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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집은 미술관 Feb 22. 2024

갈릴리 호수 위의 예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섭지 않아 진다. 이 그림의 특징이다.

Eugene Delacroix.1858년, 유채, 61 ×76cm, The Walters Art Museum. Baltimore. U.S.A.
Youtube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서 영상으로 시청하세요.
이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을(The Walters Art Museum)  찾아 영상으로 담아 봤습니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1798년 4월 26일 ~ 1863년 8월 13일)는 프랑스 태생으로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영감은 주로 역사적이거나 현대적인 사건이나 문학에서 나왔고, 1832년 방문한 아프리카 모로코의 체류 경험은 그에게 더 많은 주제를 제공했다. 


그의 작품은 에너지와 움직임의 제한 없는 표현, 폭력, 파괴, 삶의 비극적인 측면에 대한 매혹, 그리고 감각적인 색채의 사용으로 특징된다.


미술관 

월터스 미술관(Walters Art Museum)은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다. 미국 동부 지역에서 오래된 공업 단지였던 볼티모어 중심에 위치해 있다. (유튜브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서 시청하세요!)


이 작은 미술관은 사업가인 윌리엄 톰프슨 월터스와 그의 아들 헨리 월터스가 서양 회화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품 등을 수집하며 시작되었다. 아들 헨리가 찰스 스트리스의 건물을 구입하여 거기에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1931년 사망 이후에 소장품  22,000점의 컬렉션을 볼티모어시에 증여하였다. 


1934년, 월터스 아트 갤러리(Walters Art Gallery)로 개관하였으며, 2000년 월터스 미술관(Walters Art Museum)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들어가며

이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섭지 않아 진다. 이 그림만의 특이성이다.  작품 앞에 선 감상 시간은 곧 그 무기를 발견하는 시간이며 그 무기를 그림으로부터  받는 시간이다. 


갈릴리 호수에 광풍이 분다. 파도의 거센 물결이 작은 목조 배 한 척을 엎으려는 순간이다. 

소망 없어 보이는 내 삶이 하늘에 짙게 그려진 회색의 칙칙함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익숙하게 봐왔던 작품이죠? 


특별한 내용을 모를지라도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위기의 순간임을 직감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큰 비밀은 보면 볼수록 안전함을 느끼게 한다. 왜 그럴까?  


작은 규격이지만 참 좋은 상징들을 담아 그렸다. 우선 숫자에 비밀이 있다. 그 숫자는 무엇일까? 이곳에 송곳 같 바늘이 있는데 모두 몇 개일까? 작품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려면 등장인물들의 손과 얼굴을 보면 된다. 손과 얼굴에 핵심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배에 계신 예수의 몸과 십자가 처형 당하실 때의 몸에 유사점이 있다. 무엇일까? 


예수

예수께서 깊이 잠이 드셨다. 

지금 파도가 광풍과 함께 배로 몰아쳐서 뒤집히기 일보직전인 상황이다. 얼마나 깊이 잠드셨는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계시는데 미동이 없으시다. 파도와 완전히 대조되는 표현으로 이 작품 속에서 빛나는 창의적 표현이다. 작품 안에서 이렇게 따로 화폭을 잘라 보는 습관은 작품을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머리에는 신성의 상징인 후광이 거센 바다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고 죄가 없으시다는 상징인 흰 옷과 십자가 상징인 붉은 천이 예수를 감싸고 있다. 피곤하실 때는 깊은 잠을 청하시는 것으로 신성과 인성을 한 장면에 넣어 표현했다.  


이런 장면은 배경인 성경의 기록대로 묘사한 것이다.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고 기록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마가복음)

고물은 배의 꼬리 부분을 일컫는다.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낚싯줄 같은 것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한 듯하다. 일부러 베개를 가지고 다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도

이 그림에서 인물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하는 요소는 바다의 파도다. 보통은 잔잔하겠지만 광폭한 날씨가 되면 이곳 갈릴리는 그 지정학적 요소로 인해(바람) 갑작스러운 폭풍이 발생하는 곳이다.


화가는 이런 사항을 참고해 사나운  바다를 그리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 해협 사이에 있는 프랑스령 Dieppe 해역에 세 번이나 찾아가(1851, 1852, 1854) 험한 파도를 관찰했다고 한다. 이런 관찰을 통해 좀 더 깊은 사실성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 했다. 이 지역은 파도가 험하고 물살이 센 곳으로 유명하다.


이 Dieppe(디에프)라는 지역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아르케스 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다. 


