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딴따라 Jun 13. 2022

하찮은 불행

노안이 건넨 이야기

“노안입니다”.

그때 나이 44세. 몸에 핏된 옷이 봐줄 만하고 또각또각 경쾌한 뾰족구두 소리를 즐기던 때다. 시야가 흐려 시력 검사차 찾은 안과는 노안과 백내장을 선언했다. 좀 빠르긴 해도 일반적인 현상이라며 위로하던 의사는 내게 다초점 안경을 권했다. 하지만 노화를 맞이할 준비가 없던 나는 다초점 대신 안경 도수를 바꿨다.


“처음엔 노안이라고 하면 다들 거부해요. 편한 대로 하세요. 하지만 일 년 못 가 오시게 될 거예요.”


희끗희끗한 수염이 난 의사는 조용히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7개월이 못 가 결국 안경점을 찾았다. 이번엔 가격에 놀랐다. 망설이던 나는 서류를 볼 때마다 자꾸 인상 쓴다는 주위의 말이 생각나 결국 생애 첫 다초점 안경을 맞췄다. 안경테는 고를 것도 없이 가장 무난하고 싼 걸로 하고선 일주일 후 안경을 찾으러 갔다.      


책을 펼치면 글씨가 보이고 횡단보도 건너 간판이 보이니 시야가 훤했다. 알이 두꺼울까 봐 우려했던 거와 달리 원래 안경과 차이가 없었다. 처음 다초점을 쓰면 초점 맞추는 데 애를 먹는다지만 어떻게든 보려고 눈을 찌푸리고 목을 빼던 습관이나 돋보기와 안경을 번갈아 끼던 수고에 비하면 백배는 편했다. 희미한 형체가 보이니 세상이 또렷하다. 미간의 주름은 사라졌고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안경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많은 게 달라졌다.     


꿈꾸는 세상이 올까요?   

누군가 물었다. 돌이켜보니 세상은 '오다', '가다'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개인의 시간이 흐르고, 흐른 시간이 겹겹이 쌓여 세월이 되고 세상을 만든다. <청춘 독서>의 유시민 작가는 평범한 다수가 스스로를 구한다고 했다. 보통의 내가 특별해지면 그런 내가 모여 평범했던 우리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닐까. 나와 우리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고, 그럼 꿈꾸는 세상도 형체를 드러낼 수 있겠다 싶다. 눈에 맞도록 안경을 바꾸자 세상이 선명해지듯, 변화의 시작은 가까이에 있다.


미래는 누구한테나 백지다. 오늘 어두우니까 내일도 깜깜할 거라며 섣불리 좌절하지 말자. 원치 않는 노안이지만 안경의 도움으로 시력을 찾듯 내일의 가능성을 믿으면 불행한 오늘을 견디기가 조금 수월하다. 희망과 불행이 이복형제라면 불행을 끌어안느니 부질없는 희망으로 살고 싶다. 불행을 하찮게 여기는 습관을 들이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두 번째 안경 이후로 밤이면 불빛이 퍼져 보이고 눈이 시큼하다. 백내장 처방을 받으면서 안경을 또 바꿔야 하나 묻자 가격도 비싼데 조금 불편한대로 쓰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노화를 해소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속도 조절하며 받아들이라는 말로 들렸다. '좀 덜 보면서 살아야겠구나.' 악착같이 덤비며 살지 말고 흘릴 것은 흘리라고 몸이 말한다. 나이 듦은 내려놓음이라더니 영락없다. 안경으로 철학을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갱년기 연금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