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 시대를 넘는 대화

by 바나나 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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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동묘에 갔다가 중고 서점에서 『논어』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 낯선 듯 친근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500년 전 공자의 목소리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들려오는 듯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간결한 네 글자에 담긴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전의 언어는 이처럼 시간의 강을 건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언어는 우리의 일상 언어와는 다르다. 우리는 고전과 현대 사이의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해야 할까?


고전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는 분명히 다르다. 『논어』나 『맹자』와 같은 고전 텍스트는 극도로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세 글자는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로 번역되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단순한 번역으로 다 전달되지 않는다. 반면 현대 언어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명시적이다. 모든 것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차이를 반영한다.


조선 시대 한글 문헌을 보면 현대 한국어와의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나랏말미 중국과 달라..."라는 구절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어휘와 문법이 변했다.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주자(朱子)는 "강물은 흐르지만 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江水流而江不流)"고 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표현은 변해도 담고자 하는 본질적 의미는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동양의 '경학(經學)' 전통은 고전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학문이다. 이는 단순히 고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현재에 적용하는 작업이었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고전 텍스트를 해석할 때 "시대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因時制宜)"고 강조했다. 고전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지혜를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는 창조적 작업인 것이다.


『주역(周易)』에서는 '불역(不易)'과 '변역(變易)'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변하지 않는 원칙과 변화하는 현상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언어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표현 방식은 변해도(變易)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 경험과 지혜는 변하지 않는다(不易). 퇴계 이황은 "글자는 달라도 이치는 같다(字異理同)"고 했다. 시대마다 언어는 달라져도,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 경험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언어 변화는 전례 없이 빠르다. 신조어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문자 언어는 이미지와 영상으로 보완되거나 대체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 텍스트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속성'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시간의 검증을 거친 고전의 언어가 더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조선의 학자 성호 이익은 "한 시대의 유행어보다 천 년을 견딘 한 구절이 더 값지다(一時之流言 不如千載之一言)"고 했다.


고전 언어와 현대 언어 사이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여백'이다. 고전 텍스트는 많은 것을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같은 표현은 명확한 정의보다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다. 반면 현대 언어는 정확성과 명확성을 추구한다. 모든 것을 정의하고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각 시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고전의 언어는 암시하고, 현대의 언어는 명시한다.


교육에서 고전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단지 옛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는 것이다. 조선의 학자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고서(古書)를 읽는 것은 천 년 전의 현인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고전 언어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대화의 장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현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이다.


그러나 고전의 언어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공허한 고전 인용보다 실질적인 현실 문제 해결을 중시했다. 정약용은 "경전의 글자에만 매달려 그 의미를 잃는 것은 본말전도"라고 비판했다. 고전의 언어는 화석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지혜의 원천이어야 한다. 진정한 고전 읽기는 과거의 언어를 현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고전과 현대 사이의 소통은 양방향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고전의 언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현대의 문제를 고전의 지혜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 이황은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안다(法古知新)"고 했다. 고전의 언어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지적 자원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고전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깊이 있는 이해는 더 어려워졌다. 스마트폰으로 『논어』 전문을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공자의 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전의 언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깊은 성찰과 체험을 요구한다. 성리학자 이황은 "글은 곱씹어 읽어야 그 뜻이 드러난다(讀書百回 其義自見)"고 했다. 고전과의 대화는 속도보다 깊이를 요구한다.


결국 고전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는 대립적이 아니라 상보적이다. 고전은 현대에 깊이와 지혜를 제공하고, 현대는 고전에 새로운 맥락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두 언어 세계 사이의 창조적 긴장이 문화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송나라의 주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강조했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게 된다는 이 말은, 고전과 현대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우리는 오늘날 고전의 언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박제된 유물처럼 보존만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자원으로 활용할 것인가? 율곡 이이는 "학문은 실천을 위한 것이다(爲己之學)"라고 강조했다. 진정한 고전 읽기는 언어의 차이를 넘어 그 본질적 의미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고전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 사이에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류의 지혜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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