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라이벌 경주에서 릴레이 경주로 룰을 바꾸자
게임 하나를 해 보자.
1분 안에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니 마치기 전까지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말라.
준비물은 간단하다. 종이와 펜 그리고 시계. 규칙도 아주 간단하다. 1분 안에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최대한 많이 적으면 된다. 펜이 없다면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손가락으로 세도 좋다. 혹시 답을 적는 도중에 무언가 궁금한 생각이 들더라도 일단은 무조건 적어 보자. 준비 되었는가? 좋다. 질문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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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이 지났다. 이제 개수를 세 보자. 몇 개나 적었는가?
내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은 무려 38개를 썼다. 그 학생에게 답을 불러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약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읊기 시작했다.
“눈동자, 시계, 바퀴,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 골프공. 테니스공, 탁구공, 수박, 사과, 배, 토마토, 방울 토마토, 귤, 자몽, 레몬. 감,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맥주병 뚜껑, 소주병 뚜껑, 사이다병 뚜껑, 콜라병뚜껑.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1센트, 5센트, 10센트, 50센트.”
“에이, 그건 반칙이죠.”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강의실이 웃음바다가 된 것은 당연했다. 흥미로운 것은 반칙이라고 외친 학생의 종이에는 간단하게 ‘공’, ‘동전’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어땠는가? 게임 도중에 ‘야구공, 축구공, 농구공’이라는 꺼림직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처음 게임을 설명할 때 “야구공, 축구공, 농구공이라 적으면 반칙이고, 대신 공이라는 집합명사를 써야 한다”고 했었던가? 다만 나는 이 게임의 목적이 제한 시간 내에 많은 답을 적는 것이라고만 했다. 그 이외에는 게임의 규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재미있지 않은가? 스스로 룰을 ‘만들어’ 생각을 좁힌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간단한 게임은 뇌의 일반적인 작용을 보여준다. 우리의 두뇌는 두 개의 반구로 나뉘어 있다. 좌뇌와 우뇌, 합쳐서 ‘두 뇌’라고 부른다는 우스개가 있다. 잘 알려진 것 처럼 이 두 뇌는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좌뇌는 순차적, 논리적, 분석적 활동을 하고 우뇌는 비선형적, 직관적, 전체론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흔히 부당하게 과장되어온 측면도 있다. 그리고 어떤 간단한 일을 하더라도 양쪽 뇌가 모두 협력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양쪽 뇌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두 뇌의 역할은 다르다. 우뇌는, 한마디로 말해 ‘돈키호테’다. 목표가 보이면 ‘일단 뛰어!’ 하고 아이디어를 마구 생산해내기 시작한다. 물론 때로 쓸모 없는 것들을 만들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아이디어의 총량을 늘린다. 반면 좌뇌는 제법 똑똑한 ‘심판’이다. 아이디어들을 분석해서 질 좋은 것을 골라낸다. 때로 돈키호테가 달려갈 때 휘슬을 불고 옐로우 카드를 내밀며 “야, 그건 반칙이잖아!”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바로 이 심판이다. 곧 우뇌는 아이디어의 양적 성장에, 좌뇌는 아이디어의 질적 성숙에 각각 기여한다.
문제는 돈키호테와 심판이 동시에 뛴다는 것이다. 앞서의 게임을 보자. “축구공, 야구공, 배구공…” 이렇게 ‘돈키호테’가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그 때 ‘심판’이 휘슬을 분다. “잠깐, 이건 너무 치사한 짓이잖아! 그냥 ‘공’이라 적어”라고 말한다. 이 순간부터 생각은 뻗어나가지 못한다. 기발한 생각이 평범해지고 마는 까닭은 우리 뇌의 돈키호테와 심판이 ‘달리기 경주’를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간섭을 하게 되어 결국 걸려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아마도 당신은 이미 예측했겠지만, 아주 간단한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다. 두 선수의 경기 방식을 바꾸어주면 된다. 두 개의 뇌가 서로 라이벌 경주를 벌리는 대신, ‘릴레이 경주’를 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뇌적 사고와 좌뇌적 사고를 서로 분리하여 순차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자는 돈키호테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처음 생각’을 안고 마구 달려나가도록 고삐를 놓아 주어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중간에 끼어드려는 똑똑한 심판을 무시하는 것이다. 심판으로부터 돈키호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해두고 최대한 많이 생각하고,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바삐 달려나가느라 심판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심판이 배턴을 이어받도록 한다. 냉철한 분석으로 쓸모 없는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내는 것이다. 이렇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함으로써 보다 질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창조적인 인물들이 사고하는 방식이며,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한 방법이다. 예컨대 문학에서 글을 쓰는 방식도 이 두 단계의 사고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감정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단숨에 써 내려간다. 비판적인 생각이나 질문은 잊고 그저 글에 몰입해서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초고는 대게 논리적 흐름이 없거나, 유치찬란 하거나 지나치게 과장되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먼저 ‘첫 마침표’를 찍는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특히 이 과정을 강조한다. 그녀는 이때 중요한 것은 ‘내부 검열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첫 생각’을 놓치지 않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내면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을 수 있어야 좋은 작가라는 것이다. 문학적 재능이 있지만 가정 형편이 불우한 흑인 청년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한 괴팍한 작가의 이야기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선생인 포레스터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려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초고를 쓸 때에는 가슴으로 마음껏 쓰고, 다시 고쳐 쓸 때에는 머리로 써야 한다(You write your first draft with your heart. And you re-wirte with your head).”
