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연구하며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

역사이야기 – 대담 : 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 3 – 박태균 교수

>> 편집부 정리(담당에디터 신동민)


계간 <역사교육>의 지면 '역사이야기'서는 125호부터 특집대담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역사이야기’에서는 역사연구자들의 연재 기고문을 받아 게재해왔습니다만 기고문과 연재글 너머 역사 연구자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 선생님들께 역사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고민과 삶 그리고 지적여정은 그 자체로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에서는 역사교사의 시선과 문제의식으로 지성에게 직접 묻고 대화한 기록을 선생님들께 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한 이번 대담은 온라인 플랫폼 ZOOM을 통해 진행했습니다. 취재 과정을 열어두어 전의 역사 선생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특강’ 형식을 취했습니다. <역사교육> 편집부는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독자 선생님들께 더 많이 제공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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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대학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란?


역사교육 : <역사교육>과의 인터뷰 응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의 취지는 특히 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주요한 족적을 남기고 계신 교수님과, 현대사 교육에 대해 고민이 많은 현장의 교사들 사이의 소통을 해보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기본적인 질문 내용은 저희가 PPT 화면을 통해 공유하고자 하는데요, 특히 인터뷰에 신청해주신 선생님들의 사전 질문들을 녹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인터뷰를 듣다가 즉흥적으로 생각나신 질문 역시 맥락에 맞게 여쭈고자 하여 대화의 형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려 합니다. 저희가 우선적으로는 사적이라면 사적일 수 있는 질문부터 드려보고자 합니다! 국제대학원에서 현대사를 강의하고 계신데요. 이게 아무래도 일반 역사학과, 역사교육과와는 다른 맥락이 있을 것 같아요. 따라서 교수님께서는 국제대학원의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심에 있어 주요한 포인트, 역사를 통해 그 학생들이 무엇을 알게 하고자 수업을 하시나요?


박태균 : 예, 저는 우선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두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제가 국제대학원에 있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도 있지만 외국인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점에서 보통 가르치게 되는데요. 일단 하나는 왜 한국 학생들한테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얘기하게 됩니다. 제가 가장 어렵게 또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역사관 얘기를 많이 합니다. 한국사를 전공하시는 선생님들, 교수님들을 보면 굉장히 우리 안의 관점에 많이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국사를 세계사적으로 보편화 하는 것이 어렵고, (이것만 지속하다보면) 우리 것만 보게 되니까 그런 부분들이 드러나는데, 제가 이집트 전문가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에게 한국 금속활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강의를 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저에게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건데?)”이라고 묻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게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면 대량으로 출판물을 만들어서 서점도 좀 생기고 지식도 유통이 되고 한거냐? 라고 물어보는데, 저도 할 말이 없더라고요.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긴 했는데 그럼 그 다음에 그걸 가지고 뭘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근데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게 우리 안에 갇혀서 역사를 보다보니까 너무 우리 것만 생각하고 세계사적인 보편성 속에서 우리를 못 볼 수가 있겠구나. 그래서 한국 학생들한테는 그런 부분에서의 세계사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부분들을 좀 많이 얘기해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을 쓰면서도 거기 들어갔던 부분이, ‘우리가 유신체제가 생길 때 필리핀과 태국에서도 동시에 그런 일들이 발생을 했다. 즉 유신체제가 한국만이 있었던 특수성이 아니라 같은 시대에 유사한 국가에서 일어났던 부분들이고, 왜 그랬는가를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것이나 또 분단 문제를 얘기할 때, ‘한국의 분단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45년 이후에 분단됐던 나라들을 같이 비교를 해줌으로써 우리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어떤 차이점을 가졌는가?’ 라는 걸 얘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제가 이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이 국제무대에 나가서 다양한 활동을 할 텐데, 그들 외국인들과 얘기를 할 때,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우리 입장을 잘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부분들을 고민을 합니다. 이는 당연 세계사적인 이해 없이는 우리 것을 잘 이해시키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외국인 학생들에 대해서는, 이 학생들이 접하는 대부분의 한국에서 나온 한국에 대한 책이나 연구들이 마치 국정홍보처의 글 같은 느낌들 많이 받는다고 하더군요. 성공한 얘기만 하고, 잘한 얘기만 하지 실제로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라든가 동남아시아에서 학생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얘기할 때 한국 사람들이 경제학자나 전문가라고 나와서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성장을 했으니, 니네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그 나라가 처한 지금의 현재 조건하고, 우리가 60년대 70년대 성장했던 조건을 보면 굉장히 다르거든요. 우리가 성장만 해왔던 것이 아니고 제가 최근에 쓴 논문들이 주로 그런 논문들이 많은데요, 6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가 굉장히 심각하게 있었고 또 70년대 후반에 저희가 그걸 경험했고 97년에 또 한 번 경험을 했고요. 몇 차례 저희가 심각한 경제위기들을 경험했는데 자본주의 시장에 묶여 있을 때 불가피하게 그런 경제위기들을 겪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제위기들이 왜 오는가? 물론 이제 자본주의 시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97년 경제위기를 보면 한국은 경제위기를 맞았지만, 대만하고 일본은 경제위기를 경험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도대체 그 차이가 뭐였는지 왜 그러면 한국은 경제위기를 경험했고 대만과 일본 경제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다음 이 친구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고민하는 게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그걸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 게 올바른 방향인지, 한국은 어떻게 극복을 했기 때문에 성공했는지 아니면 미봉했다든지, 이런 얘기들을 해줘야 하는데, 너무 그런 얘기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국제대학원에 있으면서 아무래도 그런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방향을 많이 생각하면서 강의도하고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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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대담은 취재 과정들을 회원 선생님과 공개하여 온라인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인터뷰특강’ 형식으로 진행되었다(2020.06.21.일) 일요일 늦은 저녁임에도 17분의 역사 선생님과 연구자가 모여 박 교수와 밀도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2 현대사, 그 관심의 시작 : 한미관계에서 전쟁과 평화로


