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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집은 미술관 Feb 22. 2024

기적의 물고기 떼

중세 명화 최고의 망토를 걸친 바다 사나이. 대조와 대비의 반전 드라마.


Youtube 채널 <내 집은 미술관>에서 영상으로 시청하세요.

오늘 함께 살펴볼 그림은 미국 워싱턴 미술관에 전시된 야고코바싸노의 <기적의 물고기 떼>입니다.


일어선 한 제자가 입은 푸른 망토가 강하게 펄럭이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한눈에 힘과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제목처럼 물고기를 떼로 잡아 올리는 내용일까요?  화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교묘한 장치와 구도 속에 심어 놓았는데요,  이 작품의 핵심은 시선과 색 그리고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특이한 묘사도 발견됩니다. 예수님 피부가 가짜 인걸 아세요? 파란 펄럭이게 한 망토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왼쪽과 오른쪽 배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고개를 내민 물고기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요? 중세 명화 중에서 가장강력한 푸른 망토를 펄럭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 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세 명화를 분석하고 세밀하게 그 내용을 살펴보는 <내 집은 미술관>에 오신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이 미술관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중형 크기의 미술관입니다. 백악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어 미국에서나 세계에서나 작품 관람을 위해 이곳을 들리는 관람객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문화 명소입니다. 뉴욕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면 워싱턴에는 The National Gallery of Art가 있습니다.  


화가

Jacopo dal Ponte라고도 알려진 Jacopo Bassano는 베니스 근처의 Bassano del Grappa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입니다. 이름과 태어난 마을 이름이 같죠? 당시 중세 때에는 고향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미술 사학자들이 그를 뛰어난 화가로 꼽는 것은 작품성과 다양성으로 꼽는데요, 이런 까닭에 거장 티치아노를 제외한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알려집니다.


예수 

이 작품 배경의 주인공인 예수에 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머리에 3개의 후광이 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적 표현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예수가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질 것을 권유했고 그 말씀대로 베드로가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은 바로 직후의 상황입니다. 신학적으로 중동 땅 이스라엘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제자가 나가는 시점으로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순간입니다. 


특이하게도 축복으로 오른손 대신 왼손을 들었습니다. 보통은 예수가 몸을 관객 쪽으로 돌려 오른손을 들어 표현합니다. 왜 이렇게 가슴을 가렸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몸에 근육이 붙어있어 제자들이지만 평생을 험한 바다에서 지낸 어부에 맞춰 근육질로 표현했습니다. 피부도 힘이 넘치게 붉은색을 띱니다. 그런데 이 피부는 살색이 아니라 옷입니다. 옷과 피부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베드로

이번에는 바로 앞에 있는 제자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의 자세를 보셨나요? 무릎 꿇고서 예수 앞에 엎드려 두 손으로 청하는 중입니다. 나는 주님을 3번이나 배신한 배신자며 죄인이니 감히 주님을 다시 따르지 못한다는 고백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지은 것에 관한 용서는 몸의 행동에 잘 나타납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진정한 용서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화가는 절묘하게 무릎과 허리의 각도와 내 민 손으로 용서를 구하는 동작을 표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얼굴에 참회와 죄송함을 옆모습에 잘 담았습니다. 구부린 온몸과 얼굴과 거친 두 손에 진정성이 엿보입니다. 


또 다른 제자

이 두 번째 제자는 정확하게 누구인지 모릅니다. 앞에서 무릎 굵고 있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Andreas) 일 수도 있겠습니다. 최소한 이 그림에서 예수를 제외하면 최고의 주인공입니다. 


위치도 당당하게 화폭 정 중앙을 차지했습니다. 일어나 가운을 펄럭이며 급한 동작을 일으킵니다. 미술사에 길이 남는 명 장면입니다. 이렇게 격한 행동을 취한 것은 예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거칠게 놀랄까요? 인류의 역사 때문입니다.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 인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 번 죽으면 그것을 끝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돌아가셨던 분이 지금 다시 살아나 눈앞에 있으니 저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겠지 만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 주님 밖에 없음을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직접 행하셨던 기적과 이적들이 믿어진 것입니다.

