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야기 >>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 1화
>> 최은(영화평론가)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 1화 -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2008)와 <감기>(2013)
편집자주] ‘역사 교사를 위한 영화수업’은 2020년 여름 호부터 신설된 코너 입니다. 영상 매체를 통하여 역사 수업을 꾸릴 여지를 찾아보기 위해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평론가 최은 님께서 필자로 참여해주십니다. 다음 호부터는 전국 각지 선생님들이 보내주신 주제 중 하나를 선정하여 연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업에 적용하고 싶은 주제를 보내주시면 원고 작성을 부탁드릴 때에 참고하겠습니다.(관심 주제를 발송하는 방법은 추후 안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이 코너가 독자 선생님들의 수업 구상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연이 한 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현장에서.
사람들이 대형 마켓으로 뛰어들어 휴지와 통조림과 생수 같은 생필품들을 닥치는 대로 카트에 가득 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경쟁적으로 계산대를 향해 내달리죠. 어디선가 몸싸움이 일어나 소요가 커지고, 마트 안전요원과 무장한 경찰이 나타나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쏘겠다고 엄포를 합니다. 편의점과 정육점과 보석상에 몰려든 사람들이 약탈을 시작하고 진압군이 곧 도시를 점거해요.
화재의 흔적과 쓰레기들, 깨진 유리와 파손된 자동차와 건물 잔해들이 널브러진 폐허는 곧 재난 이상의 재앙을 만들어냅니다. 대중영화에서 우리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재난 상황 혹은 재난 이후의 풍경들입니다.
전염병의 경우는 어떨까요? 백신이나 우연히 특효가 발견됐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 약국이나 비밀 판매처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누군가 손에 넣은 약을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다가 약병을 깨뜨리기도 하고, 저마다 아우성을 합니다. 증상이 심각하게 발현된 감염자의 얼굴이나 신체부위가 클로즈업되면 더 효과적이겠지요. 정부와 군 수뇌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해서 비상 격리체제를 작동하고 찰나의 이별로 가족과도 분리되어 봉쇄된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 속에서 곧 폭동을 일으킬 듯 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이면서도 남다른 생존능력과 강인한 육체를 소유한 영웅적인 인물입니다. 대개는 남성이겠죠, 아니면 ‘엄마’이거나.
이 세계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2013)에서 재앙은 홍콩에서 출발한 밀입국 컨테이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수십 명이 몰살한 이 컨테이너에서 단 한 사람, ‘몽싸이’라는 소년이 살아남아 도망합니다. 그를 추격하다가 이들의 운반책이었던 건달 주병기(이희준)의 동생 병우가 감염되는데요, 그는 곧 분당의 슈퍼전파자가 됐어요. 한편 영화의 주인공 강지구(장혁)와 인해(수애)는 각각 구조자와 조난자로 처음 만납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분당 전역으로 퍼진 전염병과 싸우면서 동시에 감염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맞서는 영웅 콤비죠. 마침 인해는 대학병원 감염내과 의사이고 지구는 구급대원이예요. 인해의 딸 미르(박민하)가 감염되면서 싱글맘인 인해의 활약은 더 절박해집니다.
이들의 다른 편에는 미군과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립이 있습니다. 분당을 봉쇄해서 수도 서울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강력 대응에 반발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국무총리는 전시 작전통제권을 지닌 미국에 의존해 이들을 강경진압하려고 하고 대통령(차인표)은 분당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내겁니다.
혈연(모성)과 의분을 동력으로 삼은 두 민간 영웅들과 국가지도자로서의 영웅이 앞장서 싸우는 동안 ‘평범한’ 시민들은 재난 시에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후방에서 제 몫을 다합니다. 대개는 겁에 질리고 성난 군중의 모습이죠. 돈과 연줄을 앞세워 “감히!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회장님’ 부류부터, “서울을 보호하겠다고 우리를 감금한다니, 차라리 서울로 쳐들어가 모두를 감염시키자!”고 선동하는 사람, 가장 먼저 항체를 확보하겠다고 어린 아이에게 살인무기나 다름없는 주사바늘을 꽂으려는 무지막지한 어른도 등장합니다. 개중에 압권은 동생을 감염시킨 ‘최초의 그놈(게다가 그는 불법체류 외국인이죠)’을 난도질해 죽이고야 말겠다고 덤빈 가장 적극적인 혐오자, 주병기입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이름이 ‘병기(아마도 兵器)’일까요.
