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되는 예수" by 히에로니무스 보쉬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태복음 26:47)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한복음 18:3)
안녕하세요. 샌디에이고의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태평양을 건너 우리 곁으로 찾아온 특별한 중세 명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체포되는 예수>와 함께 그림 여행을 시작합니다.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번뜩이는 칼날과 일렁이는 횃불, 그리고 그 빛 아래 드러난 기괴하고 야릇한 인간들의 얼굴입니다.
일반적인 성화와는 달리 인물들이 숨막힐 듯이 밀착되어 있어 예수가 느꼈을 그 밤의 압박감과 고립감이 우리 피부에 직접 닿는 듯합니다. 작가는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들의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우는 ‘크로즈업 기법’을 통해 우리를 마치 체포 현장의 한복판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화면 중심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평온을 유지하는 예수의 얼굴과, 그 주변을 에워싼 채 탐욕과 분노로 일그러진 군상들의 캐리커처 같은 표정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화면 상단 우측에서 서슬 퍼런 단검을 치켜든 베드로의 칼날 위에 화가 자신의 이니셜인 'B'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보쉬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작품의 진위성을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세속적 쾌락의 동산.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아시죠? 보쉬의 가장 유명한 대작이지만, 놀랍게도 이 작품에는 서명이 없습니다. 자신의 많은 작품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기에 미술사학자들이 붓 터치나 목판의 연대 측정을 더 중요한 진위 판별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작품의 희소성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 아수라장 속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작품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화려한 의복을 입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예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종교 지도자들과, 그 곁에서 거친 손으로 예수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조롱하는 인물의 모습은 인간이 가진 잔인함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특히 화면 상단에서 거대한 몸집으로 횃불을 들고 있는 인물은 이 모든 체포 과정을 배후에서 주도하는 권위적인 학자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유다의 머리띠에 박힌 정교한 진주들과 보석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부의 상징이었는데, 이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았던 그의 통제되지 않는 물욕을 시각적으로 비난하는 장치입니다.
유독 유다만이 입을 벌려 치아를 드러내고 있죠? 이 상징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며 로마군인에게 스승을 알려준 기록을 대변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한 유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참으로 치밀한 묘사입니다. 스승을 판 대가인 은 30냥을 숨기거나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비겁함을 손을 감춘 도상적 장치로 풀어냈습니다.
화가는 유다의 머리 바로 위에 베드로의 칼을 교묘하게 배치했습니다. 이는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상대를 파멸시킨 비겁한 배신자에게 닥칠 비극적 심판의 복선입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죠. 보쉬는 이 단검의 배치를 통해, 칼보다 더 날카로운 심판이 이미 배신자의 머리 위에 머물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를 체포하는 현장의 광기는 하단의 베드로와 말고의 충돌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불같은 성미를 참지 못한 베드로가 단검을 휘두르자 대제사장의 종 ‘말고’는 칼날을 피하려 온몸을 비트는데, 여기서 보쉬만의 아주 이례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말고(Malchus)가 두 손으로 부싯돌 상자를 다루느라 베드로의 옷자락을 입으로 꽉 물고 있는 장면입니다. 악행을 돕기 위해 불을 피우려 애쓰는 인간의 집요함과 광기가 강아지처럼 옷을 물고 늘어지는 이 기괴한 몸짓 하나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화가만의 상상력이 집약된 한 컷입니다.
화면 양 끝에 묘사된 어두운 산비탈과 숲은 이곳이 성경의 기록대로 칠흑 같은 밤의 감람산 겟세마네임을 증거합니다.
횃불의 불빛은 어둠의 권세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임을 알리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난 받는 예수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는 영적인 빛이 됩니다.
마지막 소주제로 이 작품 속에 얽히고 설킨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실 보쉬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 눈동자들의 방향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면에 표시된 노란 화살표들을 따라 그들이 저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죠.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예수의 시선입니다. 수많은 군상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는 긴박한 순간에도, 예수는 눈을 고요히 감은 채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는 주변의 폭력적인 광기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내면의 평온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성스러운 침묵의 시선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체포하러 온 이들의 시선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날카롭습니다. 화면 왼쪽의 대제사장은 집요할 정도로 예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냉소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롯 유다의 시선은 사뭇 다릅니다. 그는 차마 예수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들린 횃불이나, 혹은 자신이 틔운 음모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비겁하게 비껴가 있습니다. 가장 평범한 얼굴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엇갈린 시선 속에는 스승을 배반한 자의 감출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마음 속 깊이 일렁이고 있을 것입니다.
하단의 “말고와 베드로”의 시선 역시 압권입니다. 베드로의 칼날을 피하며 옷자락을 물고 있는 말고의 눈은 공포와 집착으로 번뜩이고, 그들을 지켜보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은 마치 이 범죄의 현장에 관람객인 우리까지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묘한 서늘함을 줍니다.
보쉬는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엇갈리는 시선들을 통해 현장의 혼란을 극대화했습니다. 세상을 초월하여 아래를 향하는 '신성한 시선', 욕망과 증오로 상대를 쏘아보는 '폭력적인 시선', 그리고 죄책감에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불안한 시선'까지. 이 팽팽하게 엉킨 시선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500년 전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이 긴박했던 그림 여행을 서서히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이 비극의 현장을 다시금 조망해 봅니다. 폭력과 광기로 가득 찬 험악한 군상들 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한 예수의 표정만이 관객의 시선을 붙듭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약 2,70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남긴 이 엄숙한 예언은, 600년 전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붓끝을 통해 이 화폭 위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밤에 터져 나온 인간의 가장 추악한 악의(惡意)를 기괴하고도 적나라한 형상으로 고발한 중세의 고독한 천재 화가. 그가 남긴 일그러진 얼굴들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발견했을까요?
시대를 관통하는 보쉬의 날카로운 시선을 가슴에 품으며, 오늘 준비한 그림 여행을 마칩니다. 그럼, 저는 다음 작품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면
곧
중세로 향하는 길목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