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선미적인 집

살림의 구조가 공간을 완성한다

by 상아

살림이 설계가 된 주방


2021년 11월 어느날,

누피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계절살림]의 저자 오선미 작가의 집을 만났다.

의뢰를 받자마자 마음이 설렜다.
‘집’과 ‘살림’은 닮아 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영역이다.
집을 만든다는 건 구조를 세우는 일이고,
살림을 한다는 건 그 구조 안에 일상의 질서를 채우는 일이다.


하지만 두 행위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삶을 다듬어가는 애정의 행위라는 것.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살림의 구조가 공간을 완성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00_main.jpg 살림의 온도와 구조가 만나는 곳, 주방.



살림이 설계가 된 주방

이 집의 중심은 단연 주방이었다.
책을 쓰고, 요리를 기록하며, 계절마다 다른 살림의 방식을 실천하는 작가에게
주방은 단순한 작업 공간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을 정리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이 집의 주방은 ‘예쁜 부엌’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살림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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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머무는 온도


베이지 톤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컬러로 주방의 타일을 결정했다.
처음엔 비비드한 컬러나 빈티지한 패턴의 타일도 고려했지만,
결국 오선미 작가의 결과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색은 ‘편안한 베이지’였다.


그 색은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햇빛을 받아들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하게 톤이 변하며
공간 전체에 조용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마치 작가의 살림처럼, 과하지 않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색이었다.

그래서 이 집의 주방은 화려한 배경이 아닌,

살림의 온도를 담아내는데 집중했다.


도면이 삶의 구조가 될 때


현장에서는 도면 한 장 한 장을 다시 확인하며

손이 자주 닿는 곳의 높이, 조리대의 깊이,
그리고 서랍이 열리는 방향까지
하나하나 생활의 리듬에 맞춰 조정했다.

종이에 그려진 선이 벽과 가구의 구조로 변하는 순간,
비로소 ‘살림의 구조’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디자인은 결국, 생활을 이해하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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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구조, 손끝에서 완성되다


커트러리의 크기에 맞춰 서랍 구획을 나누고,

그동안 작가가 수집해 온 다양한 커트러리들을 하나씩 넣는 즐거움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기성 수납함이 아닌,
합판 목재에 천연 스테인을 입혀 제작한 ‘선미적인 집’만의 커트러리 서랍이다.
한 칸, 한 칸 손으로 그린 도면 위에
숟가락의 길이와 포크의 폭, 나무 손잡이의 두께까지 기록해두던 작가의 메모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작은 종이 위의 스케치는
단순한 가구 설계가 아니라 ‘살림의 질서’를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생활 리듬이 곧 설계의 기준이 되었고,
그래서 이 주방은 누군가의 제품이 아닌 ‘오선미 작가의 손끝에서 완성된 구조’가 되었다.





프라이팬은 손잡이가 겹치지 않도록
서랍 안쪽에 전용 레일을 제작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꺼내고 닿는 도구이기에,
무게 중심과 손의 방향까지 고려한 설계였다.


서랍을 열면 가볍게 밀려나오는 팬들이

일상의 움직임에 정확히 맞춰 흘러간다.
‘살림의 구조’라는 말이
이토록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는 걸
이 집에서 처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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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와 트레이는 자주 쓰는 순서대로 세워 수납했다.
냉장고 상부의 쓰기 어려운 공간에는
거치대를 맞춤 제작해 자투리 공간을 살렸다.
매일의 동선을 따라, 자주 쓰이는 물건들이 가장 먼저 손 닿는 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건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살림을 대하는 태도였다.
생활이 흐르는 방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가구는 작가의 손길과 생활습관에 맞춰 설계된 결과물이었다.
그릇 하나, 수저 하나의 자리가 구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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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미적인 집, 그 이름처럼


이 집의 주방가구는 기성 제품의 틀을 따르지 않았다.
합판 그대로의 질감을 살려 도어를 제작하고,
여러 가지 색을 입혀 본 뒤 전체 톤과 가장 어울리는 한 가지 색을 남겼다.

그건 단순히 컬러를 고르는 과정이 아니라,

이 공간에 ‘작가의 세계’를 입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주방이 단순한 조리 공간이 아닌,
선미 작가의 작업이 시작되는 첫 공간이 되길 바랐다.


손잡이 또한 완제품이 아닌
원목가구 가공소에 의뢰해 새로 제작했다.
나무의 질감과 손이 닿는 감촉,
그리고 한 줄의 선이 만들어내는 라인까지
작가와 함께 고민하며 완성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손잡이는,
매일의 살림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손에 닿으며

“이건 나의 주방이다”라는 감각을 남긴다.

결국, 이 주방은 ‘오선미적인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살림이 디자인이 되고, 디자인이 다시 생활로 이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구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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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은 결국,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언어다.

그 안에는 손의 습관, 움직임의 리듬, 그리고 그 사람만의 질서가 담겨 있다.

이 집을 완성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살림이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가 다시 삶을 다듬는다는 것을.

이 집은 그 증거였다.
‘살림의 구조가 공간을 완성한다’는 말이,
이토록 아름답게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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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서도 프로젝트 속에서

각각의 집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공간의 형태와 구조로 이어졌는지

‘살아있는 디자인’의 기록으로 계속 이야기해보려 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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