헌데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는커녕 ‘위드 코로나with-corona’가 일상인 요즈음 우리는 영화 <감기>가 재현하는 재난상황이 대중영화의 허용치를 감안하더라도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채게 됩니다. 예컨대 언뜻 생각해보아도, 감염전문의가 가장 기본적인 방역지침을 무시한 것은 민폐이고 심각한 도덕적 결함이죠. 인해는 자기 딸의 감염 사실을 숨기고 격리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항체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완치자의 혈청을 검증이나 의료절차 없이 곧바로 아이에게 무단 주입합니다. 요즘 같았으면 인해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 겁니다.
영화가 개봉했던 7년 전, 그러니까 ‘코비드 19’가 지금처럼 우리 일상을 잠식하기 전이었다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밑바닥이고, 본성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행동들이라고 믿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극단의 공포와 불안에 몰린 군중이라면, 또 (그가 얼마나 냉철하고 유능한 의사인지와 상관없이) 아이 엄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우리가 미디어와 재난영화들을 통해 ‘학습한’ 이미지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만난 코로나 바이러스는 감염사실을 숨기는 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제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영화를 볼 때조차도 우리는 더 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앞서 병기의 동생에 대해 제가 ‘슈퍼 전파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썼네요. 대구의 ‘31번 확진 환자’ 덕에 일상어에 편입된 어휘죠. 이전이라면 알 필요도 없고 사용할 일도 없던 말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통용되는 것도 코비드 19가 열어놓은 새로운 경험세계의 일부일 겁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대홍수까지 지난 백여 년 재난의 역사를 탐구한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역간, 2012)에서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입니다. (12-13쪽)
<감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흔히 재난은 곧 혼란과 재앙을 가져오고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서 약탈과 사재기와 폭력이 난무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뜻밖에도 자세히 들여다 본 대재난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우리의 예상이나 세간의 가르침과 사뭇 달랐다고, 리베카 솔닛은 증언합니다. 놀라운 공유와 치유의 공동체가 발견되었다는 건데요. 기쁨과 슬픔, 공포와 안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공존하는 짧은 유토피아의 시간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고백했답니다. 솔닛은 우리에게 그런 감정과 상태를 표현할 언어가 있었던가 물어요.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지진 후 폐허의 현장에 자발적으로 무료로 음식을 나눈 급식소가 여럿 생겼는데요. 그 중 하나에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미스바’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이 ‘미스바 카페’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답니다. “자연이 한 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 이것을 사회학에서는 ‘재난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솔닛의 기록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질문은 왜 이런 짧은 상호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이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원작을 영화로 만든 <눈먼 자들의 도시>는 사람들이 모두 눈이 멀어버리게 된 마술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최초의 감염자는 일본인입니다. 갑자기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 일본인 남자를 돕겠다고 한 남성이 다가옵니다. 수상쩍은 그 남자는 결국 일본인의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고, 두 번째 실명자가 됩니다. 일본인의 아내와 일본인을 진료했던 안과 의사(마크 러팔로), 안과에 찾아왔던 환자들이 차례로 감염되고, 곧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 당국에 의해 그들은 모두 어느 폐쇄병동에 격리조치 됩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이 사람들은 1병동에 머물게 됩니다. 애꾸눈 흑인 남자(대니 글로버)와 성매매 여성, 일본인 부부와 난리통에 엄마를 잃은 소년, 그리고 안과 의사의 부인(줄리안 무어)이 1병동의 식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눈이 보이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의 부인인데요, 곧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르는 공포심을 안고도 부인은 남편을 따라 수용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보이지 않는 척 하며 모두의 눈이 되어 사람들을 돌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더럽고 추하고 도덕심과 인내심을 끊임없이 시험받는 수용소의 현실이 순식간에 ‘유토피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혼자 유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비참하고 괴로운 것이 의사부인의 처지입니다.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3병동에 총을 든 한 남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들어와 급식 물품을 가로채며 “내가 이 구역의 왕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집니다. 여기서도 “바깥 사회에서와 똑같은 법칙”을 적용하겠다며, 이 남자는 식량을 얻으려면 돈이 될 것을 들고 오라고 요구하고, 모두의 금품을 갈취한 후에는 급기야 여자들의 몸을 내놓으라며 위협합니다. 1병동의 대표인 의사가 보기에 더욱 참담한 것은, 이 남자 밑에서 착실한 심복이 되어 약탈을 돕는 이는 ‘오리지널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가장 익숙한 인물이었죠. 원하기만 했다면 갑자기 맹인이 된 사람들을 가장 잘 돕고 존경을 받는 최상의 리더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당신은 이 세계의 윤리에 동조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의사는 소리 지르며 꾸짖지만,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느꼈을, 이 살기등등하고 탐욕스러운 맹인의 위세를 꺾지는 못합니다.
