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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Sep 29. 2015

<추석특집>노화가 멈춰버린 나

#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을 읽고

벌써 추석연휴 마지막 날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한가위 보내고 계신지요? 혹은 보내셨는지요? 이번 글은 특별히 추석특집(!)으로 준비했습니다. 추석 때가 되면 TV에서 과거의 인기영화를 상영하듯, 저도(^^) 제 예전 쓴 글 중 나름 괜찮았던 글 한 편을 엄선(!)하여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절대 글쓰기가 귀찮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이해 아니, 양해, 이것도 아니, 어쨌든 특집기획이라는 점 알아 주시기 바라며 영화... 아니 글 시작합니다! 아, 그리고 남은 추석연휴 시간도 즐겁게 마무리하시길! ^^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것이며, 초상과 슬픔이라는 형을 선고받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중에서-
 


2078년 6월 15일. 오늘은 나의 110번째 생일이였다.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아들부부, 딸 부부는 물론 손자, 손녀부부와 증손자, 증손녀까지 모두 나를 찾아주었다. 항상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던 집에 모처럼 사람이 북적대니 제법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역시 사람은 사람끼리 부대끼며 사는 게 맞는 듯 싶다. 생일축하 노래와 밝고 활기찬 웃음들 그리고 진한 포옹들. 가족애란 가슴과 가슴이 만날 때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뭉클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벌써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아들 조한이 벌써 81살이다. 조한은 2028년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 또한 결혼하여 나에게는 증손자에 해당하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 한선도 이제는 80살 노인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날 수 없다(물론 자식들은 내가 더 이상 늙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리기만 한 귀염둥이 딸이다. 남편도 있고, 딸도, 손녀들도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2000년대초 한창 말썽꾸러기 시절, 나와 아내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던 그 어렸을 때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들 중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연히라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할까? 기분은 어떨까? 좋을까, 싫을까? 아니면 당황스러울까? 중국 진시황제가 이 사실을 알면 지금이라도 당장 벌떡 일어나 찾아 올만한 일이겠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건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신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면 내가 신의 힘을 가졌단 말인가? 여러분들도 믿기지 않겠지만 난 110살인 지금, 아직도 40세의 외모와 기력 즉, 육체와 정신을 그대로 갖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노화가 멈춰버린 상태로, 늙음을, 노년을 잃어버린 상태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전, 2008년 3월 21일. 일은 우연을 타고 그렇게 일어났다. 40세때 가끔 가던 동네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던 중 ‘노화를 멈추는 법’이란 낡은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책 제목이 재미있어 심심할 때 한번 봐야지 하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친 순간 책갈피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가 내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낡은 메모 용지에 연필로 ‘노화 멈춤 주문’이라 써 놓은게 눈에 들어왔고, 제목 밑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 써져 있었다. 이게 뭐지? 그리고 맨 밑에 빨간 볼펜으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이 주문을 3번 반복해 읽으면 당신의 노화를 멈출 수 있음. 단, 당신의 인생이 변하게 되는 만큼 신중히 생각하시오.’


그 다음은 당신의 생각 그대로이다. 나는 호기심에 주문을 외웠고 그날로부터 정말로 노화가 멈춰 버렸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 무려 5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계속 몸상태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설마 설마 했는데 사실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당장 그 책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3년전 이사를 할 때 책 정리를 한번 했는데, 그때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삶이 달라졌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대로, 아내는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아내와 외출을 하게 되면 아내는 늘 ‘젊은 남편 두어서 좋겠다’란 말을 많이 들었다. 처음엔 싫지 않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아내의 표정은 굳어졌다. 나중에는 같이 외출을 안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안타까웠다. 부부의 얼굴은 서로 간의 시간의 흔적을 안아야 하는데 그 흔적이 아내에게만 있다는게 싫어졌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아들 조한의 결혼식, 딸 한선의 결혼식, 손주의 탄생이 이어졌다. 내 몸과 사고는 변함이 없었지만 차츰 나와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해가는데 나만 혼자 남아있다는 것,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항상 힘이 되어주던 아내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져 눕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다행인건 내가 옆에서 계속 아내를 보살펴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옆에서 손을 꼭 잡을 때마다 아내는 말은 안했지만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내게 짓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일한 대화창구였던 아내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90세면 적은 나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먼저 가야만 하는 아내가 불쌍하고 미안하기도 하였다. 가슴이 아팠다. 아내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신은 항상 그대론데.... 나, 난.... 많이 늙었죠?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전혀 늙..지.. 않은 줄 착각하곤... 했어요... 항상 젊은 줄... 알고 살았지요.... 미안... 해...요... 당신을 먼저... 두고 가서.... 정말... 정말로... 많이.... 미안해요. 우리, 우리말이예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 또 다시 부부.. 부부...로 만나면.... 그땐... 그때는.......”


