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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디 Nov 06. 2023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곳엔 어떤 내가 있을까.


"여보세요."

"어머, 오랜만이다. 잘 지내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저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한 해가 가고 나이가 들수록 그 용기라는 놈은  저만치 더 멀리 달아난다. 일순간 불 타올랐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결국 휘발되고 만다.  


"책 잘 봤어요. 어쩜 이런 재주가 있었어요?"

"아니, 뭘요."

"저 엄청 용기 내서 전화했어요. 사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잘 내 보이는 사람은 아니라서...."


다짜고짜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했는지 그 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당신이 쓴 글을 읽었노라. 그래서 내가 선글라스 너머의 세계에서 당신을 보고 오해했다고 고해성사를 했었던 것 같다.


그녀를 알게 된 지, 3년. 지금 살고 있는 대구 근처가 고향인 나는 회사 발령으로 10년간 타 중소도시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남편(남편도 대구가 고향)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어디로 집을 구할까? 고민하던 차 남편의 이른 출근 시간을 생각해 근처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소위 학군 지라 불리는 이곳에 예고도 없이 오게 되었다. 덕분에 내 친구 주눅씨는 더 찰싹 붙어 내 어깨 위로 올라앉았다. 아이들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알아보며 동분서주했고 겨우 초보 운전 딱지를 떼고 집 앞 10차선 도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처음으로 또래의 여자 사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첫째 아이 친구의 엄마였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우린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사이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나와는 다른, 세상 당당해 보이고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글을 쓴단다. 나도 한 때 펜 좀 잡았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의 글을 찾아서 읽어본 적도, 또 그녀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둘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명백히 그녀의 삶을 내 멋대로 오해하고 내 멋대로 재구성하고 있었구나.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겠지. 누군가의 말을 들을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가족인 남편과 아이들의 마음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의 업무를 수행하고 퇴근하는 직원의 마음으로 모든 집안의 일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모든 일을 잘 마무리 한 날도,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날도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내 마음속 10%,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그 10%를 채우고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도 써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시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통화 종료 2시간 , 후 그녀로부터 카톡이 왔다.


"이걸로 시동 걸면 되겠어요."



그렇게 시동을 걸었다.

어디든 가려면 시동과 예열이 필요하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도 용두사미로 끝내 버리고 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금방 불 타올랐다가도 또 금세 자취를 감추고 마는. 그래서 그녀의 추천대로 시동을 걸고 예열을 채근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반갑게도 조력자는 내가 아는 이였다.


바로... '이은경 선생님'


 목적지는 '브런치 작가'다. 기름값을 내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보조석에 앉아 길을 안내해 주신단다. 6주다. 이 6주 동안 잘 해낼 수 있을까? 이 6주 후엔 내가 좀 바뀔 수 있을까? 이런저런 안될 것 같은 이유를 첨부하며 결제 창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아이 한 달치 학원 비를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브런치 작가'라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주유해도 될까? 이번 달 내게 18만 원의 여유가 있는가? 아이들을 재울 시간인데 참여할 수 있을까? 혹시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포기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간절했다. 나의 40대는 부디 맑은 눈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구매버튼을 눌렀다.


'자, 이제 시동 거세요.'

'자, 이제 예열합시다. '

'자, 이제  출발합시다.'


 사고다발 구간만 미친 듯이 알려주는 카카오 네비와는 다르게 이은경 선생님의 안내는 평온했다. 하지만 내 일상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졌다. 그간 내 마음에 대한 과제를 수행하지 않았던 결과일까? 그저 앞만 보고 미친 듯이 그날그날의 일과를 무사히 끝마치기에 급급했기 때문일까? 직진만 하던 내 인생에 옆을 봐야 한다니. 그래. 옆을 보지 않으면 사고가 나지. 꽉 막힌 도로에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면 백미러로 뒤도 돌아보고 옆으로 돌아가기도 해야지. 언제까지 그 정체 속에 앞의 차가 빠지기만을 한없이 기다리기만 할 거야. 어떤 날은 내가 그 정체의 주인공이 될지도 몰라.  또 어떤 날은 비가 와서 앞이 안 보이는 날도 있을 거야.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운 날도 있을 거야. 하지만 비와 눈이 무서워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 제대로 한 번 가보자.


 10월 어느 금요일 밤 우리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이은경 선생님도, 따스한 나의 동기들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분명 18만 원의 기름값만 지불했는데 엔진오일도 갈아주고 타이어도 갈아 주는 이곳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액셀을 밟아야 하는 사람은 나다. 그렇지 않으면 차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도 있고 늦게 도착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도착해 손을 흔들며 기다려 주는 동기들. 처음엔 속속들이 먼저 도착해 깃발을 날리고 이름을 올리는 그 동기들이 부럽고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까 조바심이 났다.