재난상황이 되었을 때, 기존의 윤리와 질서가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판단과 적응이 요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재난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이 상황에서 3병동 사람들은 기존의 폭력적인 질서를 고집했습니다. “천국의 뒷문으로 들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3병동의 그들은 놓쳐버렸던 거겠지요.
반면, ‘보는 사람’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던 1병동 사람들은 최초의 감염자를 비난하여 내치치 않았고, 차를 훔쳐간 도둑의 상처를 정성껏 치료했으며, 엄마를 잃은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었습니다. 의사 부부는 마지막에 자신들의 크고 안락한 집을 오픈하고 음식과 옷을 나누며 이들과 함께하기로 약속합니다. 애꾸눈 흑인 남자는 아마도 이런 환대를 난생 처음 받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고 싶다고, 완전히 눈이 멀어버린 이 남자가 행복하게 말합니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했던 조합이었고 남다른 연대와 환대의 공동체였습니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이들의 이상한 동거와 일상의 수준에서라면 범죄나 ‘타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극단적인 윤리적 기준이 생소하고 못마땅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싶었을, 이 영화의 진짜 메시지는 깊이 생각해볼 만합니다.
그런데 이 도시 사람들은 왜 갑자기 실명하기 시작한 걸까요? 이 ‘바이러스’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하다못해 좀비 바이러스도 고농축 방사능이라는 원인이 있었고(<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한강의 괴물도 미군부대 영안실의 포름알데히드의 방출(<괴물>(2006))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었죠. <컨테이젼>의 바이러스는 아마존 밀림을 난개발한 결과로 박쥐에게서 돼지에게로, 도살된 돼지의 사체에서 홍콩의 요리사를 거쳐 다국적 기업의 임원을 통해 인류에 전달되었다 했고요. 이처럼 원인과 결과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보통 재난영화들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인데 비해 이 영화에는 원인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재난은 훨씬 ‘현실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지 않던가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고, 원인을 알더라도 해답을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마치 지금의 ‘코로나 상황’처럼요.
혹자는 이런 종류의 상상의 재난과 적나라한 인간 탐구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 관찰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1병동과 3병동의 대조되는 질서는 ‘마법’의 치료약을 기다리는 동안 재난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질문도 가능합니다. 왜 의사 부인만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 역시 직접적인 답을 얻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가 가장 이타적인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느 재난영화들에서처럼 구조대원이나 간호사도, 의사나 감염학자도, 심지어 엄마도 아니었지만 의사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선택에 충실한 행동을 보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윤리란 “사건(그리고 사건 이후에 출현한 ’주체’)에 대한 충실성”이라고 정의했는데요, 그에 따르면 의사부인은 가장 윤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에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없습니다. 영화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화의 캐스팅 명단에 조차도 ‘안과의사’ ‘의사 부인’ ‘3병동의 왕’ 등으로 올라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점은 그 인물이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재난과 질병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영화가 그려낸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이기도 합니다.