흔들림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운동성이다. 화가의 특별한 화풍이다. 이러한 화풍에 어울리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붓의 사용이다.  쉬지 않고 오가며 흔들림의 물결이 있는 바다 위라는 작품 배경과 인물들의 우왕좌왕 놀라며 대처하려는 모습에 어울리게 붓을 짧게 끊어 칠한 것이 이러한 움직임을 배가시킨다.

이 작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면 파도에 음률이 넣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0% 자연산 물결이 만들어 내는 푹푹 속의 갈릴리 음악이 펼쳐진다. 쿵 닥 닥… … 쿵 닥닥… 쿵 다다… …  소리의 폭이 작아 지다가 갑자기 커지기도 하고, 음폭이 넓어지다가 휩쓸려 가며 좁아지며 배전에 부딪쳐 깨진다. 한없이 출렁이는 저 녹색 계열의 파도가 관객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작품이 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나는 녹색 계열의 바다다. 짙은 청색이 아닌데도 깊이가 있고 무섭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구름 또한 거칠게 흘러간다. 송곳 같은  파도 끝에 구름도 찢어진 듯, 방향성 없이 흩어져 있다.  


송곳

암울하고 짙은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 계열의 바다가 쉼 없이 오르내리며 요동친다. 화폭 속의 파도 끝을 보면 송곳같이 뾰쪽하며 날카롭다. 파도가 아니라 크고 작은 송곳들이다. 우리가 아는 바다 같지만 송곳으로 무장된 무기들 위에 있는 셈이다. 


지금 배를 찌르고 때리고 덮쳐오는 순간이다. 포악한 물결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무례하게 쳐들어 오는 우리의 힘들고 어려운 일상이다. 


음률

파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큰 물결로 이룬 날카로움이 있는가 하면 하얀 포말로 부서지기 전의 작은 날카로움도 있다. 거대한 해머로 강타하는 소리도 있고 멈춤 없이 밀어붙이는 불도저의 기계음도 와닿는다. 물결이 튀어 올라 산산이 부서지며 뿌려지는 물방울의 작은 부딪힘도 들린다. 시도 때도 없이 찌르는 파도 끝의 송곳들이 내는 울림과 천들이 바람에 부딪혀 내는 펄럭임도 더해진다.  


눈을 귀 삼아 그림에 귀대어 보면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한 편의 음악을 생성시킨다. 평평한 화면에 음률을 넣은 화가의 천재성으로 평가된다.


제자들

잔잔했던 바다의 광폭으로 목숨이 위태롭다. 그래선지 배에 탄 제자들은 긴급하게 배를 안정시키는 중이다. 


그중의 한 제자는 배의 후미에서 떨어져 나간 돛의 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화가는 이 손과 돛을 배 밖에 놓았다. 세상을 향한 마음의 상징이다. 바다의 출렁임에 큰데...... 과연 잡을 수 있을까?  설사 돛의 끈을 붙잡아 기둥에 묶는다고 해도 파도가 더 높이 치면 배는 결국 파산될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곳에 그려진 배의 상징은 구약으로 치면 노아의 방주다. 세상이 물에 잠겨도 배(구원자 예수)에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다. 배경 되는 구절을 살펴보면 배에 타기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에게 신성이 있음을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제자들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제자들이 갈릴리 어부들이었기에 이전의  경험에 기초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지하는 우리들  모습이다. 이 배에 누가 탔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의 모습이다. 

딴 제자들은 어떨까? 그 역시 목숨 걸고 작업 중이다. 

바다가 광폭하게 변한 모습을 출렁이는 돛에 넣어 표현했다. 바람이 살아 있죠? 아니 자연이 살아 있나요? 이 부분만 열심히 쳐다보면......  잔잔하면 바다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작품의 이 부분을 대하고 난 후에 처음으로 발견한 점이다. 


작품을 잘게 잘라 보니 악조건 속에도 빛은 살아있구나 하는 점도 발견한다. 풍성한 빛은 인간과 관계없이 돗의 천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금으로 제작된 값비싼 천을 만든다. 잘라서 쳐다본 그림에서 생각난 것들이다.  

선미에 선 제자의 모습이다. 다리를 보면 달리는 중이다! 다급한 마음을 다리에 실었다. 어떤 작품이든지 간단하게 보면 간단하다! 그러나 이렇게 화폭을 자르고 확대하고 그 부분을 음미해 보면 화가의 마음이 읽힌다. 