역사교육 : 국제대학원에서 가르치시다 보니까 아무래도 같은 역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 성격 자체가 많이 달랐을 것 같아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래도 역사교사들도 많이 고민하는 게, 세계사적 보편성을 어떻게 한국사로 가져오고, 한국사를 어떻게 객관화 시킬 것인가 하는 부분이거든요. 이에 교수님도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계시다보니 ‘그 문제가 쉬운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어 두 번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내신 저서가 <원형과 변용:한국 경제 개발 계획의 기원>(서울대출판부, 2007)라고 알고 있거든요. 이는 경제개발에 대한 첫 학문적 접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 당시에 박사 논문을 기획하고 또 기초하실 때 마음가짐이 어떠셨는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접근하셨는지 여쭈고자 합니다.

noname01.bmp <원형과 변용>(서울대출판부, 2007)


박태균 : 원래 제가 박사 논문 쓰려고 했던 거는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뭐 주제넘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브루스 커밍스를 뛰어넘어보고자 준비를 했었는데, 자료 찾는 것도 그렇고 쉽지가 않은 상황으로 진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석사 논문부터 해서 기본적인 관심은 한미관계 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미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선배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선배들이 한국전쟁보다는 60년대 초를 주제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해줬고, 저도 가장 격동적인 시기가 60년 61년이라고 생각하여 연구를 시작했어요.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가설은 “미국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줬다.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이라든지, 박정희 정부 등 모두 미국이 만들어 준 것이다.”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 자료를 보다 보니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제가 그 당시에 운이 좋아서 박사논문쓰기 직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다양한 의견을 교류하고, 자료도 많이 얻을 수 있었어요. 자료 중에 남미의 케이스들을 보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정책이 진행이 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미의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에 대응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정책 발현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에 집중을 하고 아시아 케이스를 보니까 실제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의 케이스가 다 다르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결국은 “미국의 정책만 가지고는 이 차이들을 볼 수는 없겠구나. 미국의 힘이 압도적인 비대칭적 관계였음에도 한국에서 어떤 대응이 오느냐에 따라 미국의 정책이 발현되는 방식이 다를 수가 있겠구나.” 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미국 갔을 때는 미국자료들을 많이 보고, 귀국 후에는 한국 자료들은 주로 보기 시작을 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정부자료에 50년대 60년대 문서들이 없다는 겁니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대화 기록이 Conversation record로 다 있는데, 우리는 안건 리스트 정도만 있고, 내용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한국은 거의 유일하게 있는 기록이 58년, 59년의 이승만 정부 때 국무회의 회의록이 하나 있고 그 외에는 제가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 당시에 보게 된 게 “사상계” 같은 잡지들이었죠. 당대 정부에 참여했던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성공적이 안 됐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그럼에도 제가 나름 “무엇인가 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른 연구자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더 연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같아요. 그래서 사실 후발 연구자들이 제 연구 분야를 하나씩 가져가기 시작하고 있죠(웃음). 그러니까 저는 그런 부분에서 다리를 놓아두었다는 그런 자부심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교육 : 미국의 정책 발현은 곧 대상국의 반응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거군요. 당대 최강국이었던 미국의 파워도 달리 적용되는 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말 새롭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 질문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교수님의 메인 연구 분야가 1960년대 경제였었으나, 아무래도 이 시기는 냉전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교수님의 관심사 역시 냉전 분야로 옮겨 간 게 아닌가, 이게 또 사실 경제에서 정치로의 전환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이렇게 경제에서 정치로 분야가 옮겨갔는지 질문 드립니다.


박태균 : 제가 한국전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95년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사를 강의를 하면서 그 학교에다가 건의를 해 강의를 두 개를 만들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었어요. 그래서 이 강의를 거의 한 십년 정도 시간강사로서 했는데, ‘아 이건 책으로 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워낙이 한국전쟁 관련해가지고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이 없더라고요. 커밍스 책은 일단 어렵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도 제대로 안 돼 있고요, 그 다음에 저는 커밍스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편견들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필요생각해서 일을 진행 한건데, 마침 제가 국제대학원에 와서 보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객관화해서 보여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한국전쟁>(책과함께, 2008)

