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애니는 뉴욕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남자들의 시선과 환상을 판매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고, 그는 애니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다. 애니는 그 초대를 운명이라 여기고, 신데렐라처럼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녀는 곧 처절한 첫 번째 실패를 경험한다. 이 실패는 예견됐다.
첫 번째 실패는 거부당함의 실패다. 애니는 이반의 세계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그 세계는 그녀를 밀어냈다. 애니는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그곳’에 어울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신데렐라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실패는 그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애니’로 남아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실패는 다르다. 그 변화의 징조는 ‘이고르’라는 남자의 등장과 함께 온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네 본명은 뭐야?”라고 묻는다. 애니가 아니라, 아노라.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고르가 그녀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단순한 애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애니는 여전히 ‘애니’로 존재하며, 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헤어지기 전 이고르는 그녀에게 몰래 가져온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넨다. 그러자 애니는 그 호의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느낀다. 그녀는 몸으로 값을 지불하려 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애니의 정체성이다. 이고르는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키스를 시도하지만, 애니는 거부한다. 그리고 이내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첫 번째 실패가 바깥 세계에서의 거부였다면, 두 번째 실패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거부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데렐라가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데렐라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이 두 번째 실패는 더 깊고, 더 근본적인 실패다. 첫 번째 실패는 타인에 의해 정의된 것이지만, 두 번째 실패는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만약 새로운 세계가 항상 파괴 위에 지어진다고 한다면, 애니가 애니로서 겪은 실패 위에야 비로소 아노라가 설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이후 어떻게 변화할지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