두 팔을 사용한 것은 활대가 부러져 돛대 전체가 떨어진 모양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이렇게 사람이 내려앉은 돛 안에 있음은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상징이다. 떨어지는 돗의 무게가 내 삶을 짓 누런 여러 무게 같아 보인다.  낑낑되는 내 삶의 표현으로 다가온다. 

중앙의 제자들 모습이다. 연합해서 열심히 일한다. 힘을 합쳐 일 하지만 헛수고임을 알고 있을까? 정밀한 근육의 묘사는 없는데도 그들의 근육 움직임이 내 몸으로 확인된다. 붓의 힘이다. 


한 제자

이곳에 작품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있다

배 안의 제자들 중에 예수의 능력을 아는 제자가 한 명 있었나 보다. 기록에는 누구라는 언급이 없다. 황급히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제자의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배를 타기 전에 예수께서 이미 행했던 이적과 기적의 핵심을 알고 있었던 제자였던 것 같다. 


이 제자를 화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다시 봐야 한다. 다른 제자들과 분명하게 구분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배경 되는 성경 구절에 대한 전체 이해가 없으면 파악해 내기 쉽지 않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관객들에게 더 깊게 작품 내용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된다.  

세어보면 예수를 제외한 제자들이 6명이다. 이들 중에 온몸을 예수께로 향하고 있으며 특히 얼굴을 예수께로 향하고 있 제자는 단 한 명이다. 이 제자가 예수의 마음에 합당한 제자임을 알린다. 


이 표현 부분을 보면 화가가 배경 되는 성경 구절을 열심히 연구한 것으로 판단된다. 성경에서 얼굴을 하나님(예수)에게로 향하는 것은 큰 상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에 관한 구절을 보자. 찾아보니 의외로 많은 구절이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 하였나이다" (시편 27:8) "그들이 등을 내게로 돌리고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 (예레미아 32:33)


자신에게 얼굴을 향하라고 명령하셨고 얼굴을 향하지 않은 민족에게는 호통까지 치신다. 매우 엄중하다. 이 작품을 분석해 보면 이 제자에게는 또 다른 귀한 도상을 지니고 있다. 손이다. 


다른 손


위에서 이 작품의 핵심이 손에 있다고 했죠? 자연의 힘을 이기려는 5명의 손들이 있고 예수를 깨우려는 지혜로운 손이 있다. 지극히 대조되는 두 손이다. 이렇게 바삐 움직임이 있는 제자들의 손이 있는가 하면  전혀 움직임 없이 마치 임시 휴업인 듯 한 예수님의 양손이 있다. 이 역시 화가가 극적인 대조를 위한 구성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표시 나게 묘사한 오른손을 보셨을 것이다. 예수를 향해 뻗은 지혜로운 한 제자의 오른손과 세상을 향해 뻗은 그렇지 못한 제자의 오른손이다. 


이 중에서도 예수의 양손은 조금 더 특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자들의 손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 바로 앞에 있게 함으로써 자연과도 대조되게 한 구성을 취하게 했다. 

자연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묘사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신성의 상징인 후광이 확대해 바라보니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만 잘라보면 파도는 더 이상 광폭한 바다로서의 역할이 아님을 깨닫는다. 예수가 삼위하나님의 한 분으로 계신 것에 대한 자연의 환호 소리이며 경배며 찬양이 된다. 


멀리서부터 무섭게 몰려와 배를 때리고 찢어 파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큰 경배의 절을 올리기 위해 거세게 달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조금 후에 일어나 자연을 향해 질타하는 말씀 속에 그 위험이 들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파도가 예수께 절하는 이유가 적힌 구절이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하더라" (마태복음 8:26-27)


숫자


이 작품에 숫자의 비밀이 있다고 했죠? 배는 한 척뿐이라 1이라는 숫자를 찾을 수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배 타기 직전에 예수가 마을을 돌며 기적을 행하셨기에 예수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이동하자 이를 따랐던 여러 척의 배들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화폭에는 예수가 탄 배만을 강조하기 위해 한 척 만 등장시켰다. 문제는 배 안에 있는 인물들 숫자다. 


배를 조정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여섯 명이다. 6이라는 숫자다. 예수까지 합하면 7이 된다. 여기에 성경의 특이성인 숫자의 조합이 드러난다. 6은 완전수인 7에 하나가 모자라 좋지 못한 의미를 지닌다. 666이 대표적이며 7일을 주기로 반복되는 한 주가 대표적 사례다. 하루가 빠지면 큰일 나죠?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숫자의 의미는 동일한 특성이 있다. 시대와 사람과 국가는 바뀌어도 이 숫자는 불멸이다.  제자들로서는 당면한 자연 재앙을 해결하지 못하기에 6 명을 등장시켰고 이를 해결해 주실 예수를 채워 완전수인 7로 만든 것이다. 결국 이 그림 배경의 다음 구절에 제자들이 예수를 깨워 풍랑을 잠재우며 해결한다.