이 제자를 확대해 보면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온몸이 경직되어 근육이 뭉쳐져 있습니다. 바다 사나이의 어부라는 직업으로 단련된 육체에 영적인 깨어짐으로 놀란 육체가 결합된 제자의 표현입니다. 봐도 봐도 힘이 나는 모습이며 색감이며 표현이며 동작이며 은혜입니다. 


그림에서 이 제자의 동작과 몸의 표현을 다시 감상해 보십시오. 목에 둘러 펄럭이는 망토는 미술사에서 가장 건강하게 움직이는 제자의 영성입니다. 죽었던 영성이 깨어난 순간입니다. 


망토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이 있는 요소가 보이세요? 사람이 아니라 푸른 망토입니다. 푸른색은 생명이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순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제자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단순한 의상으로서 망토가 아니라 구원으로 생명이 휘날리는 생동성으로 보여야 합니다.


수많은 중세 명화 중에 가장 격동적인 휘날림이며 가장 살아 움직이는 제자의 몸동작입니다.   


디자인

화가는 이 제자에게 많은 상징을 심어 놓았습니다. 몸동작과 바다 일로 뭉친 근육과 거친 바다 바람을 상기시키는 머릿결과 얼굴의 수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친 바다 사나이 답지 않게 부드러운 디자인을 넣었습니다. 망토를 묶은 단추가 보이죠? 여성적이며 상당히 부드러운 디자인입니다. 

또 하나가 발견됩니다. 치마 부분을 보면 끝단을 잘게 잘랐습니다. 바다 바람이라도 불면 상당히 날리겠죠? 이 인물의 격한 몸동작을 상기한다면 이런 작은 부분에서도 관객의 시선은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 같습니다. 매우 여성적인 디자인이 격한 바다 사나이 몸에 있는 애교 있는 구성입니다.  


다른 제자

망토를 휘날리는 제자 뒤로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들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이 보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무겁습니다. 몸의 근육과 팔의 핏줄로 당기는 힘의 양이 들어있습니다. 열심히 밤 새 그물을 던졌던 모습을 상의를 벗어 그물을 올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몸을 보면 온몸의 근육과 팔의 핏줄로 당기는 힘의 양이 들어있습니다. 왼쪽 제자는 예수 쪽이 궁금한지 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고 오른쪽 제자는 물아래 그물을 쳐다봅니다. 어떤 생각 중일까요?


그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의 권고대로, 화가는 어두운 색으로 깊은 바다로 표현했습니다. 어두움에 깊이가 측정됩니다.


이 그림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각 각의 인물을 따로 떼어내서 볼 때도 은혜로운 감상이 됩니다. 이 부분은 갑자기 기적적으로 잡힌 물고기를 끌어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 되는 구절을 보면 정말 많은 생선이 그물에 잡혔음을 알립니다. 이 내용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책에 그 중요성을 적는다면 몇 권이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한복음 21: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누가복음 5: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이거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라는 것은 표현만 미묘하게 다를 뿐 내용이나 의미는 같습니다. 물고기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 물고기는 이후 예수님의 사역으로 열매 맺게 될 복음 사역의 열매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약속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구주로 믿어 얻게 되는 영생들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하면 맺어질 약속의 열매입니다. 


신약의 모든 구절을 한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 페이지에 있는 위의 그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화가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저 그물망에서 빠져나간 물고기가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물에 잡힌 물고기는 영생을 얻지만 잡히지 않은 물고기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혹시 이 그림 속에 저 물고기처럼 영생을 얻지 못한 인물이 있을까요? 흔히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예수의 제자로 설명하지만 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이 작품에 예수를 아직 구원자로 믿지 않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먼저 물고기 문양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물고기 문양

