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 만나書 ⑤ : 박건호 작가
>> 편집부 정리 | 담당 에디터 : 정겨울
역사 교과서에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구조’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역사가 생생하게 와닿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미시사나 생활사 서술은 평범한 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역사 교과서와는 다른 차원의 생생함을 전한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의 저자는 사진 한 장에서부터 일기장, 편지, 영수증, 사인, 사직서, 온갖 증명서까지 개개인의 삶과 일상이 담긴 물건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이러한 일상의 수집품을 통해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거대 역사에 가려져 있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평범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생생하게 그려낸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이번 호에서 소개한다. - 편집부 -
※지은이 소개 - 박건호 작가
196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서 기록학을 공부했다. 명덕외국어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지금은 강남 대성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답사를 가서 우연히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운 것을 계기로 30여 년간 역사 자료를 모으며 컬렉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수집’이란 최고의 즐거움이자 휴식이다. 그동안 모은 수집품의 양을 자신도 정확히 모를 만큼 방대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며 《국사 수업자료집》, 《주제별 슬라이드 수업자료집》, 《노래와 소리로 보는 우리 역사》 등 다양한 역사 교육 자료를 만들어 역사 교사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집품 하나하나에 담긴 깊고 오랜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역사 컬렉터’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수집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와 역사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책에서 발췌-
저는 명덕외고에서 근무할 때 문화사 수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문화사 수업 방식은 슬라이드를 통해 주제별로 문화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청자, 분청사기, 민화, 서울의 역사와 지리, 고구려 벽화 뭐 이런 식으로 굉장히 깊이 있게 학생들에게 수업했었죠. 그런데 대성학원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입시학원 특성상 슬라이드 수업은 애당초 생각하기 힘들었고, 다른 대안을 찾다 보니 실물을 직접 보여주면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겠다 싶었죠. 그리고 그게 슬라이드 수업과는 결이 다르면서도 결국은 서로 통하는 수업 방식입니다. 뭔가를 매개로 학생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에 적어도 2∼3개 정도를 보여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나, 하나 자료를 모았죠. 처음에는 매우 어설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집품이 늘어나고 수업의 연결 맥락에 적확한 자료들로 수업이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신분제도를 공부할 때는 호패 몇 개를 보여주면서 그 시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거제를 공부할 때는 ‘종경도(승경도) 놀이판과 윤목’을 통해 그 시대 양반집 자제들의 입신 양명의 꿈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여주는 자료들이 꼭 옛날 자료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수업을 그 시대 자료들로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현재의 자료들이라도 수업 주제와 관련되면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에 대한 수업이라고 하면 제가 고조선 시대의 유물 자료를 직접 가지고 수업 할수는 없겠죠. 그러면 1990년대 북한의 단군 유골 발견과 단군릉 건설에 대해 크게 보도한 시사잡지나 신문들이 있습니다. 또한 김대중 정부 당시 국내 소장가가 자신이 소장한 미송리식 토기 5점을 공개해 중앙일보 1면 톱으로 크게 실린 신문이 있습니다. 총 3면에 걸쳐 실린 신문기사인데, 거기에 보면 고조선의 대표 유물로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북한이 90년대 새로 만든 피라미드식 단군릉 네 귀퉁이에 거대하게 세워진 비파형 동검 사진도 실린 잡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옛날 그 시대의 자료들만 수업에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수업 내용이 먼저고 거기에 자료가 첨부되는 것이지, 수업 자료가 주가되고 수업 내용이 보조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윤활유 같은 존재, 혹은 학생들의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정신을 다시 집중시키는 매개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보통 컬렉터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도자기, 어떤 이들은 서예, 또 어떤 이들은 고서적 등등. 그런데 저는 그런 식의 기준으로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수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역사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그리고 교과 내용에 관련되느냐 아니냐, 수집 가격이 적정하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접근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과 내용에도 나오고 학생들에게 보여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면 비용이 비싸더라도 사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교과 내용에 부합되더라도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수집할 욕심이 사라지는 거죠. 다시 말하면 몇 가지 기준을 놓고 여러 조건에 충족되면 수집을 하게 되고, 몇 가지 조건에 충족되지 않으면 수집을 포기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고서 중에 『삼강행실도』는 일종의 유교 만화책이죠. 책에 그림이 실려 있어서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입니다. 세종 10년인 1428년 진주 사람 김화(金禾) 살부사건이 일어나죠.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이 백성들에게 유교 윤리를 가르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만든 책입니다. 그래서 더 쉽게 소통하기 위해서 글과 함께 그림을 활용합니다. 그런데 그림이 너무 번거로우니 더 쉬운 소통 수단을 찾다가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발명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훈민정음의 그 훈민(訓民)이 백성에게 유교 윤리를 가르친다는 뜻이죠. 그래서 저는 좀 과장되게 ‘김화가 한글을 발명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는 너무 비싸고 귀해서 수집하기가 너무 힘들죠. 