이 전쟁이라는 것이 있어선 안 되지만 역사학자들한테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인 것 같아요. 굉장히 복합적인 부분들이 그 안에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집필하면서 생각한 것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평화가 결국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원칙에 돼야 하는데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전쟁을 알아야 된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전쟁이 어떠한 재앙을 가져왔는지를 알아야만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평화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또 하나는 제가 <베트남전쟁>을 집필하면서 느낀 건데, 굉장히 이는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특히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 노근리 사건이라든가 일본에 대해서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과연 베트남 전쟁에서의 과거를 털고 가고 있는가? 첫 번째 저의 문제의식은 뭐였냐 하면요. 제가 한 12년 전쯤에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분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특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어떤 경제적인 특수를 얻었는가에 관한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이제 우리 한국 학생들한테 (이에 대해) 물어보면,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일본의 전쟁 특수를 얻었고 이걸 통해서 2차 세계대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서 전쟁 특수를 가지고 경제성장에 성공을 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안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일본이 굉장히 얄밉다라는 생각은 해요. “우리가 전쟁의 고통을 받았는데 일본은 그렇게 성공을 했구나” 이걸 생각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을 받았는데 우리가 경제적으로 이렇게 성공을 했다.” 라는 거에 대한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가 학생들한테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고 과정이 중요한 거야라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우리는 막상 베트남 전쟁을 얘기할 때는 과정을 얘기한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돈을 위해서라면 그게 불의의 전쟁이라도 우린 갈 수도 있다” 이런 얘기들을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저는 이 과거에 대한 문제를 저희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을 해야만 일본이나 미국한테 우리가 떳떳하게 무엇인가를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좀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제가 전쟁을 가지고 계속 얘기를 하게 됐고요. 사실 이 부분이 경제하고 전혀 관계 없는 부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국도 냉전이 계속되면서 미국 경제의 중요한 축을 군수산업이 차지하고 되었고요. 우리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 70년대의 군수산업의 성장, 사실 요즘의 중공업들이 대부분 사실 70년대 군수산업을 했던 곳이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 결국 우리 경제도 군수산업하고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어요. 그래서 이게 저는 경제하고 전혀 관계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우방과 제국>이라는 한미관계사에 대해 집필 할 때도 배영수(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님한테 한번 혼난 적 있어요. 그분께서 결국 이 한미 관계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축은 경제 문제였는데 왜 이 책에는 그게 보이지 않느냐 라는 비판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요즘에 제가 연구하는 주제 중에 하나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전반기의 한미관계의 변화이기에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이제 거기를 보니까 경제 문제가 굉장히 잘 드러나 있더라고요.


이게 70년대 말 이후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한국에 시장을 열고 신자유주의적인 그런 체재를 심으려고 했는가, 예컨대 왜 5.18 때 미국이 신군부의 손을 들어줬는가? 라는 걸 보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신군부한테 시장을 열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장의 핵심 중에 하나가 바로 ‘금융과 서비스’입니다. 박정희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금융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모든 금융을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었죠. 금융을 통해서 경제개발 계획을 하고 그걸 통해서 기업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건데, 미국의 입장에서는 개발도상국에 들어갈 때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금융과 서비스거든요. 이걸 열어라 그래서 이제 80년대 들어온 게 한미은행이 들어옵니다. 그 지금의 시티은행인데, 그게 이제 미국 쪽에서 50퍼센트 자본을 가지고 들어온 거고요. 지금의 신한은행이 일본 자본으로 들어와 만들어진 것이죠. 즉 전두환 정부가 되면서 신군부에서 금융시장과 보험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죠. 이게 사실이 70년대까지의 보호무역 박정희식의 경제 무역체제와는 다른, 80년대 넘어가면서 나타난 새로운 시스템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요즘의 저의 주요한 연구 주제입니다.


#3 세계사적 보편성에서 이해하는 베트남 전쟁


역사교육 :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 다음 챕터 질문이 베트남 전쟁인데, 지금 채팅방에 선생님께서 연결되는 질문을 하셔서요. 윤세병(동북아역사재단) 선생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윤세병 : “한국사의 전개와 동남아시아와의 관련성 말씀을 해주신 것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베트남 전쟁>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들려주실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독재와 동남아시아의 독재가 혹여 어떤 연관성도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가령 독재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연대랄까요? 예전에 있었던 ‘박스컵(편집자주-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의 별칭, 박정희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라는 의미다)도 생각이 나고 말이죠.’


박태균 : 사실 동남아시아는 생각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동남아시아의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은 그거에 대한 글을 거의 쓰지 않았고요, 금기시되어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서양 학자들은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이 이 동아시아하고 동남아시아에서의 경제 붐이라고 할까요?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라는 것을 공통적으로 지적을 하고 있고요.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과 그 필리핀과 태국에 많이 주목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미국과 함께 군대를 파병한 세 개 나라가 한국과 필리핀과 태국이거든요. 이 세 나라가 동시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줬고 이로 인해 전쟁특수를 많이 누렸었죠. 일단은 파병 비용 자체를 미국이 다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필리핀과 태국에는 미군기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군기지를 통해서도 많은 경제적인 이득을 보았던 나라가 이 세 나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개 나라가 이렇게 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되니까 세 나라의 있었던 독재 정부들의 기반이 굉장히 좋아지는 거예요. 사실 어떤 정부가 됐든 간에 93년에 클린턴 대통령이 얘기한 것처럼 문제는 경제거든요. 경제가 어떻게 살아나는가? 지금도 저희가 박근혜 정부 당시의 비선실세 문제를 촛불로 해결하고, 정부를 새롭게 바꿨지만 사실은 이 새로운 정부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경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니까 현재는 코로나문제, 방역 문제도 있고 그 다음에 또 북한 문제도 있습니다만, 결국 이 정부가 어느 정도 일자리를 창출해나가고 어느 정도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60년대 중후반에 이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세 개 나라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하니까 당연히 그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었던 박정희라든가 마르코스라든가 태국의 키티카촌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가 있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되면서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아시아에 있는 미군의 수를 줄이 게 되니까, 이게 반대급부로 그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어 공간이 생기는 거죠.