혹시 ‘쿼바디스 도니네’ (Quo Vadis, Domin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번역하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필자가 중학생일 때,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교 단체 관람을 이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런 단체 관람이 아니면 영화를 보기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뛰며, 심장이 졸아가는 순간이 됩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먹이로 내몰리는 기독교인, 불타는 로마와 그것을 보며 시를 짓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광경을 보는 것이 괴롭다며 눈물을 흘리는 데 황제의 눈물이라 신성시한다며 눈물 컵에 담는 모습, 여자 주인공인 데보라카의 아름다움과 지하 교회를 목숨을 걸며 찾아가는 로봇 테일러의 조심스러운 모습도 떠올려집니다. … … 바로 이 영화 속에 물고기 문양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주인공인 로봇 테일러가 여인인 리디아를 찾다가 기독교인들이 비밀리에 물고기 문양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I C T H U S는 헬라어로서 Ίησος Χριστός, Θεο Υός, Σωτήρ의 첫 글자를 모은 것입니다.  순서대로 풀이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의 핍박 아래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비밀리에 알리는 일종의 애너그램 암호(Anagram)였습니다.


방법은 한쪽이 물고기의 반을 그리면(C) 상대방이 나머지 반을 그려 물고기 형상을 완성시킵니다. 이 그림 속의 물고기를 왜 기독교인의 도상으로 해석하는지 아시겠죠? 


성경에 이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을 형상화한다는 구절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의 구절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기록을 통해 구체화되고 상징화된 문양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8-19)

이 단어의 상징을 이해하면 이 그림에 들어있는 그물 속 물고기(구원받은 성도)와 밖으로 있는 물고기가(구원받지 못한 성도) 더 실감 나게 해석됩니다. 


시선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변화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오른쪽에 있는 노 젓는 노인은 완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물을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얼굴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인물입니다. 


이 의미는 좋게 해석하면 당장 자기에게 맡겨진 노 젓는 일에 집중하는 제자로 볼 수 있지만 구원에 관해 해석해 보면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한 구세주로 믿지 않는 인물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노인 곁에 있는 두 젊은이의 시선을 볼까요? 이들 역시 일에 집중하고 있어 몸동작이 바다의 그물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젊은이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려 예수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점진적인 시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다음 제자들을 보면 일체의 작업을 멈추고 오직 예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점점 시선이 예수께로 옮겨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앞의 베드로는 몸과 시선이 모두 오직 예수께로 향하고 있게 묘사했습니다. 

점진적인 시선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서로 다른 배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구원을 받은 제자와 제자로 불리긴 하나 아직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제자로 구분시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율동

이 그림에 화가가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물이 있는 아래에서 표현하지 않고 인물의 높낮이를 활용해 배 위로 바다의 율동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시각적 회화 예술인만큼 그림을 보다가 보면 인물의 높낮이에 따라 시선도 이 선들을 따라갑니다. 


이 작품의 특이성 중의 하나는 바다의 물결을 바다에서 표현하지 않고 배 위의 인물들을 통해 표현한 점입니다. 바다로 묘사된 부분을 보면 전혀 물결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출렁임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의 높낮이를 통해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화가가 구성한 창의적 부분입니다.  


”바다에 전혀 물결이 없습니다.” 


포도송이

이 그림에서 포도송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바다 가운데 과수원이 있을 리 없으니 포도송이를 상상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자와 예수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입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 시기는 신약사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예수는 곧 자신에게 있을 십자가 죽음이 다가왔던 시기였고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에 의해 예수의 복음을 만방에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음이 따랐던 사역이며 그만큼 제자들은 늘 복음(예수) 안에 머물고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와 제자가 한 몸이 되어야 했던 시기입니다. 성경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포도나무와 포도송이입니다.  이 연결 부분을 화가는 포도송이를 비유해 묘사했다고 봅니다. 


우선 예수와 제자들을 살펴보면 아주 적은 부분들로 몸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연결된 포도송이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수직으로 세워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의문

이쯤 해서 이 작품에서 가장 의문이 되는 부분을 살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에서 뭔가 어색한 부분을 발견했는지요? 예수의 왼손입니다. 


보통은 예수가 축복을 하거나 큰 메시지를 보낼 때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특별히 축복과 축도는 오른손을 들어하는 것이 통상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왼손을 들어 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관객으로부터 돌려 감추었습니다. 중세 명화에서 등을 보이는 것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화가가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전체 그림 속에서 화가가 구성한 대비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오른손에 도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도상이 이 오른손에 담겨있습니다. 회화사 최초로 해석해 보는 부분입니다. 


