 폭력을 일삼았다. 명망 있는 복서였던 아버지의 유전자는 그를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양어머니를 만나 꽤 괜찮은 집에 입양되어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30살이 된 크리드는 승진을 앞두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복서가 되기로 결심한다. 급격한 변화를 선택한 이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무의식이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부친 살해' 콤플렉스 정도로 공시되지만,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얻고 싶다는 리비도적 충동으로 갈무리 짓는 것은 정신 분석의 너무 과도한 해석이 아니냐는 비판이 실린다. 남아에게 발견된다는 성적 충동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려면 그리고 더 적절한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성적인 욕망'이 아닌 '욕망' 자체로 해석해야 한다. 리비도를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은 칼 융의 생각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적 콤플렉스는 '욕망하는 대상의 부재'와 '의존적 관계의 단절'이다.
남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엄격하고 근엄하면서 또한 우상시된 존재이다. 특히, 가부장적인 제도 하에서 더 그렇다. 어린 시절의 아이에게 아버지는 슈퍼맨 같은 존재이다. 무엇이든지 척척 해내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이다. 나약하고 여린 어린아이에게 아버지란 의존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아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인식적 규정이 파괴된다. 커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상상해오던 슈퍼맨처럼 대단하지도 않고, 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보다 점차 왜소해지고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모습을 인지하게 된다. 한 편으로는 측은함마저 든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의 우상을 지워버린다. 억지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서 항상 의존해 있던 안식처가 없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의 일화에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른다. 그러면서 자신은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직유적으로 자신이 의존해 있던 안식처가 사라진 남아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게 된다. 이는 칼 융의 생각과도 일맥한다. 서양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믿음을 얻었던 '예수'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그를 롤모델로 삼아 따르면 됐지만 예수는 30살에 죽었다. 그래서 30살 이후엔 자신이 의존할만한 대상이 없어서 어떤 행로로 자신을 이끌어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콤플렉스는 자신이 의존하거나 또는 유대 관계를 맺는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 맺음이 단절되었을 때 발생한다.
크리드는 보통의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게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크리드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할 여지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저 욕망하는 대상의 부재로 인해 그 공백을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가득 채웠다. 욕망의 축적은 오이디푸스적 환상을 만들어 냈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버지의 영상을 보면서 복싱 연습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훌륭한 복싱 선수였던 아버지의 그림자에 크리드는 가려져 있었다. 자신이 복서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다. 또 복서로 데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 있는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면서 위축되는 모습도 보였다.
영화의 끝은 희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크리드는 자신만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예로서가 아닌 나 자신을 회복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자기 자신이 어느 대상에도 의존하지 않고 주체로서, 두 다리를 안착시킬 단단한 대지를 만들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에 자연스레 겪는다. 하지만 크리드는 남들과는 다르게 아버지가 부재했었기 때문에 이것이 뒤늦게 찾아왔다. 무의식의 반작용으로 크리드는 나이가 들어서야 그 의존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환상이 궁극적 실재라는 프로이트의 말에 말미암았을 때, 크리드의 삶이 사회적으로 꽤 성공적인 궤적을 그려내면서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전에는 몸만 어른이었고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