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턴 리비에르의 "충직"
여러분은 세상이 등을 돌려도 내 곁을 지켜줄 존재가 있으신가요?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짐승의 묵묵한 눈빛이 더 큰 구원이 되기도 합니다. 비록 '맹목적이지만 지독한 사랑의 시선'을 담은 명화, 브리튼 리비에르의 <충직>이란 작품입니다.
감옥 벽에 새겨진 교수대 낙서와 의문의 이름 'Mary', 그리고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남긴 처절한 낙서(유서) 위에 왜 개 한 마리가 턱을 괴고 있는 것일까요? 이 작품에 담긴 상징의 세계로 떠나는 그림여행입니다.
이 그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일까요? 19세기 영국의 '설탕 왕'이라 불린 헨리 테이트 경은 단순히 부를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소외 받던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테이트 미술관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1894년에 기증했는데 그가 기증한 많은 컬렉션 중에서도 이 작품을 가장 아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도덕적 교훈과 감성적 울림을 중시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내용의 이 작품은 그의 기증을 통해 소중한 문화 유산이 된 것입니다.
화가 브리튼 리비에르는 당대 최고의 동물 화가로 꼽히지만, 단순히 동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물의 시선과 몸짓에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투영하는 '심리적 동물화'의 대가 였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런데요. 그는 화려한 기교 대신 배경을 단순화하여 관객이 인물과 동물 사이의 정서적 교감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구석에서 부러진 팔을 감싸 쥔 채 얼굴을 가린 남자와, 그런 주인의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위로의 시선을 던지는 개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제 그림 내부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처음엔 평범한 헛간처럼 보였던 이 장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비극성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화면 속 남자의 복장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읽힙니다. 신발에 집중해 보십시오. 단추가 많은 투박한 가죽과 흙먼지가 묻어 헤진 신발은, 그가 사회적 보호의 울타리 밖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하층 계급의 노동자나 농부, 혹은 거친 들판을 누비던 사냥꾼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는 당시 말을 타며 권위를 누리던 상류층 귀족들의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구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물의 고단한 처지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제 시선을 공간의 구석으로 옮겨보겠습니다. 화면 왼쪽에 유일하게 난 창은 쇠창살이 박힌 단조로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창 너머로는 그 어떤 풍경도, 한 줄기 빛의 희망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이 꽉 막힌 공간은, 인물에게 더 이상 내일이라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푹신한 카펫 대신 바닥에 뒹구는 거친 볏짚, 그리고 발끝에 닿는 차가운 석재 바닥은 이곳이 자비 없는 냉혹한 감옥임을 증명합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자비로 가족이나 반려동물과의 면회를 허용하곤 했습니다. 그림 속 개의 등장은 바로 그 생의 가장 고독하고 처절한 마지막 순간에 허락된, 유일하고도 짧은 만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관객의 시선이 '오해'에서 '진실'로 옮겨가는 과정이 이 그림의 묘미인데요. 어느 마구간의 평범한 일상처럼 보였던 배경은, 인물의 정체가 '사형수'로 인식되는 순간 냉혹한 형장으로 인지됩니다.
바닥의 흩어진 볏짚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인물의 산산조각 난 내면을 투영하는 매개체가 되며, 식기 하나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은 생의 의지를 상실한 자의 허무를 극대화합니다.
작가는 인물의 다친 팔보다 그가 가린 '얼굴'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동작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본능이자,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압도적인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무너짐이 더 깊음을 이 정지된 자세 하나가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벽을 좀더 세밀하게 볼까요?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이 벽에 담겨있습니다. 벽에 새겨진 낙서들이 보이죠? 교수대이고 처형된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눈에 드러나는 개의 애정어린 눈망울과 대조되는 섬뜩한 내용입니다. 단순한 낙서 같지만 이건 이 방에 있는 남자의 마지막 유서 같은 것입니다.
교수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더 깊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요.
교수대에 매달린 이 기묘한 낙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요. 얼굴에 해당하는 원 안의 형상은 얼핏 영어 이니셜 'I'처럼 보이기도 하고, 죽은 자의 이목구비를 짧은 선으로 단순화해 묘사한 전형적인 죽음의 상징으로도 읽힙니다. (눈의 형상이지만 영어 I(아이)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형상을 이니셜 'I'로 느끼신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세요. 영어 이니셜 I, 이게 왜 교수형에 처해진 낙서에 적혀 있을까요? 자신은 감옥에서 번호로 불리는 죄수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로 인식해 마지막 서명을 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I로 시작되는 이름일 수도 있겠죠.
또한 인물의 얼굴을 단순화 시켜 형상화한 것이라면 코와 입을 뭉뚱그려 표현함으로써 수감자가 직면한 처절한 사형 선고와 비극적 운명을 시각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 곁에 적힌 'Mary'라는 이름은 그가 끝내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연인이나 아내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종교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간절한 기도문으로 해석도 됩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이름은 차가운 감옥의 현실과 대비되며, 그가 잃어버린 따뜻한 일상을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벽면의 낙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Mary'라는 이름 반대편에 마치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낙서들과 달리, 오직 이 십자가 문양에만 지우려고 애쓴 듯한 훼손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사형수인 그는 십자가 앞에서 자비로운 구원을 갈구하다가도, 자신의 죄가 너무나 무거워 그 은혜조차 과분한 선물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복음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그 희망을 지워버리려 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심리적 갈등이 이 흔적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밀한 표현은 화가의 놀라운 창의성과, 실제 사형수가 겪었을 고뇌에 대한 깊은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벽면은 낙서로 가득 찬 차가운 벽이 아니라, 절망의 끝에서 써 내려간 수감자의 고백이자 영적인 소통의 공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그 곁을 변함없이 지키는 개의 충직이란 단어는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구원을 부정하려 했던 인간의 나약함조차 묵묵히 품어주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도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기록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으로 붙들은 손은 절대로 놓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작품 속 상징과 메시지를 찾아가다 보니 생각이 깊어지고 화가의 마음이 읽혀지는 듯합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백미는 인간과 동물의 극명한 대비에 있습니다. 인간은 수치심에 얼굴을 가렸지만, 개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합니다. 세상 모두가 그를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부르며 등을 돌릴 때, 오직 이 충직한 개만이 그를 단죄하지 않고 따스한 온기를 나눕니다.
세상은 법의 이름으로 이 남자를 지워버리려 했지만, 화가의 붓끝에서 살아난 'Mary'라는 이름, 애써 지운 십자가와 개의 간절한 눈빛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조건 없는 사랑을 보내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이 만든 복잡한 정의보다 말 못 하는 동물의 묵묵한 곁지킴이 더 숭고하게 다가오는 그림 감상 시간이었습니다.
"진정한 충직함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묵묵히 곁을 지키는 저 개의 눈빛과 같은 신의 은혜에 있다"라는 문구를 생각하며 이번 그림 여행을 마칩니다.
오늘의 그림 여행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작은 온기와 성찰이 되었기를 기대합니다. 영상으로 보고 싶으시면 유튜브 채널 <명화 속 상징>에서 시청해 주시고 그림이나 그림 감상을 좋아하는 친구있다면 공유해 주십시오.
저는 다음 그림여행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발길을 돌리면
곧
중세로 향하는 길목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