독재자들이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기반이 생기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개입이 약해지니까 자연스럽게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시키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나타났고, 필리핀에서는 이미 유신체제 전에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를 했고(그게 사실은 86년까지 갔으니까 유신보다 더 오래된 거죠) 태국도 키티카촌이 71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키티카촌은 또 굉장히 박정희하고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이고, 제가 태국에서 키티카촌의 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 집에 가니까 박정희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그 집에 가득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타마사 대학교에서 민주화 시위를 할 때 헬기를 타고 가 위에서 기총사격을 한 사람이에요. 이 사건을 태국 사람들이 블랙프라이데이라고 하는데, 앞서 말한 독재자들의 권력 강화라는 상황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게, 저는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저희가 연구를 해보면 이 아시아의 역사에서도 우리가 굉장히 우리 스스로를 특수하게 보는 것보다는 보편적 관점에서 한번 이해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답변이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역사교육 : 네 한국사를 이렇게 세계사적으로 조망해주시니까 되게 풍성한 것 같아 좋은데요! 방금 채팅창에서 김영주(광주여고) 선생님께서 질문을 해주셨어요.


김영주 : “1960~197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68 운동’이 일어나서 여러 나라들이 영향을 받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되려 베트남전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반독재움직임은 분명히 있는데, 68의 영향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원인이 있을까요?”


박태균 :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게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개도국 같은 경우에는 사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그것도 굉장히 많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을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 같아요.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지식인 그룹이나 학생운동 그룹들에 의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겉으로 표출할 수 있는 상황은 안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이런 것 같습니다. 제가 아까 경제 문제를 얘기를 했는데 이 경제적으로 잘 되면은 문제제기하기가 (상황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거죠. 제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얘기를 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열 중에 일곱 여덟은 저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게 ‘니가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게 다 우리 유엔군이랑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장군 덕분인데, 니가 어디서 그런 분들을 비판을 하느냐?’ 이 먹고 사는 문제, 잘 사는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사실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가 어려운데, 그 당시의 상황도 저는 좀 그런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차이가 무엇이냐면, 아까는 제가 다른 아시아 국가 간 공통점을 말씀드렸지만 차이점을 말씀드릴 필요도 있는데, 동아시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는데요, 유럽하고 미국 자체는 60년대 말 70년대 초가 굉장한 경제위기였어요. 닉슨이 당선된 후 괌에서 닉슨 독트린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주한미군의 1개 사단을 철수시키고, 군사정전위원회에 있는 유엔군 대표를 한국군 대표로 바꾸려고 했던 것도 기본적으로 세계 경제가 너무 안 좋았겠기 때문이었어요. 1929년에 대공황 이후에 등장한 케인즈 주의가 70년대 초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70년대 초 시카고 대학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대두하여 미국의 경제정책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 자체가 그 당시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여주거든요. 유럽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이 68혁명이라는 것을 맞이했고(물론 그 68혁명 맞기 전에 이전에 여러 가지 경험들이 이야기돼야 하지만), 반면에 동아시아하고 동남아국가들은 오히려 베트남 전쟁의 전쟁 특수로 인해서 68의 영향보다 반대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당대에 대한 정확한 관점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또 하나는 한일협정이 베트남 전쟁 이슈를 먹어버린 측면도 있습니다. 63사건 이후에 한일협정 이슈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실 그 63사건 때 미국은 박정희 정부 무너진다고 판단했고요, 야당도 제2의 4.19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야당이 당시에 키친 캐비닛을 만들 정도로, 즉 자기들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 어떤 식으로 내각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정도로 6.3은 그 당시 굉장한 이슈였었고, 이러다 보니 오히려 베트남 전쟁은 한일협정 이슈에 밀린 측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게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얘기는 타부(금기)가 돼 버린 것 같아요. 근데 이게 되게 중요한 게 뭐냐 하면요 베트남 전쟁을 이렇게 하다 보니까 베트남 전쟁에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부상자가 되거나 사망하신 분들의 유가족이나 본인들에 대해서 한국사회가 전혀 신경을 안 쓴 거예요. 전쟁이 75년에 끝나고 맞이한 시기가 한국사회에 있어 너무 격동기였죠. 긴급조치가 있었고요 유신이 무너지고 광주가 있었고 신군부가 들어오고 민주화가 될 때까지 거의 한 12년 사이에 우리 사회가 너무나 많은 것에서 격동기를 겪다 보니까 실제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거나 또는 그걸로 인해서 피해를 입으셨던 분들 그리고 유가족에 대해서 이게 진보건 보수건 너무나 신경을 안 쓴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이 민주화 직후에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한 적이 있어요. ‘우리 좀 신경 좀 써달라’ 그런데 사실 뭐 진보 보수고 이것을 신경 쓰기에 너무나 어려운 그런 시점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에 이분들이 자꾸 보수 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보수 쪽에서 법령을 바꾸거나 처우를 바꾸는 것은 아닌데, 이 분들한테 자꾸 단 것을 주는 거예요. 이분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기들한테 돈이 생기는 거는 보수 정부 쪽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것이 비판이 당하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흐르게 된다면 결국 자기들은 베트남전 참전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냐? 자기들의 활동들이 다 부정될 수 있는 부분들 때문에 결코 정치적으로 자꾸 그런 입장을 보이시게 되는데, 이거는 보수, 진보를 떠나서 우리 사회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닌가, 그거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성찰하지도 못하고 반성하지도 못하고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4 경제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눈