어떤 분야든 우뇌의 발산(divergence) 과정과 좌뇌의 수렴(convergence) 과정을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상상적 단계’와 ‘실용적 단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상적 단계의 목표는 ‘다르게 생각하기’이며, 실용적 단계의 목표는 ‘실행하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적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유연한 사고이며, 실용적 단계에서는 냉철한 사고가 중요하다.
두 가지 사고의 유형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은, 항아리를 만드는 도공에 비유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한번이라도 진흙으로 작업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진흙이 부드러울 때, 형태를 만들어 틀에 넣고 녹로에 걸치기가 쉽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흙이 이미 굳어버리면 형태를 만들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항아리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나면, 가마에 넣고 구워야만 항아리로서의 실용적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즉 유연성과 냉철함이 모두 필요하지만 필요한 시기는 각기 다르다.
두 가지 사고 중 우리 교육 체계는 냉철한 사고를 계발하는 데는 대단히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연한 사고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사실, 우리 교육의 대부분이 유연한 사고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머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행동(이 글을 읽는 동안 자신의 머리 움직임을 살펴보라)을 반복해 왔다. 이는 우리 몸의 오른쪽을 관장하고 있는 좌뇌를 훈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약 90%에 이르는 사람들이 오른손을 주로 쓰도록 훈련 받았다는 것도 우리가 좌뇌형 사고에 익숙함을 증명한다.
축구공, 야구공, 농구공을 그냥 ‘공’이라고 적던 ‘정신적 감옥’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 감옥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의 신념 체계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이미 학습한 것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려야 한다. 어린아이가 되어 모든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단지 논리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생각에 재갈을 물리지 말라.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놀이는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도 버려라.
그래도 머리가 딱딱하다면? 그렇다면 회초리를 맞을 수 밖에. 때때로 한 대의 회초리가 딱딱한 태도를 고쳐줄 수 있다. 해고를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당신에게 회초리질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에게 맞기 전에 먼저 스스로 때려라. '만약 ~하다면' 이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생각을 회초리질 하라. ‘그게 말이 돼?’라는 내부 검열자가 고개를 쳐 들 때에도 회초리를 들어라.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다. ‘안될 건 뭐 있는데(why not)?’ 그렇게 돈키호테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라. 심판은, 두 번째 주자다.
2013년 3월 18일
-- 박승오(변화경영연구소 3기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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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풀어가는 3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잘 알아서 문제에 대처하고, 해결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능동적이며 적극적이기 때문에 문제 자체를 문제로 놔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속이 편해지는 사람이죠.
마지막은 무언가 자극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조금 해보고 포기하거나, 아니면 자꾸 뒤로 미루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겐 그 문제에 온전히 매달리게 할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은 2가지 경로를 통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명령(order)라고 한다면, 내부로부터의 자극은 동기(motivation)라 부를 수 있습니다.
회초리는 외부와 내부, 모두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온 회초리를 맞고 움직이는 사람을 우리는 수동적, 피동적인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부로부터의 회초리로 움직이는 사람을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내부로부터의 자극 여부를 외부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내부의 회초리를 많이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더불어 상황에 맞는 회초리도 필요하죠.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스스로를 자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회초리를 꺼내는 일이 바로 자신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입니다.
회초리는 동기이며, 회초리질을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www.ezday.co.kr/bbs/view_board.html?q_sq_board=7348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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