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겨울 방학식을 하는 날, 은호와 여행을 떠났다. 아들은 가고 싶은 곳이 특별히 있는 건 아니라며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고 했다. 나는 몇 달 전 남편과 방문했던 경주를 떠올렸다. 최근 오래된 도시를 여행한 적이 없는 은호에게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내가 얼마 전에 가봤기에 잘 안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떠나기 며칠 전 아들 둘을 키운 육아 선배에게 경주로 여행을 간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착하네, 엄마랑 놀아주고.”
상황상 남편과 첫째가 함께할 수 없었기에 둘이 떠나는 단출한 가족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안가도 될 것을 내가 무리스럽게 추진한 것인지 반문하게 되었다.
‘혹시 억지로 따라가는 건가? 아들한테는 이 여행의 좋은 점이 없을까?’ 하는 우려의 마음이 생겼다.
은호는 이번 여행에서 어디에 무엇을 썼는지 기록하는 회계를 맡았다. 식비, 기념품, 체험, 입장료 등의 영수증을 챙기고 틈틈이 경비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었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카페에 들어가 각자의 일을 했다. 한번은 실내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길거리에 있는 상점을 둘러보았다. 아들은 한적해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골랐다. 나는 ‘아이스크림은 금방 먹으니까 곧 일어나야 할 텐데…’ 싶었지만, 별말 없이 따라갔다. 한 시간쯤 그곳에 있었을까, 아들은 이제까지 쓴 돈을 계산해 보더니 “나 음료수 한 잔만 더 시킬게.” 하고 키오스크에서 결재했다. 나는 한곳에 오래 있으면 눈치가 보일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음료를 시킬 생각은 하지 못했다. 노트북과 짐을 챙겨서 다른 공간을 찾아가느니, 아들처럼 추가 구매를 하고 할 일을 마치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았다.
이곳에서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점은 아들이 선택한 메뉴였다. 쿠키앤크림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던 아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맛에 도전하겠다고 시솔트 아이스크림을 시켰는데, 이 모습을 보며 이젠 은호도 어른 입맛을 가졌구나 싶었다. 평소에는 둘이 카페에 가본 적이 없다가, 여행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니 아들의 취향이나 소비 성향이 눈에 들어온 듯하다.
밤에는 동궁과 월지에 갔다. 관광지 입구에는 반짝거리고 팔랑거리는 장난감을 파는 상인들이 여럿 있었다. 사고 싶다는 표정의 꼬마와 보호자 무리를 보고 별궁 터로 들어왔는데, 안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장난감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은호가 나에게 물었다.
“저걸 누가 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사네… 나도 옛날에 저랬어?”
“그랬지. 너는 에버랜드에서 호랑이 통에 넣어 파는 팝콘을 사달라고 그랬지. 막상 팝콘은 별로 먹지 않았는데, 동물 모양 통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나 봐.”
“맞네! 와, 애들한텐 이런 게 먹히는구나.”
은호는 야경보다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는 듯했다. 나 역시 얼마 전에 이곳에 와보았기에, 관광보다 아들과 산책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았다.
돈 관리를 맡았던 아들은 한 사람당 10,000원으로 어림잡았던 동궁과 월지 입장료가 3,000원이라는 사실과 불국사 입장료가 없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남은 돈으로 셀프사진관에 가기로 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젊은이들의 공간인 것 같아 궁금함을 참고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 있으니 들어갈 용기가 났다. 둘이 개구리 머리띠를 하고 찍은 사진은 경주답지는 않지만, 여행지를 기록하는 좋은 기념품이 되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은호에게 지인의 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아들이랑 여행 간다고 했더니, 아들이 착해서 엄마랑 놀아주는 거라던데?”
은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내년에는 더 바빠지니까 그 전에 엄마랑 추억 쌓는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고. 근데 그게 다는 아닌 게, 저도 여행지에서 새로운 걸 보고 맛있는 것 먹으니까 환기가 되고 좋았어요.”
아들과 내가 한 손씩 맞대어 하트를 만든 인생네컷을 보면서 은호가 나랑 ‘놀아준’ 것이 사실이었음을, 앞으로 같이 여행 가는 일이 더욱 귀해질 것임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