역사교육 : 경제특수와 한일 협정으로 인해 결국 반전 여론이 널리 퍼지지 못했군요. 교 수님 이와 관련한 베트남 관련 질문이 하나 더 들어왔습니다. 조정아(경기 일산동고) 선생님의 말씀 직접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조정아 : “베트남 역사교사 및 연구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생각보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승리한 전쟁’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오히려 정부 당국 등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무관심한 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베트남에서 보는 베트남전의 인상은 어떤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박태균 : 굉장히 좀 고민스러운 부분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것도 경제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저희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곤혹스러워 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 삼성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 베트남의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에 들어가 있는 한국 돈들이 많아요. 그런데 자꾸 한국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정부가 대응을 하면 혹시나 한국의 기업이나 투자가들이 돈을 빼지 않을까? 이런 염려들이 충분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가지 좀 더 말씀을 드릴게요. 하나는 베트남 중앙정부 쪽에서 하는 것과 실제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은 분위기가 굉장히 다릅니다. 제가 한국군 주둔 지역 두 군데를 갔었는데, 한 군데는 거기에 전쟁 박물관이 있고, 그 박물관에서는 지금도 한국군의 학살한 민간인에 대한 발굴을 계속 진행을 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업데이트를 하고 상황도 업데이트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사실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료가 없다는 겁니다. 학살에 대한 명령도 있을 리 없었고(우발적인 경우가 많기에), 만약 명령을 했더라도 기록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또 학살을 하는 장면을 찍은 것도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학살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목소리를 듣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계속해서 학살 현장에서 발굴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또, 민간인 학살 지역을 가보면 아직도 한국군 증오비가 있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 증오비 같은 경우는 거의 다 없어졌고, 이를 위령비로 바꾸는 작업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까 중앙정부에서 경제 전체를 바라보고 하는 부분과 실제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지방 인민위원회의 입장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


또 하나 저희가 생각해야 될 것은 45년의 일본이 패망을 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나 징용 문제가 나오기 시작한 거는 90년이 넘어서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45년에서 50년이 지난 이후에 이 문제가 나왔어요. 그런데 베트남 전쟁이 끝난 게 한 75년이고요, 지금으로 45년 정도 된 거죠. 그러니까 베트남도 그런 준비를 하고 그거에 대해서 충분히 앞으로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베트남 못 살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80년대 90년대 이후에 어느 정도 잘 살게 된 다음에 일본과의 문제들이 더 본격화된 것처럼, 그때는 우리가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조금 변하기 시작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91년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면서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미국과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요구를 하게 되어 온 것을 고려한다면, 베트남이 지금 이 수준에서 더 성장하여 더 이상 한국의 자본이나 기업에 의존하지 않았을 때에, 충분히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제기를 다시 하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저희가 충분히 준비를 해둬야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이 문제 해결하지 못하면 저는 일본과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세 번째는 저희가 뭔가 좀 고민해야 될 부분이 있는 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입니다. 전쟁 특수에 관해서는 모든 교과서에 나와있는 내용이고요, 고엽제 문제랑 민간인 학살문제는 제가 알기로 6종 중에 2종의 역사교과서에만 다루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75년에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긴급성명을 발표했어요. 그게 3가지 내용인데, 하나는 공산당 믿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분열하면 망합니다. 세 번째가 미국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이 세 가지 얘기는 다 맞는 얘기일 수 있어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두 가지를 안했습니다. 첫 번째가 대국민 사과를 했어야 돼요. 국민들한테 미안하죠. 그러니까 사실 한국이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한 게 처음부터 돈 벌려고 파견한 게 아니거든요. 사실은 주한미군이 빠지는 거하고, 한국군 감축을 막기 위해서 파병을 한 거예요. 실제로 그것 때문에 주한미군이 71년까지 감축이 되지 않고 있었고 한국군도 감축되질 않아요. 나는 원래 목적은 한반도 안보의 목적이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미국하고 같이 파병한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간 거잖아요. 그런데 그 목적을 달성 못했어요. 남베트남 패망했죠? 그러면 “우리가 미국과 같이 파병을 했는데, 전쟁의 기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잘못 판단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이걸로 인해서 5008명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서 죽었다.”고 사과를 했어야 됩니다. 이게 첫 번째입니다. 이게 정부가 잘못 판단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 했어야 되는 얘기가 그렇다면 우리는 국민들이 스스로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겠다. 라고 했어야 했어요. 남베트남이 왜 패망을 했나면, 남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였기 때문에 스님도 분신을 하고 학생들도 데모를 한 거예요. 그래서 패망한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한테 분열 하지 말라고 얘기하면 안 되고, 우리가 국민들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 테니까 당신들도 협력해주세요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 두 가지 제일 중요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교훈을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 있는 거죠. 또 전쟁의 승리는 어떻게 볼 것이냐? 일단 이 부분은 보셔야 돼요.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베트남 공산당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역사 해석에서부터 나라의 모든 기구, 메스미디어까지 장악하고 있어요. 제가 가르치고 있는 베트남 학생들이 민감한 문제는 논문으로 쓰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베트남에 돌아갔을 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베트남의 학문이나, 언론 등 모든 부분들을 공산당 정부가 다 장악을 하고 있다는 거죠.


