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도 괜찮아

3. 결국, 죽자고 덤벼들어야 관객은 재밌어한다.

by 지방

클라이맥스

영화 서사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로 나눠진다. 그 중 ‘절정’은 ‘클라이맥스’이다. 클라이맥스는 결말로 향하고 곧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동안 끌고 왔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관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서 영화 서사에서 관객들에게 재미를 줘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이러한 이유로 연출가들은 이 부분에서 집중해야 한다. 관객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유지해 왔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액션 영화에선 갈등의 원인 제공자를 죽인다. 영화에서 죽인다는 것은 일종의 ‘제거’의 의미이다. 영화 이야기에서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야 갈등을 해소하고 관객들에게 불안했던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해소와 쾌감을 주어야 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죽임’은 몹시 어렵지만, 화려하고 통쾌하게 죽여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은 “쾌감”이라는 느낌을 받고 좋아한다. 우리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갈등의 제공자를 힘들여서 화려하고 통쾌하게 죽였다고 해서 과연 쾌감을 느낄까? 당연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의 키는 연출가의 몫이다. 연출가는 관객의 자의식을 단절시키고 영화 속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영화 이야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죽이는 것에 대한 괘감???” 물론 실제에서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죽이는 것에 대한 감정을 알 수가 없다. 극소수의 범죄자들을 제외하곤 사람을 죽여 보거나 반대로 죽임을 당해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사람을 죽였을 때의 느낌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죽임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진짜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간접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선 얼마든지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느낌의 “짜릿함 혹은 아찔함”을 느끼려고 안전장치 없이 실제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놀이공원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보고 짜릿한 경험을 해 보고, 번지 점프를 하거나 요즘은 VR의 시각적 체험으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경험 할 수 있는 간접 경험이다.

낙원의 밤 (2020)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이야기 갈등의 요소를 주인공이 혹은 주요 인물이 제거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이는 간접 경험이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동안 끌고 왔던 영화 이야기 속에서의 위협적인 요인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 이야기 속에서 ‘왜’ 죽음이란 소재를 다뤄야 하는지는 명확해졌다. 그 이유는 이야기의 종국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 때문일 것이다. 쾌감(슬픔, 짜릿함, 기쁨, 통쾌 등)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다. 그러기 위해선 관객이 자의식을 버리고 영화 이야기에 “몰입”을 해야만 한다.


몰입

네 멋대로 해라 (1960)

과거 프랑스의 혁명적인 누벨바그 영화들은 이따금 영화 속 시간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 변형된 편집을 사용하곤 했다. 누군가는 그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누군가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화 편집에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선 주로 롱테이크를 사용하여 영화 공간을 관찰하게 만든다. 마치 우리가 서서 천천히 주변을 살필 수 있듯이… 하지만 관객들이 바라볼 수 있는 스크린은 한정되어 롱테이크로 편집된 시간 만큼 바라볼 이미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롱테이크는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방해했고 관객의 몰입도도 떨어졌다.

자전거 도둑 (1948)

편집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일들은 더는 거론할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 과거 연출가들이 요구했던 하얀 벽에 비치는 영상을 깨닫기를 원하는 관객들은 없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풍부한 경험으로 영상 편집에 익숙해 저 신(Scene)과 신사이, 컷(Cut)과 컷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것에 충분히 학습된 상태이다. 관객들은 영화 자체가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를 관람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방해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는 누벨바그 영화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처럼 영화를 일깨워주는 장치들이 필요할 정도로 관객들은 영화를 사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 관객들은 사실이 아닌 영화 속 장면을 오래 바라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앞서 얘기한 <석양의 무법자(1966)>의 클라이맥스에서 세 명의 총잡이가 삼각으로 마주 보고, 서로의 눈을 보며 누가 누구에게 총을 겨눌지 눈치를 보며 총을 뽑지도 못하면서 잔뜩 긴장하는 장면이 멋있는 음악과 함께 장시간 지속한다. 요즘 관객 같았으면 누군가 “당장 총을 뽑아! 어차피 크린트 이스트우드 죽지 않아!”라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을 거다. 이제 영화 이야기의 빠른 전개, 빠른 편집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석양의 무법자 (1966)

누벨바그 영화들은 현대 영화의 빠른 편집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편집속도에 관한 한 “MTV”의 편집 속도에서 더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MTV는 0.2초도 안 되는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젊은 시청차들을 홀렸다. 심장은 결국 시각적 요소에서 자극을 받아 뛰고, 그 크기는 음악으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객의 몰입도를 올려 주는 데 기여하게 된다. 기존의 일부 연출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빨라진 영화 속도는 이후 계속 가속이 붙게 된다. 관객들은 그 가속이 계속 진행되는 속도에도 영화 이야기를 읽고, 듣는다. 관객들은 뤼미에르 형제의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겁에 질려 자리를 뜨는 것은 옛말이 된 것처럼, 관객들은 얼마든지 빠른 편집의 이미지들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게 영화적으로 더 진화되었다.


자! 지금까지 절정에 관해 이야기해 보았으니 이제 결말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영화 클라이맥스(절정)에서 이야기의 전개 원인이 되었던 문제를 죽임으로 혹은 그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제거하여 문제점이 해소가 되었다면 영화는 이제 이야기를 수습하고 끝을 맺어야 한다. 사실, 클라이맥스(절정)에서 문제를 제거하고 감정적으로 해소가 되었다면 이야기를 수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영화를 끝맺어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소가 되는 순간 그 뒷이야기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소가 되었기 때문에 결말 부분에서 길게 설명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긴 시간으로 관객을 붙들고 있으면 그 영화는 구차한 스토리로 전락해 버린다. 절정에서 문제가 해소되었음에도 끝을 내지 못하는 영화는 그때부터 지루한 영화로 기억에 남아 버린다. 아무리 좋은 영화 이야기이었어도 결말이 길어지면 관객들은 더 이상의 기대되는 흥미가 없이 빨리 극장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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