왜? 왼손을 들어 표현하고 있으며 몸을 돌려 등을 보이게 앉아있게 구성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대조. 대비

이 작품에는 대조와 대비가 들어있습니다. 배의 숫자, 인물들의 시선, 의상의 색 등이 대조와 대비를 이룹니다. 

우선 배가 두 척입니다. 왼쪽의 인물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는 제자인 반면에, 오른쪽 배에 있는 인물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왼쪽의 배와 오른쪽의 배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성경의 특이한 숫자의 상징으로 볼 때 2라는 숫자는 분리를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왼쪽과 오른쪽의 배가 분리되어 서로 대조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해석을 확증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물을 좀 더 크게 확대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물에 잡히지 않은 물고기가 3마리죠?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인물들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셋입니다. 오른쪽 배에 탄 사람의 숫자 역시 셋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른쪽 배에 탄 인물들의 상징 역시 예수를 아직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색입니다. 

같은 색을 찾아보시면 서로 대비되게 색을 활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매우 특이한 비교되는 점도 있습니다. 나이에 따른 모습입니다. 얼굴을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서로 비슷한 나이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지니고 있습니다. 

머리 헤어스타일과 코의 날카로움과 턱에 난 뾰족한 수염이 같습니다. 얼굴이 오른쪽과 왼쪽을 보이고 있어 대조를 이룹니다. 

나이가 비슷한 청년입니다. 머리 스타일이 같으며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같습니다. 

이번엔 노년의 얼굴입니다. 대머리이며 턱수염이 비슷합니다. 

그러면 예수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던 부분을 살펴볼까요? 왜 예수가 등을 보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푸른 망토를 걸친 제자를 돋보이기 위해 예수가 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조를 이루기 위해 망토를 입은 제자와 자세를 반대로 취한 것입니다. 



바다 색의 비밀

바다 색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배경으로 펼쳐진 연한 색의 푸른 바다와는 다르게 어둡고 무겁습니다. 같은 바다 일 텐데 왜 이렇게 인물들이 탄 배의 앞과 뒤의 색이 다를까요? 이 표현에는 화가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살펴볼까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누가복음 5:7)


예수는 바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만큼 깊은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면 이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이 훨씬 깊은 바다 쪽에 있게 됩니다. 화가가 원하는 구성인데요. 왜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바로 물고기 때문입니다. 깊은 곳에 던지면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이 이 그림의 배경이죠? 화가는 훨씬 깊은 곳에 있을 관객들이 예수라는 그물에 걸려 구원받기를 원하는 구성입니다. 훨씬 깊어 보이는 짙은 바다에 담긴 비밀입니다.


오른손의 비밀

그렇다고 해도 왜 왼손을 들어 표현했을까요? 왼손을 들어야 훨씬 멋진 동작이 되겠고 또 하나는 오른손에 중요한 상징을 담기 위해서라고 이해합니다. 오른손을 확대해서 볼까요?

멀리서 보면 그냥 편하게 오른손을 내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배경 구절과 연관시켜 볼 때, 손을 바닷속으로 넣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림의 장면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깊은 바다로 그물을 던질 것을 명했고 이 권고를 그대로 따랐던 제자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고 난 직후입니다. 바다에 기적을 일으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표현하기 위해 오른손을 바닷속으로 넣은 것 같이 묘사했다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왜 예수가 잘하지 않는 왼손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을 관객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채 그렸는지를 설명합니다. 

 

풍경

그림의 배경이 되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집들과 해안입니다. 중동 지역에서도 시골로 알려진 당시 갈릴리 호숫가에 큰 왕궁과 벽돌로 지어진 성들과 중세의 특이한 붉은 기와가 보입니다.

이 부분 만으로도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화가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림을 감상하실 때 화가의 고향을 알아 두실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해안가 풍경은 화가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는 실제 그곳의 모습입니다.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 바사노델그라파는 이탈리아 베네토주 비첸차도의 도시입니다


유사 그림

Raphiel. 1515.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그림의 구성을 보시면 똑같습니다. 이상하죠? 같은 화가가 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시기적으로는 이 라파엘로의 그림이 약 30년 일찍 제작되었습니다.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예술 분야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1513년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라파엘에게 시스티나 경당(Sistine Chapel)에 걸기 위해 tapestries(태피스트리란 색실을 짜 넣어 그림을 표현하는 직물 공예이다.)용으로 제작된 밑그림입니다. 