몇천만 원 수준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삼강행실도가 충신, 효자, 열녀의 미담 사례를 모았다면 정조 때 여기에 장유, 붕우간의 미담을 추가한 『오륜행실도』가 만들어집니다. 이 책도 낱권의 경우 경매에 나오면 50만원 내외에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한 달 씀씀이를 줄이면 수집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거죠. 어차피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편제 방식은 동일하니까요. 너무 사례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직진으로 못가면 수많은 우회로가 있으므로 수집하다 보면 요령이 생깁니다. 혹시 수집에 관심이 있으시면 그냥 생각 없이 시작하면 길은 저절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저도 수집 초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떻게 이런 자료가 남아있을까 싶은 자료들이 너무도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또한 지식인들만 기록을 남겼을 거란 생각도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본능이라도 되는 듯이 수많은 민초들도 지식인들보다는 적지만 그들의 기록을 남겼으며, 그 기록은 무척이나 생생했습니다. 슬픈 마라토너 손기정의 베를린에서 현지 팬에게 해 준 사인을 수집했을 때 상당히 흥분했었죠. 말로만 듣던 손기정의 사인, 그것도 일제 강점기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큰 글씨로 ‘KOREAN'이라고 쓴 사인지를 보고 무척 감동했습니다. 역사 교과서 속의 그 이야기가 이렇게 생생하게 내 눈 앞에 나타나다니... 그래서 이 감동을 글로 쓴 것이 제 책의 5번째 장의 “나는 '기테이 손'이 아니라 손기정이다.”는 글입니다.
그리고 질문에 한국전쟁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에 한국 전쟁과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자료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2017년 7월에 수집한 진정서 한 통입니다. 편지 봉투와 함께 수집되었는데, 한국 전쟁 중 인민군 치하였던 1950년 9월 어느 날 우익 인사였던 송종섭이 잡혀가자 인민 재판을 앞두고 주민 몇몇이 송종섭은 우익 단체에 이름만 올렸고 인민의 착취한 적이 없으므로 속히 석방해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입니다. 이 진정서에서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민군 혹은 내무서에 잘 보이기 위해 ‘인민’, ‘동무’ 등의 용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은 생생하게 인민군 치하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처 제가 알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생생한 그 시대의 한 단면을 한 장의 자료가 불쑥 던져 주었을 때 그 느낌은 굉장히 강렬합니다. 그게 수집의 묘미죠.
앞의 질문과 좀 비슷한 거 같은데요. 제가 수집하는 대상이 되는 자료들은 이 세상에 무한정 흩어져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저와 우연히 만난 거죠. 수집을 하다보면 이게 억지로 수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수집을 하고 싶어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요. 반대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저한테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집품을 수집한다기 보다는 저와 수집품이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시도 있쟎습니까.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시에서 노래하는 이런 느낌입니다. 제가 역사 자료를 수집하면서 느낀 희열도 이런 것에서 오는데요.
2000년대 초반쯤 1919년 3월 경기도 시흥보통학교 제7회 졸업 기념 사진을 수집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진 속에 20여 명의 학생과 4명의 훈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4명의 교사 모두 검정색 제복에 칼을 차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살벌했던 헌병경찰통치기의 학교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30장 이내로 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진을 수집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죠. 그런데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저 제복과 칼을 가진 저 교사들이 누굴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군지를 쉽게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수집한 후 10년이 지났을까요. 그 학교의 제8회 졸업 기념 사진이 경매에 나왔더군요. 7회 졸업식 보다 1년 뒤인 1920년 3월 말의 졸업식 사진이었습니다. 교사의 수는 똑같은데 학생 수는 14명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고 희열을 느꼈죠. 역시 많이 제작된 사진이 아니었을텐데 갑자기 나타난 거죠.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3.1운동의 영향으로 교사들의 복장이 죄다 민간인 복장으로 바뀌어있더군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어느 민족 사람인지 확연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아 교장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만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 3명은 한복을 입고 있었죠. 그러니 교장은 일본인, 3명의 교사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두 번째 사진이 저에게 말해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총독부 직원록 명부가 있다는 걸 알고 검색해 본 결과 일본인 교장의 이름은 ‘기무라 주토쿠(木村重德)’이고, 나머지 세명은 정확히 대응은 시킬 수 없으나 지영태, 최의순, 윤지병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밝히지 못했던 사실을 결국 또 다른 사진이 나타남으로써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준 셈이죠. 이렇게 하나 하나 숨겨진 사실들이 드러날 때마다 저는 큰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저도 제가 얼마나 수집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모 신문기자와 인터뷰 중에 대략 만점은 넘을 거라고 했는데, 1만 점이라고 기사가 나갔더군요. 몇만 점은 될 거예요. 책을 낸 이후 이런 저런 연유로 새롭게 알게 된 컬렉터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유대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데요. 제가 만난 컬렉터들은 자신의 거주 공간 외에 별도의 자료실이나 창고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수집 단계부터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수집 기준의 하나라고 말씀드렸었죠. 그러면 부피가 큰 건 보여줄 수가 없겠죠. 그러니 수집 단계부터 한번 걸러집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큰 부피의 물건도 없고, 주요 A3 크기의 클리어 파일에 끼워서 보관하는 것이 제 수집자료의 80% 정도를 차지하므로 생각보다는 보관의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최근에 만난 어느 컬렉터는 자신의 조그만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서 부지도 마련해 놓았는데, 그 땅이 이런 저런 이유로 팔리게 되면서 지금은 그 물품들을 팔고 계시더군요. 이사도 해야 되고, 도저히 계속 끌어안고 같이 살 수는 없으니까요.