자유로운 해석 자체는 굉장히 어려운 게 현지에서도 베트남의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발견한 것은 아직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차이가 굉장히 많이 있어요. 근데 이게 사실은 통일 방식에서부터 좀 잘못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보면 수도 호치민(사이공) 대통령궁에 베트콩(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하고 북베트남 군대가 같이 들어와요. 저는 이거 굉장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베트남 전쟁의 기본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전쟁이 아니라 남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게릴라들인 베트콩의 전쟁이었어요. 그럼 전쟁 끝날 때도 남베트남 대통령 궁에는 베트콩만 들어왔어야 돼요.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남베트남에 대한 통치는 베트콩들이 했어야 돼요. 그런데 전쟁 끝나고 1년이 지나자마자 북베트남 사람들이 내려가서 남베트남을 통치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남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해요. ‘세금은 우리가 다 내고 혜택은 북베트남 출신들이 다 본다.’ 그런데 이게 사실 통일 이후에도 감정이 굉장히 안 좋다는 거죠.


이 역시 우리가 통일을 생각했을 때 고려해야 하는 부분일 것 같네요.


#5 전쟁을 통한 평화배우기 : 당대의 오산과 오판을 성찰하다


역사교육 : 네 선생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베트남전쟁에 얽혀있는 이권 아닌 이권이 결국에 사람들의 전쟁을 대하는 방식 역시 달리 만든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들의 통일에서 우리가 영감을 받아야 할 것 같고요. 그러다보니 통일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교수님 이제 저희가 냉전의 중심에서 통일을 외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여쭈고 싶은데요, 우선 아까 말씀하신대로 전쟁을 배우는 목적은 평화를 알기 위함이라 말씀해주셨는데, 이 한국전쟁을 평화교육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여쭈고 싶고요, 나아가 냉전을 가르칠 때에 우리는 수많은 가치 중 어떤 가치에 중심을 두고 수업해야 하는지 선생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박태균 : 저는 그 중심은 평화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일 아침(6월 22일) 한겨레신문 1면에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요청 받은 저의 글 하나가 나갈 겁니다. 이는 평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가 이 전쟁의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할까에 대한 것인데요, 전쟁을 보는 우리의 관점 자체를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왜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 그리고 전쟁은 1년이면 끝났어야 한 전쟁임에도 왜 3년이나 계속 됐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 전쟁을 완전히 끝냈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정전된 상태로 있을까? 라는 질문들을 던져줘야 되는 것 같아요.


이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겨레 신문에도 기고한 것이지만, 이 문제는 결국 오산(miscalculation)과 오판(misperception)의 문제라고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의 시작 자체도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되는 계산들, 그러니까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생각이 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끼쳤고, 또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채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강행해 압록강까지 갔으며 이후 중국에 대한 폭격까지 주장했던 맥아더의 오만과 오판이 결국은 중공군을 대거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거든요.


또 51년 7월 10일 날 정전 협상을 시작하는데, 이때 전쟁을 멈출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고지전에 나온 것처럼 전투를 계속하면 상대방이 더 이상 재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공격을 퍼부으면 북한은 더 이상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북한은 오히려 50년대는 남쪽보다도 더 빠르게 복구했어요. 그런데 그 전투가 지속되었던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아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갔지요.


정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전을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1945년 이전에 독일하고 러시아가 1917년에 맺었던 정전협정, 그 다음에 18년에 독일하고 프랑스가 맺었던 정전협정, 1943년에 이탈리아와 연합군이 맺었던 정전협정, 45년에 독일하고 연합군이 맺은 정전협정이 있어요. 정전협정은 전쟁을 했을 때 상대방이 명백하게 패배를 하고 한쪽이 승리했을 때 맺는 것이었죠. 그래서 정전협정으로 적대적인 행동을 중지시켜놓고 그때 평화협정 준비를 하는 거였거든요. 원래는 이렇게 되었어야 해요. 1951년에 정전협정을 맺어 적대적 행위를 끝내놓고 그 다음에 2년 동안 논의를 해 53년에 종전선언을 하거나 평화협정을 맺었어야 하는 거였죠. 그런데 우리는 어느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정전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정전을 맺어서 안될 지역에서 정전이 맺어지니까 정전협정 내에 외국군 철수라든가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게 안되고 있거든요.


