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소설집 <저주토끼>의 흉터
<흉터>는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에서 가장 긴 작품이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하며 불안한 세계와 마주한 한 개인의 내면을 영웅서사의 구조를 비트는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후 고통스럽게 골수를 빼앗기던 소년이 있는데,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골수를 빼앗겼지만 특별한 능력도 얻었다. 장사꾼을 만나게 되면서 위기의 순간이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무리와 함께 싸움터를 돌아다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다. 어떤 마을에 도착해 남매를 만나는데 왜 자신이 제물로 바쳐졌는지 여동생으로부터 듣게 된다. 괴물 때문에 마을에 병이 들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공양하기 위해 소년을 잡아다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말이다. 이야기를 듣고는 괴물을 죽여 저주를 풀기 위해 나선다. 마침내 괴물을 찾아서 죽이지만 평화를 찾기는 커녕 자신에게 친절했던 (남매의)여동생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물거품처럼 변해버린다. 이 이야기는 정의란 존재하는가. 포식자인 괴물, 제물로 바쳐진 피식자, 그 구조 속에서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의 관계가 어느 하나 무너지면 세계 자체가 무너진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모두가 함께 행복한다는 건 존재할 수 없고, 누군가는 아파야하며, 누군가는 그 아픔으로 행복을 취해야한다는 걸 신화적인 스토리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헌재에서 심리 중인 윤석열 탄핵 사건의 마지막 변론기일이 벌써 한달 전이다. 빠르게 결론이 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과 기대를 헌재는 무심하게 무시하고 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언제 결론이 날지에 대한 브리핑 또한 없다. 최우선으로 처리한다던 윤석열 탄핵 사건의 선고가 설명도 없이 미뤄지고 있다. 이때문에 정치권에선 단식투쟁이 이어지고 있고, 노총의 총파업도 예고된 상태다. 무엇이 이들(헌법재판관)을 이리 만들었는가. 그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보이지 않는가. 차벽으로 둘러쌓인 헌법재판소와 경호원로부터 안전함을 느끼는 지도층의 무심함인가.
정보라의 작품 흉터에서 무참히 드러난 세계관이 지금 우리 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갈등이 원만하고 공정하고 그리고 곪아터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해결이 되면 좋은 공동체라고 볼 수 있겠다. 정치인, 지도자의 역할은 이 갈등을 잘 조절하는게 제1의 목표다. 하지만 윤석열의 정치는 그러지 못했다. 시장주의자라고 표방하던 자신은 시장(갈등의 당사자들을)을 존중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마음대로 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부터 내뱉고 한 말과 행동들을 지켜봐왔다면, 잘해보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잘 안된 케이스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정치인이기 이전에 법을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태도이다. 갈등은 법을 다루는 그들의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역설적으로 갈등이 커질수록 필요성도 커진다. 탄핵 반대든 찬성이든 시위가 격해질수록 경찰력의 행사는 중요해지고, 서부지법 난동 사건은 오히려 사법부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다.
그러니까 공동체의 일원으로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길 원하는 민주시민(혹은 제대로 된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나 자리에 방점을 찍은 지도층이라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은 그들의 지위를 더 공고히 해주기때문에 적극적 해결의지는 거추장스럽다. 정치와 종교는 대중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 작금의 불확실성, 즉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기대와 고대는 오히려 그들의 먹이다. 다른 시간대와 공간에서 그런 먹이를 먹고 비대해진 것이 윤석열이라는 괴물이고, 포식자-방관자(부역자)-피식자의 세계관에서는 이 구조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멸절이다. 더욱이 그들은 피식자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 종국엔 괴물을 처치하겠지만 그 전에 사회갈등을 방기해 자신의 정당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영원히 아파야한다. 광장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헌재의 선고를 기다리면서 저주 받은 이 세계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