새롭게 수집의 세계에 입문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수집 초기부터 ‘내가 왜 수집을 하는가’라는 자신의 목표를 명확히 해야 되고요.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수집하는 물건을 보관할 공간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분은 본인의 집에도 물건이 많은데, 따로 컨테이너 박스를 임대해 매달 20만 원 정도 사용료를 주고 자료 보관을 하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보관할 공간 확보가 잘 안 되는데 자꾸 수집을 하게 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가족 간의 갈등이 일어날 소지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수집 자료를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면 부피가 작은 것을 수집하라. 이것이 요지입니다. 제가 쓴 책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를 보시면 총 14가지 수집품과 그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각 장의 앞머리에 소개된 수집품을 보십시오. 그 자료를 다 모아도 A4 크기의 종이봉투에 다 들어갈 양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집 초기부터 그런 계획과 구상도 반드시 해야 됨을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특정 경매사이트를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미국에 e-bay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역사가 오랜 코베이라는 경매 사이트가 있습니다. 제가 수집하는 자료의 거의 80% 정도는 거기서 온라인 경매로 수집합니다. 그런데 거기 말고도 유사한 사이트가 많은데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결될 겁니다. 온라인 경매를 하게 되면 시간을 내어 직접 경매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온라인으로 하루에도 온갖 종류의 물품이 올라오죠. 그런데 그것들을 다 볼 수도 없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카테고리가 있으면 그것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면 ‘근현대생활자료’, ‘도서’, ‘미술품’ 이런 식으로 자신의 관심에 부합되는 카테고리를 정해서 물품을 훑어보는 것부터 시작하죠. 저도 처음부터 수집했다기보다 그냥 구경하는 재미부터 맛보았습니다. 제 역사 지식의 2할은 생생한 자료들 구경에서 나온 겁니다. (웃음) 그리고 각 물품마다 마감 날짜와 시간이 나와 있습니다. 종료 시간 기준으로 가장 고액을 응찰한 사람에게 물품이 낙찰되는 거죠. 낙찰가격은 최고가를 부른 사람의 가격이 아니라 그 밑에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이 응찰한 가격으로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 가격이 12만 원인 어떤 물품의 경우 응찰 단위가 만원이라고 하죠. 그러면 13만....14만....이렇게 응찰하는 거죠. 그런데 마감 시간에 A는 너무 저 물품이 가지고 싶다고 해서 100만 원 적어냈고, 두 번째 높은 가격을 적어낸 B는 25만 원을 적어냈다고 가정하면 낙찰가는 100만 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25만 원 정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자세하게 말씀을 드린 거 같은데요. 그냥 재미로도 한번 봐보시면 역사를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지실 겁니다. 아니면 단순히 시간 때우기도 좋죠.
경매에서 보았던 유명한 역사 자료 이야기도 질문하셨는데요. 수없이 많습니다. 백범 김구의 글씨,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 천인 천자문, 김대중 대통령 붓글씨, 독립군 관련 자료들, 당백전, 호패, 지계, 대한제국 호적표, 각종 민화들, 도자기들, 종경도 놀이판, 민주화 운동 자료 등등. 그리고 제 책의 소재가 된 자료들 대부분도 그쪽에서 만났던 것들입니다.
