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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9 내언니전지현과나

#9내언니전지현과나


 지난 서술에서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봤다고 썼는데, 생각이 날아가기 전에 얼른 이야기해보련다. 90년대 생인 감독은 ‘일랜시아’라는 클래식 온라인 RPG 게임을 하는 유저이고, 게임 내 ‘마님은돌쇠만밥줘’라는 특이한 이름의 길드를 만들어 플레이하고 있다. 하지만 운영자가 손 놓은 지 오래라 각종 매크로(유저들이 게임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서 사용하는 불법 프로그램으로 통상 운영이 잘 되는 게임의 경우 패치를 통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를 사용하는 유저가 대부분이고 감독 또한 사용한다. 수년째 업데이트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20년이나 된 이 게임을 왜 하는지와 불법 매크로에 대한 유저(길드원)의 의견을 묻는다. 후반부에서는 악성 버그 때문에 게임 플레이 자체가 어려워지자 넥슨을 찾아가 항의한다. 결국 넥슨에서 유저 간담회를 추진해 유저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패치와 이벤트를 하는 등 변화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날카로운 시선은 없지만 ‘일랜시아’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감독과 유저들의 게임에 대한 애정이 돋보였다. 그리고 가상세계인 ‘일랜시아’와 현실과의 관계를 좀 더 밀착시킨다. 제목 속 내언니전지현은 감독의 게임 내 캐릭터 이름인데,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게임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모토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는 게임을 엄청 좋아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에 컴퓨터가 생긴 이후로 게임을 놓은 적이 없다. 일랜시아를 해보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온라인 RPG ‘라그나로크’를 시작으로 많은 게임들을 해봤다. 슈팅이나 편을 갈라 대결하는 대전이 메인인 게임들은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수집하고 성장하고 모험하는 게임들을 주로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공감이 많이 갔다. 열심히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재화를 현금으로 바꾼 적도 있고, 사기를 당해서 게임을 지운 적도 있고, 어린 시절엔 같이 게임하는 유저와 만난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만난 사람은 딱 한 번이었다. 그 게임을 그만둔다고 하니 정리하려면 자기한테 팔라고 하길래 왕십리 어딘가에서 만났는데, 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였다. 저녁으로 고기를 얻어먹고 웃돈까지 받고 넘겼다. 몇 년 후에 생각나서 다시 게임에 들어갔더니 없더라. 아무튼 영화의 일랜시아와 비슷한 류의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내 게임사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영화에서도 개발자들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내용이지만, 요즘 게임은 너무 게임답지 않다. 물론 모바일이나 온라인게임 이야기다. 경쟁을 기반으로 말도 안 되는 과금 유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전략과 노력 등을 투자하면 그에 맞게 보상을 받으면서 공평하게 성장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돈이면 다 되는 더러운 세계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의 세계로 들어가도 내 노력은 보상받지 못하고 양극화는 점점 커지고 무기력해진다. 유저들과의 커뮤니티 기능 또한 그 자체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다 보니 유명무실하다. 이러다 보니 최근엔 콘솔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랜시아를 개발한 개발자가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을 하는데, 매일 어느 동굴 맵에서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어느 유저와 말을 트게 됐고, 친해져서 같이 하다 그 유저의 친구와도 친해져서 매일 셋이서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등을 맞대고 사냥을 했다고. 어느 날 모뎀이 망가져 약속한 시간에 못 가게 될 것 같아. 땀 흘리며 용산에 가 모뎀을 사와 겨우 접속을 했는데, 혹시 접속을 못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면서, 살면서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 적은 없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낭만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라그나로크를 하면서 나도 느낀 적이 있다. 게임에 접속을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주 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게 낙이었다. 앞으로 게임을 하면서 다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임도 게임이거니와 이미 나도 게임을 하면 모으고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에 얽매인다. 매크로가 있으면 돌리고 싶을 정도로.   

 

 경치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게임 하나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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