 운동하셨어요? 읽는 하루 보내세요. 목소리의 환청이 들려온다. 새벽 반 고개를 드세요. 내 고개는 너무 무거워서 새벽엔 들어지지가 않는데 우리 동기들은 어찌 다들 그렇게 부지런 한지 모르겠다.

 온전히 나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하루 3~4시간 남짓이다. 일정이 있는 날이면 그 마저도 없다. 그 사이 나는 수업 준비도, 집안 일도, 운동도 해야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노트북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휴대전화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운동했냐고 묻는데 운동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그나마 읽는 행위는 늘 해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양한 장르의 글을 읽어야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이것 봐. 나는 또 안 되는 이유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역행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속속들이 올라오는 동기들의 합격 소식을 축하하며 발행된 글을 구독하고 라이킷을 날리며 읽기 시작했다. 동기들의 글 속에서는 여즉 내가 늘 겪고 생각하던 일들도, 내가 경험하거나 생각해보지 못한 일들도 아주 다양했다. 웃기고, 애절하고, 딱하고, 슬프고, 가슴 애린 세상 사는 이야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밤낮없이 아이들의 학원과 공부 이야기로 끝없는 레퍼토리가 아닌 진짜 사는 이야기. 동기들의 글을 읽기 위해 운전대를 놓고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새 글 알림이 올 때마다 내 눈은 쉬지 않고 그 글들을 읽어 댔다. 안아주고 토닥여 주고 싶은 이야기. 배꼽 잡고 웃을 만한 이야기. 정말 묻고 싶은 하비탈출 노하우까지. 여태 내가 나만의 세상에 갇혀 두더지처럼 살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누구든 늘 나보다 더 여유를 가진 삶을 산다고 생각했고 그 삶이 내게 허락되지 않아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곤 했다. 전쟁에 던져져 목숨부지도 힘든 일상을 겨우겨우 버텨내며 살아내고 있는 것 마냥 세상 모든 힘듦이 내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그리 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는데 철저히 기쁨은 감추어야 되는 감정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꼴값이었다. 지랄도 분수껏 해야지.


 함께 하는 힘이란 참으로 대단했다. 우울이라는 올곧은 나의 감정까지 통째로 흔들 수 있으니 말이다.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수없이 이불킥을 날리며 퇴고의 과정을 거쳤던 나의 글도 다행히 그곳에 발행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3주 차가 되기 전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격만 하면 글은 일사천리로 써질 줄 알았다. 그저 합격한 동기들의 글을 읽고 함께 하는 동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2차 글은 언제 발행하지?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이상 각고의 노력으로 쥐어 짜야 한 편의 글이 나올까 말까다. 불 끄고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떠 올려 본다. 도무지 뭘 써야 할까 고민이다. 그러다 이걸 써서 뭐 하지?라는 생각에 이른다. 일기장대신 쓰는 건가? 또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이런 시간이 좋았다. 고민하고 답을 찾아 나가는 그 과정이.


이은경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쓰기 전과 쓰고 난 후의 내 삶은 달라져 있을 거라고...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욕망을 한 아름 가지고 계시실 거라고. 아니 저 선생님은 남의 마음을 어떻게 저리 잘 아시는 걸까?


  인정받고 싶다. 엄마표 잘하는 엄마, 라이딩 잘하는 엄마, 밥 잘하는 아내 말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 '인정'이 뭐길래. 남이 아닌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엄격한 잣대로 재어 1mm라도 엇나가면 큰일이 난 것처럼 행동했을까. 한 때는 잘 나가던 커리우먼이었다가 만삭의 몸으로 국시에 합격해 전문직 여성으로 거듭나려는 그 순간순간들의 자존감은 두 아들을 낳으며 만들었던 이유식에 다 쏟아부었나? 증발해 버린 내 자존감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귀결시켰다. 이유식을 먹지 않는 아이도 내 탓, 독감에 걸린 아이도 내 탓, 준비물을 빠뜨리고 간 것도 내 탓, 공황장애에 걸려 아픈 남편도 내 탓. 그렇게 생각했으니 늘 우울감을 달고 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처럼 쓰고 난 후의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면서 피곤함이 반복되는 내 일상이 글감이 되었고 무엇이든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더 이상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게 되었다. 이른 아침 내 눈에 낀 눈곱마저도 결코 사소하고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해내려 하고 있다. 그다음은 뭘까? 궁금하다.


    다음 목적지 설정은 내가 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써보기로 했다. 수많은 밤을 이불킥으로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잘 지언정 그 도착이 어디인지 한 번 가보려고 한다. 그곳엔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두려움을 조금 덜 느낀다면 어떻게 될 지        

                                  상해봐."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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