이 라파엘로의 그림은 중경 부분에 인물들을 배치했습니다. 전경에는 어촌의 실감을 느낄 수 있는 새들이 등장해 잡은 물고기를 탐내는 상황을 볼 수 있으며 땅에는 생물을 그려 해석해야 할 도상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림에 반사된 부분도 다르죠? 연극적인 분위기보다는 실제 강가에 있는 느낌이 들며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림 분석을 마치며 참고로 그림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성경 기록을 올립니다. 화가는 이 내용을 참고 삼아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화가가 어떻게 구성했고 어떻게 작품을 마무리했는지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림의 배경 구절

 

이 책에서 소개해 드리는 예수님의 갈릴리 기적 사건에는 모두 3개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리는 것은 이 책의 첫 번째 그림인 람베르트 수스트리스(Lambert Sustris)의 “갈릴리 호수가의 예수”와 같은 사건입니다. 


즉 첫 번째 그림의 배경인 요한복음 21장과 세 번째 그림의 배경인 누가복음 5장의 사건이 같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 사건을 기록한 저자에 따라 기록한 목적이나 관점과 내용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 점은 성경의 오류가 아니며 저자에 따라 기록하는 관점이 다르다 보니 발생한 차이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에 관한 내용은 끝부분에서 짧게 다루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누가복음 5:2)


당시 갈릴리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과 어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척이 있고 어부들이 배 밖에서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입니다. 이런 어촌의 풍경을 그린 화가들도 있습니다. 


이곳 구절에 숫자가 등장하죠?  2척의 배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두척이 등장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구절에서 숫자가 등장하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중세 화가 역시 기억한 숫자입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누가복음 5:3)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광경입니다. 이 상황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누가복음 5: 4-5)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밤새 잡지 못했음을 아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베드로는 일생을 바다에서 살았던 전문 어부입니다. 밤새도록 헛수고했는데도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려 보겠다고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누가복음 5: 6-7) 


밤 새 잡지 못했던 생선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였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 성경 기록자인 누가는 자세히 적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배 두 개로 나누어 성선을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그림에 배가 두 개 보이죠? 그물에도 물고기가 넘치도록 그린 이유가 구절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많이 잡을 수 있었던 상황의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니’입니다. 교회에서는 문장을 오래 쳐다보고, 오래 동안 곱씹어 보는 묵상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구절 속의 모든 된 일은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순종’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 누가복음 5:8-10)


첫 번째 그림의 배경인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이심을 알았던 한 제자가 베드로에게 알려줘서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갑작스러운 사건(기적)을 통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두 기록이 조금씩 다른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왜 베드로가 12제자 중에서 가장 대표되는 제자로 꼽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의 첫마디가 자신의 죄성을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행하시기 전에 주님이심을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인간의 원죄로 인해 보는 것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도 그렇게 기록해 놓았죠? 고기 잡힌 것으로 놀랐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평생 경험이 깨어지는 순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복음 5:4-11)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장면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떠나시라고 말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기회를 부여합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이는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언급한 구절과 같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끝까지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이 그림에 담겨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하는 시몬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8-19)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을 참고 삼아 여러분들이 그림을 해석할 차례입니다. 화가가 얼마나 자세히 이 구절대로 그린 것인지를 살펴보시고 화가의 화풍과 특별히 그림 속에 심어 놓은 메시지를 찾아 감상하셔야 합니다. 

 

떠나며

중세 그림여행을 마치려고 하니 가장 크게 마음에 남는 부분이 계속 떠 올라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그물에 걸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입니다. 

저는 다음 그림여행을 준비해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계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히 내용을 살펴보는 < 내 집은 미술관>입니다.


부탁: 이 글에는 미술사 최초로 해석된 부분과 처음으로 발견한 도상이 있어 저작권이 있습니다. 필요시에 먼저 연락을 취해 주시기 바랍니다. (ark353md@gmail.com)


"문을 열면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중세 명화의 관문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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