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스트 레터>를 보고
방금, 막연히 <러브레터>의 아류에 불과할 거라고 미뤄 짐작했던 영화 <라스트 레터>를 보았고, 이 영화는 결코 <러브레터>의 아류가 아님을 알게 됐고, 위의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눈물이 펑펑 났던 그런 장면이었기에 캡처해두었다. <러브레터>를 여러 번 보았지만, 가장 최근에 보았을 때에서야 그 영화가 '시간', 그중에서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영화를 본 뒤에는 그러한 생각이 더욱 공고해졌다. <라스트 레터> 또한 결국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영화다.
<러브레터>에서는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가 나오는데, 그들이 학창 시절 같은 공간에서 동시간대를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흘러가버린 시간-즉,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뒤늦게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발견된다. <라스트 레터>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살아온, 그것도 한 때 서로 사랑했던 이들이 불가피하게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놓쳐버린 시간이 있었고, 또다시 편지를 매개로 그 시간에 대해 뒤늦게 알아채게 된다.
내가 이 두 영화를 보며 자꾸 펑펑 울게 되는 까닭은, 그러한 시간의 상실성 때문이다. 시간은 인간을 관통하여 흘러가지만,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어 우리는 불가피 시간을 상실, 즉 잃어버리고야 만다.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시간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고난 뒤이기에 그러한 유한함 까닭에 울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상실한 시간은 뒤늦게 당도한 편지와도 같다. 편지는 수신인에 의해 개봉될 때까지 의미를 갖지 못하며, 개봉될 때에서야 수신인에게 도달하여 의미를 발화한다. 그렇게 편지는 쓰인 시점과 읽히는 시점의 간극으로 인해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때로는 오해를 해소하기도 한다. 즉, 편지는 그 안에 특정한 시간을 머금고 있고, 편지가 개봉되는 순간 그 시간의 봉인도 함께 해제된다. 멈추었던 시간은 다시금 흐르게 된다.
이와이 슌지가 그토록 자신의 영화에서 '편지'와 '시간' 사이의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편지만큼 '시간의 상실'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매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편지는 시간의 상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록물이라는 차원에서 '시간의 응축'을 보여주기도 하므로,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상실과 응축이 반복됨에 따른 다양한 감정들이 떠오르곤 한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듯이,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라스트 레터>를 통해 나도 모르는 감정의 올들이 맥없이 풀려나왔다는 것. 그러한 까닭에 영화 속 주인공처럼 무력해지기도 했지만 무력에 대한 반동의 감정으로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는 것. 무엇보다도 마침내 이와이 슌지의 영화 언어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생겨났다는 것.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 역시 시간의 일부를 상실하였고 시간의 일부를 응축하였음을 깨닫는다.
사요나라 이츠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