제가 교직에 처음 나온 게 1993년이었습니다. 명덕외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요. 첫해부터 전국역사교사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배재고에 계신 이헌주 선생님, 광성고에 계시는 한상일 선생님이 제 대학 선배들이신데, 그 두 분 덕에(?) 일천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그 모임에 참여했죠. 당시는 전역모도 출범 초기라서 많은 것들이 정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고, 자료 만들어 공유하고, 답사가고 그렇게 했습니다. 박병섭 선생님이 만드신 학습지가 학습지로는 거의 최초였을 겁니다. 거기에 착안하여 《국사 수업자료집》을 만들었고 그걸 모임에서 책자로 인쇄해 전국의 선생님들과 공유했습니다. 또 제가 인터뷰 초반에 말씀드렸다시피 명덕외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 시대 문화사 수업에 활용했던 슬라이드 수업을 정리하여 《주제별 슬라이드 수업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워낙 젊었을 때라 힘들건 모르고 재미로 했던 것 같습니다. 슬라이드 수업은 원래 학생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자주연수 때에는 가끔씩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시범수업 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었죠. 또 ‘자료수집과 활용’이란 주제로 제가 자주연수 때 몇 번 발표했던 걸 보면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기 전에도 분명히 자료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서울 모임에서 자주연수 말고 별도로 슬라이드 수업을 몇 회에 걸쳐 특강 형식으로 했는데, 거기에 저보다 젊은 선생님들도 참여하셨죠. 그때 그 특강에 참여했던 두 청춘 남녀 선생님 중에 ‘눈이 맞아’ 결혼한 분이 계십니다.
역사교사라기보다 체육교사에 가깝게 보이는 ‘이’모 선생님과 교직에 갓 나온 ‘진’모 선생님이 주인공이신데요. 지금도 ‘이’모 선생님은 전역모에서 활동하고 계셔서 실명은 공개하기 힘듭니다. 제가 결과적으로는 그 두 선생님의 중매쟁이가 된 셈이죠. 한 3년 전인가 이 두 부부 선생님과 강남역 근처에서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생각나는 에피소드라면 에피소드입니다. 저는 제 개인 사정이라기보다는 ‘학교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직후 몇 년간은 전역모에 관여하다가 제 신분이 현직 교사가 아니라 결국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를 전역모 초창기 멤버로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7년 교사 생활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전역모입니다. 직접 관계하고 있지는 않지만, 애정을 가지고 옆에서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쓴 책을 가지고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저로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고 또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가 교직을 떠난 지 올해가 20년 됩니다. 20년 전에 제가 쓴 글들이 『역사교육』에 더러 실리곤 했는데, 그 20년 뒤에 제가 손님으로 또 작가로 이렇게 인터뷰하게 되었네요. 오래전 떠났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까요. 어쨋든 옛날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의 역사 수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뉩니다. 명덕외고 7년은 주로 슬라이드를 통해 수업하는 방식으로 문화사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이 슬라이드 수업은 당시 최신의 수업 기자재였죠. 그때의 자료 수집은 좋은 사진 자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사 이외의 수업은 교실에서 강의식으로 하는 것이었고, 실물로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대성학원에 나와서 20년간 재수생들을 가르치면서는 슬라이드 수업은 완전히 접고, 하나하나 실물 자료를 보여주는 방식의 수업이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실물 자료의 수준이 향상된 20년 기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매시간에 무엇을 들고 갈지도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새로운 자료가 수집되면 교체가 되겠죠. 저는 입시학원이라는 매우 제한된 조건 속에서 나름의 영역을 개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에서 나온 뒤 엄청나게 진전된 교육 기자재의 보급, 다양한 형태의 수행 평가 등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수업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화하기 매우 어려운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름의 틀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처한 조건은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궁리하고, 혼자가 안되면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그런 노력 속에서 학교 현실에 가장 어울리는 수업 모델이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료가 많아도, 아무리 성능 좋은 교육 기자재가 있어도 교사의 열정과 치열한 모색 없이는 그것은 화려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네. 안 그래도 이런 경우가 종종 나타나더군요. 제가 수집한 자료 중에 ‘공출 보국’이라고 쓰여진 사기 그릇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제가 금속제 그릇을 공출하죠. 그때 일제가 놋그릇 등을 가져가면서 대용품으로 교환해 준 것이죠. 저도 수집하기 전에는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죠. 그러니까 수탈은 분명 수탈인데 수탈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랐던 거죠. 수집이 저에게 준 선물 같은 것이죠. 우리 교과서를 보면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 때도 ‘쌀 수탈’, 1940년대 미곡 공출, 식량 배급 제도 때도 ‘쌀 수탈’이라고 하니 학생들이 수탈의 양상에 대한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하죠.
그래서 저는 ‘식량 배급 통장’을 보여주면서 이런 차이점을 설명해줍니다.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이 대립하죠. 식민지근대화론은 동의할 수 없지만, 너무 지나치게 ‘수탈’ ‘수탈’만 구호처럼 이야기하지 그 수탈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 당대 민중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점이 좀 아쉽습니다. 저는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게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건 학교 교육현장에서도 당연히 그래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공간이 그 어느 곳이든 본질은 동일하잖아요.