이 전쟁의 과정이라는 것이 대부분 오산과 오판에 의해서 나타난 경우가 너무 많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는 게 잘못된 생각을 하는 지도자들이 결국 전쟁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는 것이죠. 이들은 자신이 전쟁을 해서 써야 되는 비용과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해보는 거예요. 선생님들 다 마찬가지죠. 길거리 지나가다가 3000원짜리 떡볶이가 있다면 내가 3000원을 쓰고 떡볶이를 먹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3000원만큼 되면 떡볶이를 먹겠죠. 그런데 그 행복이 3000원만큼 안되면 지불을 하지 않잖아요? 이게 비용을 쓰는 것과 그걸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비교하기 마련이기 때문인데, 이 지도자들은 혼자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전쟁을 하면 나는 내가 이 전쟁으로 쓰는 비용보다 더 큰 걸 얻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더 슬픈 거지만 이승만과 김일성은 그것을 얻습니다. 이승만은 전쟁기간 중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또 53년에 족청계열을 제거하면서 자기중심의 정권을 공고하게 했어요. 따라서 (전쟁에서) 이승만은 승리했어요.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남한의 국민들한테 간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김일성은 전쟁을 계기로 남로당을 제거했고 얼마 안 돼서 연안파까지 제거해 승리를 얻었죠.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얘기 같아요. 승리한 것은 중국도, 미국도, 북한도 아니라는 겁니다. 오로지 독재자들만,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만 정치적으로 승리를 했고, 일반 사람들은 고스란히 피해자가 된 거죠.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안 그럴 것 같습니까? 그건 똑같은 결과 온다고 봅니다.


#6 지금 교실에서 벌어지는 작은 냉전 극복하기


역사교육 : 지극히 동의하는 말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고대에서 현대를 통해 보아도 이익을 얻는 자가 늘 정해져있으니 말이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즐겁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앞서 말씀드렸던 시간보다 초과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신규 선생님의 고민이신데요, 현대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고민이 들어 질문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은혜(경기 안산양지중) 선생님의 질문입니다.


김은혜 : 극우 성향 아이들의 존재, 현대사 주제에 대한 민감성으로 마음의 부담이 있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의 특정한 경험 때문이기도 하고, 신규 교사로서 교실 현장에 와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피부에 와닿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현대사 수업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태균 : 힘드시죠?(진심을 내어 위로하는 박교수의 말에 일동 웃음)


저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현대사를 가르칠 때 아직도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또 요즘 시대가 시대인 것만큼 첨예한 갈등의 소재가 널려있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역사교사는 정말 극한직업입니다


제 지론은 역사는 교과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역사를 해석해주려고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제가 저의 책에 계속 자료를 같이 넣는 이유도 자신들이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함이었죠. 역사학을 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해석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에 저 같은 경우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자료만 던져주고 “이 자료가 어떤 방식으로 나온 자료이고, 그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해석하고 있다.”라는 것만 알려줍니다. 이후에는 학생들이 그걸 가지고 스스로 토론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데요, 그 과정이 역사수업이지 않을까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에 늘 붙는 비판은 “역사 수업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 그렇게 해서 뭘 얼마나 가르치겠느냐”는 거죠. 근데 저희가 역사 수업을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때까지 하면 거의 한 7, 8년 동안 역사 수업을 하거든요. 저는 1년에 한 4가지 정도의 이슈만 가르치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도 7, 8년이면 적어도 28개의 이슈를 배우게 되겠죠. 이러한 중요한 이슈들은 앞뒤 상호 연계가 될 수 밖에 없는 주제들일거에요.


제가 얘기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일단 첫 번째가 수능에서 ‘한국사’ 과목을 제외하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역사 수업은 무조건 역사교사들이 모여서 학년에 맞는 토픽들을 고른 후 아이들끼리 이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게 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다 외워야 되고 시험 봐야 되고 매년 학년이 될 때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다 다시 공부해야 되잖아요. 저는 이러한 방식의 역사학습을 버리지 않고서는 선생님들이 계속 어려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교과서가 해석을 해주기 때문이죠. 선생님들께서 좀 어려우시겠지만 최대한 많은 자료들을 제시해주려고 노력하실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 정도인 것 같아요. 아마 선생님들께서 저 사람 대학 교수니까 현장의 어려움을 몰라서 저렇게 이상적인 얘기를 한다고 하실 수도 있겠는데 참 저는 그건 어려운 질문이고, 저도 그런 어려움을 경험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7 여론의 힘 – 우리가 역사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


역사교육 : 네 선생님께서 “힘드시죠”라는 말로 시작해주셔서 다 같이 위로를 받게 되었고, 또 역사교육의 측면에서의 제안도 현실적으로 와 닿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교수님의 답변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이 들어왔는데요. 강화정(부산 신정고) 선생님!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화정 : “ 앞서 선생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질문이 하나 있어요. 한국전쟁에서 정책 결정자의 오산과 오판이 강조될 때, 우연적 요소 혹은 역사의 우발적 지점이 강조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다시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할때. ‘지도자를 잘 뽑는 것’ 이외에 어떤 답이 있을까요?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정책결정자와 같은 행위 주체의 결정을 강조하는 방식이 갖는 의미도 있지만 한계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박태균 : 질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요? (웃음) 제가 자료들을 보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사실 지도자 하나만 잘 뽑는 걸로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신문에 70주년 기고를 쓴 이유 중 하나가 현재 북한이 하고 있는 여러 태도들(북한 지도자들의 계산과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한편으로 남한의 지도자들 역시 북한에 대한 판단과 결정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투표를 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부분이고요, 또 하나는 사회여론의 문제입니다.


