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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Jan 20. 2023

기억이 무기가 될 때까지

불행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으로 눌러쓴 편지 쓰는 이의 오롯한 정성때문에 읽는 행위조차 성스럽다.

  

핸드폰 알람에 맞춰 하루를 시작한다. 네모난 화면 속 나를 찾거나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발송된 단체 문자, SNS에 남겨진 흔적, 오늘의 뉴스가 가득. 알람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몸이 싫어 무음모드로 돌린다. 새 소식을 알리는 친절한 '알람'일방적인 노크.  




매번 기억이 장난을 친다. 철 따라 새순이 나고 잎이 떨어지면 먼저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다.봄은 엄마의 젖 같은 익숙한 비릿함을 내고, 후각은 곧  오래된 불편한 기억 떠올린다.

 


어린 내게 크리스마스는 항상 추웠다. 눈은 쉼없이 내리, 장화를 신은 발은 곱았다. 12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 긴 겨울 방동안 추위 때문밖에 잘 나오지 않는 친구들 이듬해 설이 지나야 한두 명씩 보인. 그때까지 나의 겨울은 무료한 동면이다.


캐럴 소리가 소란한 대로변 모퉁이를 돌면 인적 없는 골목이 나온다. 나는 몇 가닥을 이은 고무줄을 전봇대에 묶고 혼자 고무줄 놀이하다, 얼기 시작한 눈두덩 위에 발자국을 내거나 쇠꼬챙이로 흩트리지만 이내 심심하다. 집에 돌아와 열 번은 넘게 읽어 모서리가 해진 책을 만화 영화가 시작할 시간까지 또 읽는다.


방바닥은 딱 세 뼘따뜻하다. 누렇게 그을린 장판도 딱 세 뼘이다. 불을 땐 아랫목은 지옥 불, 숨을 내쉬면 입김이 허연 윗목은 시베리아다. 이불자락을 끌어 올려 눈만 남기고 온몸을 감싸면 티비를 볼 준비가 끝난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저녁 밥때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다른 방송을 보려고 차디찬 다이얼을 돌릴 때 닿는 오싹한 금속 느낌이나 간신히 데워진 이불 속이 서릿발같은 공기와 섞이는 게 싫었. 뜨거워진 세 뼘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도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는다. 올해도 작년, 재작년과 마찬가지로 스크루지  영감재방이다.     


를 보다 지루해지면 아빠의 늦은 퇴근을 기다린다. 일 년에 두 번,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에 아빠의 회사는 별 포장지에 싸인 종합 과자 세트를 선물한. 아빠의 손에 들린 과자 상자가 펼쳐져야 드디어 내게도 평일과 다른 특별한 날이 시작. 작년에는 롯데, 올해는 해태 과자다. 물컹한 양갱은 싫지만 보나 마나 오빠는 나더러 먹으라 할 것이다. 하나뿐인 껌을 슬쩍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광고에서 보던 고급진 사브레 과자와 버터링에 설렌 나는 오빠와 한참을 씨름한 뒤 내 몫을 챙겨 서랍에 숨긴다. 오늘 밤과 내일, 아껴 먹으면 일주일 이상 먹을 수 있다. 과자가 남아있는 동안 내 일상은 조금 특별진다.


크리스마스이브 날까지 야근하고 다음 날도 일하러 나가기 위해 밥을 먹자마자 잠든 아빠의 낡은 잠바에선 겨울 바람과 밥벌이의 고단함이 섞여 시큼한 냄새가 났다. 군것질거리가 생겨 나른해진 마음과 버터바른 과자의 고소 추위에 쩔은 아빠의 노동과 엉키면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먼지 향 맡다. 말해 준 사람은 없어도 산타는 티브이 속에서만 산다는 걸 안다. 이후로 나는 세상이 들뜨는 특별한 날엔 텅 빈 한기를 느낀다.     



겨울 한기는 두꺼운 외투에 구멍드나듯 제멋대로 춥.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날씨를 확인하고 나서는데도 현관문 밖 냉기는 이방인처럼 낯설다. 물컹한 과거의 기억은 에고없이 나를 헤집는다.      




202212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 먹은 나이덕에 어른으로 한 발자국 다가간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을 울어야 어른이 된다>라는 말처럼 나는 어른 진행 중이다. 계절이 바뀔 때 앓는 몸살이나 열심을 내고 살다 맥없이 과거의 회상에 멈추지만, 만 번을 더 살아 기억이 무기가 될 때까지 행복과 불행을 치룰 예정이.      


불행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예상 못 한 행운에 팔딱이는 가슴을 보니 나는 여전히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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