관객이 중세 명화 앞에 서면 인물들의 숫자에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별것 아닌 것 같고 평범할 것 같은 표현 속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 중세 명화이다. 이를 해석해 내며 풀어 보는 문화가 감상의 일부분이다.


하늘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누가복음 8:24)

위에서 언급한 구절대로 이 어려움은 곧 회복이 된다. 화가는 이 회복의 사인을 색으로 표현했다. 하늘 한가운데 보이는 흰색의 광원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 감추어진 듯 남아 있는 빛은 곧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승리로 이끈 예수의 사역의 상징이다. 이 빛은 세상이 무너져도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인 예수가 계심을 알려주는 등대의 역할이다. 


기독교 그림에서의 도상은 형태가 다양하며 화가들 마다 그 표현법이 다르다. 기울어져 침몰할 것 같은 배에서 깊이 잠든 예수 역시 하늘의 빛과 같은 도상이다. ‘나를 찾고 나를 믿으라’는 메시지다.


의문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마태 8:23-25)


배경이 된 구절과 그다음에 이어지는 한 구절인데, 이 구절을 읽고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발견된다. 무섭게 소리 내며 뱃전을 때리는 광풍에도 꿈쩍 않고 깊은 잠을 잤던 예수였는데, 제자가 깨우니 곧 일어났다? 는 기록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 예수가 가짜로 깊은 잠을 자는 척했던 것은 아닐까? 좀 이상하죠? 


위에서 이 작품의 핵심은 손에 있다고 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자녀가 있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자녀가 갓난아기일 때 깊게 잠들었다가도 아기가 칭얼대면 금방 잠을 깼던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예수 역시 깊은 잠을 자면서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24시간 눈도 감지 않고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3-4)


예수가 곧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하는 제자의 소리에(마음) 곧 반응한 것이다. 화가가 이 지혜로운 제자의 행동을 묘사했던 것은 구절대로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뒷 면

그림의 뒷모습이다. 그림을 완성한 후에 이 액자로 마무리했을 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그린 그림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배경 되는 말씀(구절)으로 힘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프랑스 해협을 3번이나 찾아가 파도를 관찰한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시대가 달라 만날 수 없지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다음에 이어지는 페이지는 제가 프랑스에 도착해서 화가의 생가를 찾았던 발걸음이다. 


화가의 집으로

 

파리를 들렸을 때 이 화가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어 사진으로 나눈다.         

… … 함께 걸을까요? 

미술관에 들린 후에 이 화가의 생가로 가던 길의 계절
도시 건물에 여전히 중세와 근세의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다.
유럽의 특징 중의 하나가 길거리 돌들이다. 딴 나라에서 보기 드문 중세의 흔적. 
가는 길에 배가 고파...
가족들이 운영했던 무척 친절한 가게였다. 
여행 가면 한 번씩 찍어 보는 정형화된 사진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커피와 갓 구운 빵은 진짜 부드럽고 맛있었다.
굴 다리 아래에 있는 화가의 생가 입구. 프랑스 국기가 걸려있죠?
어느 미술관에든지 방문하면 유심히 보는 곳이 계단이다. 발걸음으로 닳고 닳은 흔적을 무척 부러워한다.
화가의 자필. 다음에 가면 번역해 봐야겠다. 
평범한 가정집 2층이다. 


비디오로 관람객을 배려한 방
집 뒤에 있는 뜰
뒷 뜰로 연결된 방에 있는 그림들. 
화가의 집이라선지 평범한 뒤뜰의 낙엽 색도 특별하게 보인다. 


떠나며

그림을 떠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니다. 

언제 다시 와서 본다는 약속이 없으며 다시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저런 이유들로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 그림을 떠나며 느끼는 것은 이전의 그런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위험 속에서도 평안히 깊은 잠에 든 예수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림을 떠나며 예수의 두 손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두 손이다. 오로지 믿음으로 나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그림에서 확인한다. 


저는 다음 그림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함께 그림 여행한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그때까지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면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중세 명화의 관문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글에는 새로운 도상 발견에 대한 설명이 있어 저작권이 있습니다. 필요시에는 연락을 부탁합니다. ark353v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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