제가 98년도 하버드에서 공부를 할 때 1차 대전 관련한 책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뭐라고 언급했냐면, 그 시기에 왠지 ‘독일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전쟁을 한판 해야 된다’라고 느끼고 있었답니다. 뭔가 전쟁을 해야 될 시기였죠. 그런데 제가 1948년부터 50년까지의 시기를 보면 남한의 여론과 북한의 여론이 전쟁을 통해 통일을 해야 된다는 여론이 굉장히 강하게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북한도 49년부터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이 등장했고, 남한 역시 북진통일론이 등장했는데, 이때 남북한 여론에서 이에 대한 반대여론은 너무도 약한 시기였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48년에서 50년까지 한국천주교회조차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전쟁)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어요. 사회 자체가 전쟁을 통해 무엇인가를 해결해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 지도자도 결국은 “전쟁을 해야 된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현재 북한의 행태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정상적으로 보고 외교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한테 통일부가 있는 이유는 북한이 외교부를 통해 정상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북한한테 항상 왜 정상적인 외교를 하지 않느냐고 물어봐요. 북한이 비정상적인 걸 알고 통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북한한테 정상적으로 행동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첫 번째 그걸 감안해야 되는 거고, 북한이 저렇게 나왔을 때 남쪽에서 어떤 여론이 생겼는가예요. 사실 지금 남한의 여론은 맨날 당하고 있는 우리 정부가 바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이 여론은 북한하고 한판 붙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북한이 늘 전쟁준비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또 평양에 폭탄 터지는 것과 서울에 폭탄 터지는 것의 충격은 엄연히 다릅니다. 따라서 북한은 달래야 하는 대상이지 우리가 무언가 맞불 놓는 대상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론을 어떻게 만들어서 우리의 지도자로 하여금 어떻게 판단하도록 만들 것이냐가 중요하죠.


저는 답답한 게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북한이 도발할 때 보이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늘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이었죠. 저는 그분 자식들이 군에 가있는지 첫 번째로 묻고 싶어요. 그런 얘기할 때마다 군에 자식 보낸 부모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냐, 저는 차라리 그분들이 전방을 지키셨으면 해요. 근데요, 정말 (반전의)여론이 강하게 나오면 정부도 여론을 따라가야 해서 그렇게 못할 겁니다. 이게 저는 저희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재앙이 올 것인가? 왜 제가 오산과 오판이라는 단어를 썼냐면 사실 지도자만의 오산과 오판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오산과 오판도 있다는 거예요. 답이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


#8 역사부정 논란 : 반성과 성찰의 부재


역사교육 : 줌을 통한 인터뷰, ‘줌터뷰’가 이제 막바지로 가고 있네요! 이번에는 오늘날 이야기를 여쭈고자 합니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역사 부정 논란에 대해 현대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여쭈고 싶습니다.



박태균 :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제때 처리 해야 할 문제를 처리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되게 우습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저희가 과거사 문제(친일청산,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추모 등)를 제대로 해결을 못하니까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 와중 친일파의 후손, 독재정권에 대한 부역자들이 독립운동가 후손, 민주화 투사보다 더 잘산다는 겁니다. 심지어 국가의 주요한 요직 혹은 기득권에 속해 있고요. 그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요. 특히, 그들을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역사를 왜곡하는 겁니다. 저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론이 필요하고, 이 문제를 역사에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왜곡만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저희는 분명히 왜곡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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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구자 박태균의 호흡


역사교육 : 저희가 이거는 꼭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는 분명히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지성인과의 대화를 통해 생각도 정리하고, 의견도 여쭈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너무 감사한 답변이셨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현재 꾸준히 대중서 작업을 하고 계신데요, 대중들에 학문적으로 쉽게 접근하고자 하시는 모습 많이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교사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작업이나 혹은 이제 학문적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 등이 있다면 무엇이 있으신지 여쭙니다!


박태균 : 주변 교수님, 선생님들이 많이 논문과 책을 쓰시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를 찾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너무 어렵게 써서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결국은 역사는 독자와 계속 호흡을 해야 하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이런 면에서 노력을 하고 있죠. 노력은 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연구자들의 인식도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대중서로 분류될 수 있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모두 저의 연구서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제가 많은 문제를 던지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연구를 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인데, 다른 연구자들은 그 책을 연구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쉬운 책이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저의 문제의식들을 가져가 자기들 논문에 썼더라고요. 이것은 표절이거든요. 따라서 저는 이런 면에서 연구자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선생님들과 할 수 있는 것은 이런(줌을 통한 소통) 방식입니다. 선생님들께서 가르치시다가 궁금해 하시는 것을 소통을 통해 제가 해결을 해드리고, 그와 관련한 최신 지식도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가르치시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을 아무리 많이 주더라도 기업 강연은 잘 안가지만, 선생님들 대상의 강연은 시간이 맞으면 가는 편입니다.


어쨌든 역사뿐 아니라 모든 학문은 대중과 호흡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 라는 게 저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제가 역사비평 주간을 할 때도 ‘어렵게 글 쓰는 필자들 글은 받지 말자’라는 게 저의 주장이었으나 쉽게 글 쓰는 역사학자들이 별로 없었기에 뜻하는 바 현실화 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네요.


역사교육 :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채팅창에 난리가 났거든요. 교수님을 초대해 강의 듣고 싶어 하는, 이런 열화와 같은 반응이 나오네요. 꼭 약속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이로써 모든 인터뷰를 마무리 지어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해주신 말씀 너무 좋은 말씀이셨고, 특히 선생님들께서 현대사를 가르칠 때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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