난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그 빈자리를 지킨다는 것, 그 빈자리의 몇배만큼이나 가슴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가슴 속 빈자리는 점점 커져 와 내 온 가슴을 집어 삼켰다. 삶의 의미가 없었다. 빅토르 위고가 아내 쥘리에트가 죽고 난 뒤 왜 스스로 죽음을 원했는지, 이탈리아의 음악가 베르디는 아내가 죽은 후 왜 "나는 혼자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다."라고 말했는지 이해되었다.


아들부부가 놀러오고, 딸 부부가 찾아와 위로해 주어도 우울함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 해야 했다. 아내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아내가 바라는 것 또한 절대로 자살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리대로 가고 싶었다. 원래의 내 모습을 찾고 싶었다. 노화를 멈추는 법이란 내용이 있다면 다시 노화를 시작하게 하는 주문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헌책방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동네부터 시작하여 서울을 다 뒤지고 전국을 돌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지방의 한 책방에 들어가 책을 찾고 있었다. 나이가 70세는 되어 보이는 책방주인이 궁금한지 말을 걸어왔다. 무척이나 진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족 외에는 모르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혼자만의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풀고 싶어졌다. 넋두리마냥 두서없이 말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지나온 시간의 개인사에 대하여 얼킨 실타레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었다. 책방주인은 특별한 표정없이 반쯤 눈을 감은 채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1시간 정도가 흘렀다.


“만약에... 그 주문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는 아내를 찾아 나서야지요.”


“왜 주어진 영생을 포기하려 하십니까?”


“난 외톨이에요. 난 혼자에요. 더 이상 세상의 외로움을 짊어지고 살긴 싫어요. 노년을 통해 세상의 지혜를 얻고 보다 현명한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얘기하지 마세요. 40대의 육체와 힘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이 얼마나 즐겁겠냐고 짐작해 말하지 마세요. 나 혼자만의 세상은 좁은 독방 속의 어둠과도 같아요. 이젠 하늘 위 빛을 보고 싶어요.”


"하지만 남은 가족들, 특히 아들과 딸의 입장은 생각 안하시나요? 손자, 손녀를 생각하면 이 세상을 정리한다는게 가능한가요?"


"그게 더 무서워요. 카사노바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의 모든 친구들이 죽은 뒤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란 말을 했지요. 거장 미켈란젤로도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 우르비노가 죽은 후 마음 속 깊이 죽음을 열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친구보다 더 소중한 아내를 보낸 저는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 남아 있어요."


"그게 뭐지요?"


"자식을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아들과 딸도 벌써 80을 넘겼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 손으로 그 아이들의 죽음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 일만큼은 절대로 제가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내 머리 속에 그 일을 해야한다고만 생각하기만 해도 전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전 이제 인생의 순리를 따르고 싶어요. 삶의 모든 관계가 없어진 상태의 나의 존재는 무의미할 뿐입니다."


“....... 삶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여기 주소나 적어놓고 가시지요.."




일주일전이었다. 내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인은 그 헌책방 주인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드디어 그토록 찾아 다니던 그것이 안에 들어있음을 알았다.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내 마음과 세상에 가늘게 연결되어 있는 끈을 정리해야만 했다. 먼저 아들과 딸 앞으로 유서를 썼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에 대한 표현이자, 세상에 저지른 죄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쉴새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아내의 그림자를 보았다.


생일파티는 끝났다. 이제 모두가 가고 다시 나 혼자만 남았다. 이 빈 공간은 항상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결코 어느 누구도 내 옆에 자리한 적 없는 듯 싶었다. 노년의 시간은 청춘의 시간보다 더 빨리 흘러간다고 했지만 지난 몇 년간의 하루하루는 길고 무겁기만 했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책 사이로 주문이 적힌 메모가 보였다. 이제 나의 긴 생을 마감해야 할 시간이다. 비정상적이었던 노년의 시간이었지만 인생의 순리에 맞추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원인모를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주문을 외려하는 내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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