# 21세기의 재난, 코비드 19가 드러낸 ‘별들’
사회학자 김호기 선생은 ‘코비드 19’는 더 이상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사의 한 ‘국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코로나가 중국의 어느 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위험이었다가 내 나라의 현실이 되고 전 세계의 공포가 되기까지, 지난 5-6개월 동안 한국사회는 이전에 미처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들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단축근무와 화상회의, 랜선 음악회와 공연, 무등교 개학과 온라인 수업과 온-오프 병행 수업, 기본소득에 버금가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같은, ‘코로나 이전’이라면 논의부터 실행까지 10년 이상은 족히 걸릴 일들이 재빨리 실행되고 일상화되고 있죠. 물론 이 자체가 우리에게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기에는 우려되는 점들이 너무 많지요. 유토피아와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우리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난 수개월을 되돌아보면, 감염자수가 줄어들고 확산이 진정될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논하게 되는 몇 가지 ‘모멘텀’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31번 확진자가 만천하에 드러낸 ‘신천지’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5월 초 이태원의 클럽, 구로의 콜센터와 인터넷 쇼핑몰 물류센터, 그리고 다단계 업체 판매처에 이르기까지 원망스러운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부주의한 개인과 종교조직, 열악한 근무요건을 방치한 기업을 비판하고 혐오하는 것은 참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집단감염을 불러일으킨 이 장소와 조직이 품은 사람들 개개인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며 평소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아픈 손가락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겁니다. 21세기에 그토록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사이비 종교집단에 수십만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었을까? 우리 사회의 편견과 일상화된 혐오가 젊은이들과 성소수자들을 야밤의 밀집한 지하공간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젊은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우리 사회는 충분히 받아낼 만한가? 다단계 업체에 발을 디딘 노인들에게, 늙어 짐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하고 한 푼 벌이라도 해야 유용한 사회구성원이라는 암시를 던졌던 것은 아닐까?
집단 감염 사례들은 또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가 배달음식과 택배로 안전을 누리는 동안 단축근무도 거리두기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무방비상태로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알려왔습니다. 우리가 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며 온라인 수업을 요청하는 동안 어떤 아이는 여행가방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죠. 잘 알려져 있듯이 아홉 살의 그 아이는 갇혀있는 동안도 온라인상으로는 ‘정상등교’ 상태였다고 하지요. 심각한 학대로 자녀가 도망한 와중에 어떤 부모는 양육수당을 챙겨가기도 했습니다.
‘재앙catastrophe’이라는 단어는 본디 그리스어 ‘kate(아래)’와 ‘streiphen(뒤집어지다)’에서 나왔습니다. ‘반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리베카 솔닛이 알려주었습니다. 한편 ‘재난disaster’은 ‘멀리’ 또는 ‘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dis-’와 ‘행성’을 뜻하는 ‘astro’의 결합입니다. ‘별이 없는 상태’인 거지요. 정전이 되면 그간 인공불빛에 가려졌던 오래된 천체들이 재출현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제서야 그것이 상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재난이라는 정전, 즉 ‘(만들어낸) 별 없음의 상태’를 겪은 후에, 잠시나마 우리는 우리가 그간 놓쳤던 것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수고와 무관하게 주어진 빛의 생멸에 맞춰 눈을 감고 뜨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코비드 19가 만들어낸 위기, 무지와 부주의와 몰상식으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느꼈던 인물들 또는 집단들을 혹시 우리 사회를 전혀 다른 국면으로 이끌어 줄 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원래 어두운 세계에 있었다거나, 제거되거나 개선되어야 할 사회의 어두운 면이어서가 아닙니다. 별들처럼 제각기 반짝거려야 할 생명들이 ‘다른 질서’와 ‘인공의 빛’에 가려 어둡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솔닛의 설명에 기대어 그들을 다시 호명해보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비접촉을 지향하고 때로 격리되어 있는 순간에조차도, 학교는 여전히. 우리 아이들이 이타심과 평화로운 공존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혹 최악의 상황에서 모두가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리하여 “이 폐허를 응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키워내는 일 말입니다.
선생님들의 편지를 띄워주세요!! : 역사수업과 관련된 고민들 중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고민되는 지점들이나 질문을 편지 형태로 띄워주세요. 영화평론가 '최은' 님의 밀도 높은 답장을 받아보실 수 있게됩니다^^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는 그런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